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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시간과 시간의 메시아성. 벤야민과 더불어 맑스

Time Transfixed, 1938 by Rene Magritte

자본의 시간과 시간의 메시아성. 벤야민과 더불어 맑스*

사미 카티브**

사건의 기차는 그 전방에 있는 철로를 풀어주는 열차이다. 시간의 강은 그것과 함께 그 둑을 쓸어버리는 강이다. 여행자는 견고한 벽들 사이의 견고한 바닥 위를 돌아다닌다. 그러나 그 동료 여행자들이 내는 움직임에 의해 바닥과 벽은 또한 미세하게, 그렇지만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Robert Musil: The Man Without Qualities).

1978년에,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그가 다룬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요약하면서 흥미로운 논평을 썼다.1)

진정한 혁명의 본래적 과제는 […]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시간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근대의 정치적 사유는 역사에 주목하기는 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시간개념을 고안해 내지는 못했다. 역사 유물론 또한 자신의 역사개념에 꼭 들어맞는 시간개념을 만드는 일을 태만히 했다(Agamben, 1993/2010: 91/165-6).

아감벤의 진술로부터 단서를 취하면서, 나는 우리가 시간의 유물론을 위한 기반을 발견하는 것은 맑스 자신에서라고 주장할 것이다. 맑스는 ‘자본의 시간’에 관한 장(章)을 결코 쓰지 않았다. 하지만, 척도로서의 시간time-as-measure 개념은 물질화된 ‘응결된’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전체 가치형태론에 있어 매우 결정적이다. 정치경제학 비판에 관한 맑스의 성숙한 저작들을 증류하여, 이 논문은 맑스의 “자본의 시간”에 대한 암묵적인 이론과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테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On the Concept of History」에서 윤곽이 그려진 메시아적 시간에 대한 그의 후기 저작들 사이의 대결을 표면화한다. 역사유물론에 대한 벤야민의 메시아적 전도messianic inversion는 맑스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비판 지점을 다룬다.

(1) 사회적으로 특수하고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생산양식으로서 자본주의의 역사화historicization, 그리고 (2) 역동적인 사회적 세력과 그들의 갈등의 과정으로서 역사의 개념화. 우리가 볼 수 있듯이, 벤야민의 속류-맑스주의 및 역사주의적 역사기술에 대한 비평은 선형성, 연속성, 균질성에 기초한 모든 역사의 개념의 근본적인 역설을 폭로한다. 벤야민의 강렬하게 맑스적인 질문은 이렇다. 메타-역사적 또는 초-역사적 관점에 의지하지 않고서 계급투쟁의 정치적 현전(presence)과 진정으로 역사적인 경험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만일 과거와 현재가 선형적이고 연속적인 방식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시간Jetztzeit(‘now-time’)의 비(非)연대기적 성좌a-chronic constellation를 형성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자본-역사capital-history의 제자리로의 도래coming-to-itself(자기-자신으로-복귀[Zu-sich-sellbst-kommen])의 목적론으로서 세계사에 대한 압제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을 자제할 수 있는가?2) 혹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어떻게 비상대주의적인, 즉 모든 허위로 보편적인, 목적론적인, 또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결여된 진정으로 보편적인 역사의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시간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을 구축함으로써, 자본주의 그 자체의 역사화의 양식을 역사화할 수 있는가?3)

맑스, 또는 자본의 시간

맑스에서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차원의 시간성temporality을 발견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균질하고 순환적인cyclical,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원한time-less’ 시간과 역사적 시간의 파괴적, 혁명적 개방. 이러한 이중성은 그 자체가 이중적이다. 그것은 자본의 반복적인 시간으로서의 시간 그 자체time itself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시간 내부에서의within time 역사적 과정, 즉 정치적 투쟁, 사회적 관계 및 역동적 생산성의 관점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자본주의의 예언된 종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정통 맑스주의가 보기에 역사는 역사 내부의within history 그것의 공산주의적 텔로스telos(계급 없는 사회)를 향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선사시대prehistory를 끝내기 위한, 그리고 진정한 역사에 들어가기enter history proper 위한 ‘객관적’ 역사적 힘에 의해 내재적으로 추동되었던 반면에, 비판적 맑스주의는 역사 그 자체라는 지평의 비(非)목적론적a-teleological, 유토피아적 또는 메시아적 폭파blast를 시도했었다. 이러한 역사적 시간성의 두 측면을 해명하기 위해, 나는 설명의 두 가지 수준 간의 차이를 식별하기를 제안한다. 첫째로, 역사 내부의 사회적 구성체within history social formation로서 자본주의의 수준에서, 둘째로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적 시간capitalism’s own historical time의 생산으로서 자본주의의 범주적 수준에서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두 가지 수준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이다.

