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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이] 전력 60분 _ 엿보기

1.

“저 재수 없는 여자가.”

극이 시작하기 전, 관객이 모두 들어찬 오페라 하우스는 아직 어수선했다. 그 부산함 가운데 레오나는 맞은편 박스석을 노려보며 짜증스레 읊조렸다. 그리고선 이내 자신의 곁에 누가 앉아있다는 것을 새삼 상기해낸 모양인지 “아……하하.” 멋쩍게 웃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그렇다고 하여 들은 것이 듣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이무스는 숙녀를 위해 들어찬 관객들의 부산함에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옷매무새를 가다듬곤 등받이에 등을 바르게 기대었다. 사실 레오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레오나가 가리키는 재수 없는 여자 벨라는 소문과 평판이 썩 좋지 않았고, 이제 갓 18세가 된 레오나는 사실의 왜곡 여부를 판단하여 누구를 판단할 만큼 성숙한 여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벨라는 몸 팔아 연명하던 접대부 출신인데, 그녀의 손님 중 둘째가라면 서러운 난봉꾼 펠리오르의 측실이 된 여자로 스스로 밑바닥에서 출세했다 여기는 여자였다. 워낙에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여자인지라 잠시 유명인사가 된 그녀에 대한 소문은 무수히도 많았다, 예를 들어 정실의 식사에 약을 타 유산을 시켰다거나, 한 하녀가 제 남편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는 이유로 눈을 지진 후 내쫓았다거나, 마구간의 마부와 정원사와 한 자리에서 정을 통했다거나, 그녀의 생일 파티 때 그녀의 옛 일터에서 마약파티를 벌였다던가 하는. 그녀에 대한 소문 중 반은 사실에 기인한 것이고, 반은 출처를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레오나를 비롯한 무수한 사람이 그녀와 같은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녀와 엮였다 하면 그저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질 나쁜 가십거리의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었고 그것의 대부분은 벨라의 입술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역시 그 중의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으나 사람들에게는 그저 떠들 거리가 중요했지 진위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격이 떨어지는 것 같아. 레오나는 그리 생각하며 새침하게 부채를 흔들었다.

2.

“괜찮소?”

다이무스가 레오나에게 물었다. 말투는 연인이 진실로 걱정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무적인 것에 가까웠다. 레오나가 다이무스가 사랑하는 연인이었더라면 그 말투는 다정스러울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레오나는 집안끼리 정한 다이무스의 정혼자였다. 홀든 태생에서 기인한 당연스러운 업 같은 것이었다. 남은 여생을 함께 할 사람이 그런 식으로 정해진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검을 제외하고선 자신의 인생을 제 뜻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저 그로서는 양가에 그리고 그녀에게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이었고, 그렇기에 숙제를 하듯 저번에 그녀가 흘리듯 보고싶다 얘기한 공연으로 예매한 것이다. 세심하기도 하지, 하지만 아직 집안보단 사랑의 호기심에 활활 타고 있을 소녀에 가까운 숙녀분께서는 어딘가 조금 불편해보였다. 애초에 박스석이 오페라 관람을 위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유독했다. 보통 박스석의 여인들이라면 그러했다, 한껏 멋을 내고 온 것이 아깝지 않도록 어느 다른 귀족 남자에게 보여지기 위해 우아한 모양새로 앉아있는다거나, 오페라 글래스 너머로 자신이 보고싶은 무언가를 찬찬히 훑어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레오나는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도 정숙이라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먼 그녀였지만―하지만 다이무스는 그것을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 생기 넘침이 그녀의 매력이었으므로― 오늘은 그 부산스러움이 유난했다. 그녀는 가끔 다리를 달달 떨기도 했고,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기도 하였으며, 무엇인가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위해 이따금씩 주위를 두리번거렸기 때문이었다. 아픈 것인가, 라고 생각하기에 안색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의 그녀는 괜찮지 않아보였다.

“네, 조금…… 어지러워요. 숨이 가빠요, 공기가 탁한듯 하네요. 홀든경, 결례인줄은 알지만 잠시 바람을 쐬고 와도 될까요?”