출발점으로 나는 시간과 사회의 기본적인 결합을 다룬다. 만일 유명한 속담 “시간은 돈이다”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의 상호의존성 속에서 자본 축적의 시간적 구조와 노동력을 탐구해야만 한다. 맑스가 주장했듯이, 자본은 “물적 존재가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사회구성체에 속하는 특정의 사회적 생산관계이며, 이 생산관계는 어떤 물적 존재를 통해서 표현되고 이 물적 존재에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적 성격을 부여한다.”(Marx, MEW 25/Ⅲ-2: 822/1088).4) 만일 자본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관계라면,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관계의 시간적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가? 자본의 운동은 그 ‘실체’가 응결된 ‘추상적 인간 노동’에 의해 형성되는 가치의 자기증식self-valorization으로 규정되고 있다. 만일 후자가 어떤 특수한 질(특성)이나 주체성도 결여하고 있는 압축된 노동으로 구성된다면, 그것의 시간성은 어떻게 측정될 수 있는가? 크로노미터적chronometric(크로노미터로 측정한) 시간을 뛰어넘는 특수한 ‘자본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예비적 가설로서, 나는 자본의 시간에 대한 하인츠 D. 키트슈타이너(Heinz Dieter Kittsteiner)의 헤겔적-하이데거적 규정으로부터 단서를 얻는다. “자기증식하는 실체-주체의 운동은 자본의 역사적 시간을 시간적으로 한정한다(temporalize; zeitigt)”(Kittsteiner 2004: 120).5) 다시 말해, 자본의 순환적 운동은 주, 일, 시 단위로 측정된 그 고유의 것이 아닌 크로노미터의 시간으로 등록될 수 없는 고유한 ‘자본-시간’을 생산한다. 그러나 어떻게 ‘자동적 주체automatic subject’(Marx 1990: 255)로서 자본은 그 자체의 시간own time을 생산하면서 시간 안에서in time 진행할 수 있는가? 게다가, 우리는 어느 정도로 시간을 사회적 관계로서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 제기를 전개하면서, 나는 유물론적 벗어남subtraction(감산, 공제, 빼기) 또는 자본주의적 능력dynamis(힘)의 탈잠재화de-potentialization는 절대적인 뉴턴적 시간, 상대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시간, 또는 초월(론)적transcendental 칸트적 시간과 같은 전통적인 시간성의 개념에 단순히 의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통 맑스주의는 대체로 뉴턴적 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존재론을 기반으로 하여 과학적-경제학적 시간 개념을 따라 구축되었기 때문에, 그 혁명적 사상이 객관주의적 선형적, 진화론적, 또는 역사주의적 해석틀의 경계 내부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소급적으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발터 벤야민의 후기의 맑스주의는 어떻게 역사의 형이상학―역사적인 ‘신의 시점God’s-eye view‘에 대한 역사주의의 암묵적인 참고든 역사적 진보에 대한 목적론적 신념이든지 간에―에 의지하지 않고서 열린 역사를 폭파할 것인지의 문제에 대한 풍부한 기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벤야민, 또는 시간의 메시아성

그의 테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벤야민은 미래성futurity을 향한 어떠한 진화론적 지향도 거부했고, 대신에 역사에 대한 메시아적 정지messianic standstill에 근거하여 “과거 속으로 뛰어드는” 혁명적인 “호랑이의 도약”을 요청했다(Benjamin, SW 4/선집 5: 395/345). 1940년에 작성된 벤야민의 테제는 정치적으로 속류 맑스주의와 1939년 히틀러-스탈린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이후에 돌이킬 수 없게 신뢰가 손상된 역사적 진보에 대한 그 신념을 겨누었다. 하지만 벤야민이 보기에, 서유럽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정당에 의해 이루어진 정치적 오판은 전술적이거나 전략적인 실패에서 유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그들의 근원적인 역사주의적이고 진보주의적인 개념들과 관련된다. 그 결과, 벤야민의 메시아적 맑스주의는 역사와 시간성에 대한 다른 개념의 밑그림을 그리고자 시도했다. 그는 이러한 대안적인 시간을 지금시간Jetztzeit 또는 ‘현재시간now-time’이라 불렀는데, 이는 곧 속류 맑스주의적, 역사주의적, 또는 진화론적 역사기술에 함축된 반복적인, “균질하고homogenous(동질적이고) 공허한empty 시간”과는 대조적으로 충만한 메시아적 시간을 제공하는 압축된condensed 또는 수축된contracted 시간이다(SW 4/선집 5: 395/345). 그렇게 하면서 벤야민은 신학, 아니 더 정확히는 유대교적이고 초기 그리스도교적인 메시아적 시간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이러한 신학적 인유allusion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역사의 개념에 대하여On the Concept of History」테제 17번의 대안적인 판본에서, 벤야민은 메시아적 사유와 맑스주의의 관계에 대한 그의 정치적 견해를 요약하면서 놀랄 만큼 아름다운 개요를 공표했다.

마르크스는 계급 없는 사회의 관념 속에 메시아적 시간관을 세속화했다. 그리고 그것은 잘된 일이다. 불행은 사회민주주의가 이러한 생각을 ‘이상’으로 떠받든 데서 시작한다. […] 계급 없는 사회가 일단 무한한 과제로 정의되었을 때, 공허하고 균질한 시간이 말하자면 사람들이 다소 느긋하게 혁명적 상황이 도래하기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랑방(舍廊房)으로 둔갑했다. 실제로는 자신의 혁명적 기회를 동반하지 않는 순간이란 없다. 그 기회는 다만 특수한 기회로, 즉 전혀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여 전혀 새로운 해답을 얻을 기회로 정의될 필요가 있다(SW 4/선집 5: 401f/354-5.).

우리가 이후에 보게 될 것처럼, 이러한 ‘무한한 과제infinite task’의 역사적 지평은 정확히 자본-시간의 거짓되게 무한한spuriously infinite 지평이다. 후자에 맞서서, 벤야민은 사회민주주의의 어떠한 세속적이거나 종교적 판본뿐만 아니라 신칸트주의적 관념론에 반대하는 긴급성urgency의 메시아적 정치를 제안한다. 결과적으로 메시아적 관념에 대한 벤야민의 견해는 맑스주의의 신학적 판본과도 정치신학의 맑스주의적 각색과도 혼동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어떠한 선형적이고 진보주의적 미래성의 개념도 중단시키는 다른 역사적 시간성을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역설적으로, 벤야민이 보기에 신성모독적인profane(세속적) 역사는 그것이 메시아적인messianic 것에 대한 반정립적antithetical, 해결 불가능한, 미완의 관계에 서 있음을 현시하는 한에서만 진정으로 역사적historical 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메시아 자신이 비로소 모든 역사적 사건을 완성시킨다. 그것도 메시아가 그 역사적 사건이 메시아적인 것에 대해 갖는 관계를 스스로 구원하고 완성하고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이이다.”(SW 3/선집 5: 305/129). 이 접근할 수 없는 관계(또는 비관계a-relation)는 유토피아적 미래를 지향하진 않지만, 과거와 현재를 지금시간Jetztzeit으로서 단락시키는short-circuiting 특정한 성좌를 설명한다.