“함께 일어나도록 하지.”

“아, 아녜요, 아녜요! 홀든경의 관람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잠깐이면 괜찮아질 거예요, 곧 돌아올게요.”

함께 일어나겠다는 말에 레오나는 질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잔뜩 상기된 그녀의 표정을 보자니 함께 나섰다가는 없던 일도 큰 일이 될 것 같은 표정이라 다이무스는 그저 “흠. ”하고 낮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선 잰걸음으로 박스석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사라지고 빈 자리에도 오페라의 극은 한참이었다. 「그가 누구를 사랑하던 상관없어. 그에게 애인이 있든 부인이 있든 상관없어. 그는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3.

톡톡, 밀어를 속삭이듯 누군가 가벼이 오른쪽 어깨를 두드렸다. 레오나와는 이리 살가운 장난을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니 뒷자리에 선 누군가가 허리를 수그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이내 익숙한 얼굴이 목덜미로 내려와 인사를 했다.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향수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진했다. 남자의 것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했던 이글의 등장에 약간의 심기 불편함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구 기다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나.”

“레오나는 어디 갔어? 응? 우리 형수님은 어디 갔을까.”

이글은 그렇게 말하며 보란듯이 엄지로 제 입가를 문댔다. 시선이 자연스레 그리로 갔다. 립스틱으로 보이는 뭉그러진 색조화장이 그의 입가에서 조금 흐려졌다. 하는 행동으로 보아 그 자국도, 코가 마비될듯 진했던 향기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귀족아가씨에게는 금지된 사랑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이미 집안의 뜻대로 혼처가 정해진 그녀는 하필 제 부군이 될 사람의 동생과 사랑에 빠졌음에 비통해했고, 그와의 밀애에 한껏 황홀하였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비련함에 깊이 취해있었다. “저런 것 보단, 이 상황이 더 재밌지 않아?” 이글이 키들대며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 흠~. 구경이라도 하듯 오페라 하우스 내부를 한번 쭉 훑었다. 한참 극이 치달아 가는 무대부터, 1층에 자리한 관객들, 그리고 서로의 관음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산스러운 2, 3층의 박스석, 그리고 이글 홀든은 가장 마음에 드는 배우를 찾아냈다. 레오나와 이글의 관계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다이무스는 그녀가 꿈꾸는 사랑은 줄 수 없었을 것이므로. 하지만 난데없이 들이닥친 그의 무례함에 다이무스가 다그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글.” 그리고선 정작 이글을 대할 가치도 못 느끼는 것처럼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레오나양은 지금 어디에 있나.”

“아아, 그런거 말고. 지금은 나한테 집중하라고.”

이글은 한 손으로는 뒷짐을 치고, 다른 한 손을 뻗어 다이무스의 턱 아래에 가져다 댔다. 까딱,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밀어 올리자 의외로 작은 움직임에도 다이무스의 고개가 젖혀졌다. “응? 다이무스.” 그 다음은 순식간이었다. 다이무스가 무어라 다그치기도, 눈으로 그를 채근하기도 전에 동의 없이 입술이 맞물렸고, 혀가 닿았고, 사락, 올려묶은 긴 머리가 옆으로 쏟아졌다.

4.

“어머어머, 저길 봐요!”

퍽퍽퍽퍽, 벨라는 조심머리 없게 접은 부채로 펠리오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간 아픈 것이 아니라 펠리오르는 조금 짜증스레 어깨를 문질렀다. “무슨 일이오?” 펠리오르가 묻자 벨라는 저기, 저기이, 하고 박스석 맞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용수의 몸이나 훔쳐보던 오페라 글래스 아니던가? 그는 못마땅한 모양새로 그녀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고, “오! 이런이런…….” 이내 감탄사를 뱉었다. 그래, 그녀가 물어다 주는 것 중에는 재미 없는 것이 없었다. 펠리오르는 이내 벨라가 이렇게 유난법석인 이유를 알았다.

5.

“아니, 글쎄 세상에…….”

“홀든가의 자제들이 남색을 한다네요, 그것도 형제가…….”

“불쌍한 레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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