이러한 동시발생적 단락synchronistic short-circuit 또는 벤야민이 일컫듯이 ‘현실화actualization’(1999: 460)은 구원redemption을 추구한 과거 세대의 ‘희미한 메시아적 힘weak messianic power’에 상응한다(SW 4/선집 5: 390/332). 슬라보예 지젝이 주장했듯이, 그것은 정확히 이러한 단락인데, 그 단락에 의해 벤야민은 소급적으로retroactively 과거 실패했던 혁명의 잠재성을 구제redeem하고, 역사의 ‘죽지 않은 것the undead’의 여전히 집요한―아무리 희미한weak 것일지라도―요구를 현실화하고자 시도한다.6) 그러므로, 벤야민의 반(反)역사주의적 입장은 대안적인 역사기술historiography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일의 존재론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역사 개념을 겨냥한다. 역사는 결코 완결되거나 완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불완전imperfect하고 소급적인 수정의 여지가 있다.7) 따라서 역사기술자historiographer의 과제는 궁극적으로 역사적 주체와 일치한다. 둘 다 역사와 사변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그들의 실현되지 않은 과거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진보와 선형적 연속체 비판은 사회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 비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역사 그 자체의 실제[추상]과정Realprozeß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은 단지 그릇된 역사기술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본-시간의 결코 폐쇄되지 않는 또는 완수되지 않는 존재론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진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궁극적으로 현실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척도로서의 시간의 아포리아

맑스의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1847)에서 이미, 우리는 이후에 맑스적 시간 이론이라고 부를만한 것의 예비적 개요를 찾을 수 있다. “시간이 모든 것이며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인간은 시간의 육화die Verkorperung der Zeit(time’s carcase)일 뿐이다. 질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단지 양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한 시간 대 한 시간, 하루 대 하루 [...]”(MEW 4/1988: 86/54).8) 자본주의에서 시간은 인간을 그 법칙에 체계적으로 종속시키는 소외적이고 부정적인 원칙으로서 나타난다. 현대 산업의 결과로서, 인간은 그의 모든 유적인 능력, 재능 그리고 잠재력으로부터 추상화되어, 공허한 기계적 시간의 단순한 화신embodiment이 된다. 맑스의 균질하고 양적이며, 균등화 원칙의 관점에서의 ‘인간주의적’ 시간 비판은 이후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1857)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요강』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를 “창조적 잠재력(소질)의 절대적 실행working out(성취)”에 대비시킨다(MEGA II.1/『요강』Ⅱ: 392/113).9)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경제가 결국 그것 자체로 귀착”되는 것이 “시간의 경제”라면, 생산양식을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든 시간의 구성 역시 변화시켜야만 한다(MEGA II.1/『요강』Ⅰ: 103f/155).10)

피터 오스본(Peter Osborne)이 보여주었듯이(2008),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차이, 즉 균질한 시간(자본주의)과 절대적인 생성의 운동(공산주의)의 차이이기도 하다.11)하지만 이러한 시간적 차이는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양과 질의 범주적 차이와 융합되어선 안 된다. 청년 맑스와 달리, 『자본Das Kapital』의 성숙한 맑스는 적어도 자본의 두 가지의 시간적 차원을 알고 있다. 자본주의 부상과 함께, 사회적 관계는 그 자체가 시간에 의해 측정되는 시간―노동시간―의 구현이 된다. 따라서 시간은 단순한 척도가 아니라 인간의 생산성의 창조적 잠재력을 생산하는 동시에 제한하는 사회적 관계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자본의 시간은 단지 양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양적이면서 동시에 질적인 시간 둘 다이며, 공산주의나 자유로운 활동의 질적인 시간에 대칭적으로 대립될 수 없다. 이러한 역설적인 시간성―척도로서의 시간(양)과 사회적 관계로서의 시간(질)―을 해명하기 위해 가치의 시간적 차원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가치의 시간적 차원

맑스가 『자본』에서 규정한 대로, 상품은 특수한 사회적 실체인 가치의 물질화 또는 결정화이다.

그러면 그 가치의 크기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그것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가치를 형성하는 실체’, 즉 노동의 양으로 측정된다. 노동의 양 그 자체는 노동이 지속된 시간으로 측정되고, 노동시간은 다시 1시간이라든가 하루라든가[한 주라든가]하는 일정한 단위를 그 척도로 삼는다(1990/2008: 129/92).12)

철학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시간에 의해 측정되는 것으로서의 가치에 대한 규정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시간 개념을 따른다. 그의 『자연학Physics』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의 척도로서, 반대로 운동을 시간의 척도로서 규정한다.

우리는 시간으로 운동을 측정할 뿐만 아니라, 운동으로 시간을 측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시간과 운동은 서로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운동의 번호이고, 운동 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은 운동을 표시한다[The time marks the movement, since it is its number, and the movement the time]. 꼭 우리가 번호 매겨진 것에 따라서 번호를, 예컨대 말 한 마리를 단위로 한 말들의 번호를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운동으로 시간을 측정하면서 많거나 적은 것으로 시간을 묘사한다(Aristotle, 220 b 15).

그러므로 만일 어떤 것이라도 시간 안에 있다면, 그것은 시간으로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움직여진 것, 그리고 정지 중인 것, one qua moved, the other qua at rest를 측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들의 동작과 정지를 각각 측정할 것이기 때문이다(221 b 16).13)

따라서, 시간 안에 있는 존재는 시간에 의해 측정된 존재이다. 노동력의 지출은 시간 안에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간은 노동을 소모하는 운동에 의해 측정된다. 이러한 가역적 관계에 이어서, 맑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시간 이론을 사회적 영역으로, 즉 가치의 가측성measurability(질quality)와 가산성countability(양quantity)를 허용하는 사회-시간적socio-temporal 기본 단위가 되는 ‘가치창조적 실체’로 옮겨 놓는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 단위는 그 자체가 시간으로, 즉 시간 안에서 측정할 수 없는 사회적인 또는 ‘추상적인 노동시간’으로 만들어진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으로 측정된 모든 사회적으로 지출된 노동의 총체성의 결정체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과 달리, 추상적 노동시간은 그것의 ‘운동’(여기선 소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결과에 따라 소급적으로만 측정될 수 있다. 자본이 ‘물질적’ 질, 즉 상품의 사용가치 차원에 무관심하므로 이러한 결과는 가치의 사용역register에서 표현된다.14)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추상적 노동시간은 ‘시간 안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맑스적인 척도로서의 시간의 역설은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Marx, 1990/2008: 129/92)은 추상적인 척도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 범위라는 바로 그러한 관념이야말로 이미 “주, 일, 시”로 계산된 크로노미터적 시간이 그 표준인 다중의 구체적인 노동시간으로부터의 추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수량화할 수 있는 시간 단위를 허용하는 바로 이러한 표준을 생산하는 것은 추상노동 그 자체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미 추상노동이라는 범주는 주어진 생산양식에 적용된 개념일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노동 시간의 단위로서 그야말로 이러한 표준의 생산이기도 한 ‘척도로서의 시간’의 사회적 양식을 암시한다. 이러한 시간의 단위는 고정되어 있거나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맑스가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이라고 불렀던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역사적 변수이다.

노동일이란 무엇인가? […] 노동일은 매일 만 24시간에서, 노동력이 그 일을 반복하기 위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약간의 휴식시간을 제외한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자명한 것은 노동자는 그의 하루 전체를 통하여 노동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또 그가 처분할 수 있는 시간은 모두 자연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노동시간이고 따라서 자본의 자기증식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 여기에서는 노동력의 정상적인 유지가 노동일의 한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하루에 가능한 최대한 노동력 지출이―비록 그것이 아무리 건강에 해롭고 무리이며 고통스럽다 해도―노동자의 휴식시간의 한계를 결정한다(1990/2008: 375f/374-376).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주어진 시간 동안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잠재력으로서 노동력은 그것의 “1노동일 가운데 사용 가능한 노동력의 최대한”(376/376)이 절대적인 시간의 척도를 갖지 않는 역사적으로 유동적인 정치적 투쟁의 결과이므로 고정된 매개변수parameter가 아니다. 생산성 증가와 더불어, 노동력의 가치 창조적 측면―자본을 위한 그것의 사용가치―역시 변화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변동은 시간의 외재적 표준에 의해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본적인 단위가 추상적 노동시간의 지출인 이러한 표준의 역사적으로 가속하는 운동 그 자체이다. 보통 말하는 그런 노동력―유적인 질 또는 포스트-오페라이즘이 주장했듯이, 순수한 역량potentia이나 능력dynamis과 같은―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추상노동은 노동력의 생산성의 역사적으로 상이한 수준의 효과이기도 하고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치로서의 추상노동은 자본의 자기증식 운동에 외재하는 것으로서 크로노미터적 시간에 의해 측정될 수 없는 역사적 지표이다. 하지만 생산성의 수준은 이미 추상노동이 구체노동의 양자quanta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전제될 때만 결정될 수 있다.

측정(양)과 사회적 관계(질)로서 추상노동의 ‘자동-시간적으로 한정하는auto-temporalizing’ 운동의 시간적 역설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맨 먼저 “가치 창조적 실체”로서 추상노동에 대한 어떠한 본질주의적, 생리학적인, 또는 경험주의적 해석도 거부해야만 한다. 물질적 대상성objectivity[Gegenständlichkeit]을 갖는 사회-시간적 사용역을 도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경험적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이다. 이러한 감각적-초감각적sensuous-supra-sensuous, “sinnlich-übersinnliche” (MEW 23: 85) 물질성을 위한 맑스의 용어는 오직 “가치의 대상성objectivity of the value”으로 불완전하게만 번역될 수 있을 뿐인 용어인 모순적 복합어 “가치대상성Wertgegenständlichkeit”(MEW 23: 66)이다.15)

상품체의 감각적이고 거친 대상성Gegenständlichkeit[objectivity, “thingish-ness”]과 대조적으로, 상품의 가치대상성Wertgegenständlichkeit[”value-objectivity”]에는 단 한 원자의 물질도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상품을 아무리 돌리고 뒤집어보아도 그것이 가치[를 소지한 사]물Wertding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상품은 그것이 인간노동이라는 동일한 사회적 단위의 표현일 때에만 가치대상성Wertgegenständlichkeit을 소지하며, 따라서 그 가치대상성Wertgegenständlichkeit이 순수하게 사회적인purely social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가치대상성은 오직 상품과 상품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자명해진다(1990/2008/2015, 138f/103/59. 번역수정).16)

그러므로, 추상적 인간노동, 추상노동은 감각적 물질성의 공간적 관점(단순한 또는 평균적인 노동의 양자量子)에서도 크로노미터적 시간(주, 일, 시로 측정된)의 시간적 관점에서도 아니고, 칸트의 초월론적인 직관, 시간, 공간의 형식을 넘어선, 모든 경험적 흔적이 결여된 순수하게 사회적인purely social relation 관계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 우선 상품들의 통약가능성commensurability을 허용하는 ‘동일한 사회적 단위identical social unit’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모든 지출된 추상노동의 총체성을 포괄하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결코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경험적 Gegenstände, 물건들objects로 가려져 있다. 자본주의에서 물건들이 “물적 외피sachliche Hülle”(MEW 23/2008: 105/157), 사회적 관계들, 즉 가치의 객관적 외피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17)

가치대상성Wertgegenständlichkeit(“value-objectivity”)의 유령적 물질성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들이 그것들의 필수적인 외관, 외양의 형식으로서 사물들의 관계로의 변형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적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가치대상성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은 [가치]척도, 유통수단, 자본으로서의 그 삼중적 기능에 있는 화폐이다. 그것의 가치를 참조함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기 위해, 보편적 측정으로서의 화폐는 수량화할 수 있는 추상노동의 사회적 기본 단위를 허용하도록 언제나 이미 전제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화폐는 상품언어Warensprache(commodity-language)(MEW 23/2008: 66/109)의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al, 상품언어의 모든 서술과 가정에서 계사copula로서 나타나면서, 모든 다른 형태들에 그것들의[상품들의: 인용자] 통약가능성을 보증하는 그러한 형식“이기 때문이다(Hamacher 1999: 174). 화폐는 수량화할 수 있는 가치와 그것의 ‘실체’, 즉 추상노동의 관계의 가능성의 필수적 조건이다. 화폐가 일반적 등가물로서 출현하자마자, 구체적 노동시간(크로노미터적 시간에 의해 측정된)의 추상적 노동시간(기존 사회에서 모든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성을 함의하는)으로의 사회-시간적 변형이 가능해진다. 화폐는 이러한 전환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야말로 그 조건이기도 한 감각적-초감각적 사용역이다.

자본의 역사적 시간

추상적 노동시간과 가치의 시간적 차원의 역설을 고려하여, 나는 본질적인intrinsic “자본의 시간”과 시계로 측정한 구체노동의 크로노미터적 시간인 비본질적인extrinsic 시간의 측정을 구별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상이한 시간 양식의 특성은 반정립적이다. 자본의 시간이 화폐나 상품으로서의 그 결정화된 집합체 상태에서 수축되고 응결된 반면에, 크로노미터적 시간은 역사적으로 공허한, 기계적 시간, 그리고 구체노동의 측정을 규정하는 추상적 시간으로 경험되는 선형적, 연속적, 균질한 시간 척도time-scale를 제공한다. 모이쉬 포스톤의 선구적인 연구 『시간, 노동 그리고 사회적 지배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를 따라서 나는 전자(자본의 시간)를 자본주의적 시간의 “역사적” 또는 구체적 차원이라고 부르고 후자(크로노미터적 시간)를 “추상적” 차원이라 부른다(1993: 291ff.). 이러한 용어법을 감안하면, 우리는 상품형태의 수준에서 언급된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이중적 성격이 포스톤의 구체적 시간과 추상적 시간의 구별에 대칭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히려 그 특성들은 교차대조chiasm를 형성한다. 역사적 시간이 추상노동의 시간적 차원을 표현한다면, 추상적(크로노미터적) 시간은 구체노동의 절대적 치수measurement로서 기능한다. 포스톤이 계속해서 주장하듯이, “역사적 시간은 그 내부에서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 흐름이 명백히 인간 활동과 무관한 추상적인 연속체abstract continuum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 내의in time 운동과 반대로 시간의of time 운동이다.”(1993: 294) 하지만 자본주의적 일상생활에서, 자본의 역사적 시간(시간의 운동)과 크로노미터적 측정의 추상적 시간(시간 내의 운동)은 뒤얽혀있다. 그것들은 포스톤이 “트레드밀 효과treadmill effect”라고 부르는 상호적 방식으로 서로 의존한다(1993: 289ff.). 자본의 역사적 시간이 주어진 시간 범위 이내에 생산된 더 많은 재화의 관점에서 생산의 역사적 표준에 의해 구성되는 반면에, 추상적 시간은 어떠한 역사성의 흔적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포스톤에 따르면, “상품형태의 두 차원의 상호작용은 추상적 시간 상수의 실질적인 재규정을 수반한다.”(1993: 292) 주어진 시간 범위 이내의 생산성 증가는 소급적으로 새로운 생산성 수준을 재구성하는 추상노동의 축약되거나 “밀도가 높아진denser” 추상노동의 단위를 야기한다. 추상노동의 측면에서 이런 새로운 생산성 수준 내지는 밀도는 추상적 시간으로 측정될 수 없다.18) 그러므로, 역사적 시간과 추상적 시간의 내적인 통접conjunction―그 트레드밀 효과―은 역사적 시간이 전체적인 추상 시간 척도의 운동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있다. 말하자면, 포스톤이 주장하듯이, “전체적인 추상 시간 축, 또는 준거틀은 각각의 사회적으로 일반적인 생산성 증가와 함께 움직인다. 사회적 노동 시간과 생산성의 기본 수준은 ‘시간 안에서 앞으로’ 움직인다.”(1993: 293)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적 시간은 이러한 상관적 요소function(함수)의 매개변수를 소급적으로 변화시키는 추상적 시간의 함수function이다. 상품형태의 두 가지 시간적 차원(추상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의 불가분의 상호작용으로 더 들어가지 않고, 나는 포스톤의 결론을 따른다. “이러한 역설은 추상적인 뉴턴적 시간의 틀 내부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1993: 292)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 새로운 “형태의 구체적 시간성”을 이해할 것인가(ibid.)?

포스톤과 대조적으로, 나는 가치의 시간적 차원과 그에 따른 자본의 시간적 구조는 추상적인 뉴턴적 시간의 틀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시간 개념 또한 넘어선다고 주장한다. 포스톤이 보기에, 역사적 시간은 생산성의 역사적 수준의 영구적 재구성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이러한 운동은 그것이 가치 프레임과 상호작용하는 한에서, 노동의 사용가치 차원의 상관적 요소(함수)이다.”(1993: 293) 다시 말해, 역사적 시간은 공간의 상관적 요소function가 된다. 이것이 정확히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시간 개념의 기저를 이루는 관념이다. “시간은 움직임과 움직여진 것의 척도이다.”(220 b 33) 유비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역사적 생산성 수준에 대한 포스톤의 규정에서, 시간은 공간적(상품들의) 운동의 상대적 측정으로서 기능한다. 즉, 구체적인 시간 내 존재being-in-time는 추상적 시간에 의해 측정된 존재이다. 결과적으로 포스톤의 구체적 시간성의 ‘구체성concreteness’은 공간적 측면에서 오직 상대적으로만 달성된다(즉, 단위 시간당 생산된 더 많은 물품들). 궁극적으로, 역사적 시간의 관점에서 시간을 재사유하려는 그의 시도는 공간과 시간의 전환가능성에 언제나 이미 의존하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틀 내부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반복과 가짜 무한(악무한)

만일 가치의 자기증식으로서의 자본이 정태적 상태가 아니라 시간 안에서의(양) 그리고 시간의(질) 역동적인 과정이라면, 우리는 비(非)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비(非)뉴턴적인 관점에서 그 역설적인 시간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다른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자본의 시간은 순환적인 시간을 암시한다.19) 하지만, 니체적인 “동일자의 영원회귀”와는 대조적으로 자본의 유통circulation은 엄밀한 의미에서 순환적이지 않다. 기 드보르의 교훈적 용어인 “가장된 순환적 시간pseudo-cyclical time”이 지시하듯이, 모든 가치증식valorisation의 원환circle이 상품 및 화폐로의 자본의 외화externalization를 요청하므로―적어도 가상적으로는―자본의 반복적인 시간은 불가역적으로 미래의 축적의 원환들을 향한다(1994/2014: 110/153-4).20) 비록 자본이 그 유통의 시간을 최소화하기를 추구할지라도, 한 존재양식(화폐)에서 다른 존재양식(상품)으로의 필수적인 형태변환metamorphosis를 결코 완전히 폐지할 수 없다.21)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 유통에 내포된 시간적 지표는 그 가장된pseudo 순환적 운동이 역사적 개방성을 결핍하고 있으므로 결코 적절한 역사적 형식을 획득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자본-시간의 역사적 지평은 헤겔이 “가짜 무한성”―유한한 과정들 또는 개체들entities의 무한한 반복―이라고 부른 것이다. 드보르가 논평하듯이,

생산의 시간―상품-시간―은 균등한 간격의 무한한 축적이다. 이것은 불가역적 시간의 추상화이며, 이 시간의 각 부분은 크로노미터에 의해 오직 양적으로 균등함을 입증해야 한다. 생산의 시간은 실제 현실 속에서 교환 가능한 성격을 지닌다. 상품-시간에 의한 사회적 지배 속에서 “시간은 모든 것이며, 인간은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은 기껏해야 시간의 잔해이다”(마르크스의 『철학의 빈곤』). 이것은 과소평가된 시간이 “인간 발전의 장(場)”으로서 시간의 완전한 전도이다(1994/2014: 110/153).

이러한 시간의 균등한 간격의 무한한 축적은 정확히 가짜 무한성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역적으로 그리고 끝없이 유한한 미래의 축적을 향해 진행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전지구적 규모에서 우발적인 사건들의 균등하고 교환 가능한 형태―세계 시장의 시간적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공허한 시간성은 그것이 선형성의 결핍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즉 교환 가능한 시간 단위의 균등한 간극으로 환원불가능한 시간의 파열 또는 감축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개방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드보르와 대조적으로, 자본의 시간은 양(축적, 가산성)으로서의 생산의 불가역적 시간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교환 가능한 시간 단위의 통약가능성(가측성)의 질을 함축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자본-시간에서 양과 질은 자기-준거적인self-referencing 주기cycle를 형성하지 않고 서로를 전제로 한다. 비록 드보르의 용어 “가장된 순환적 시간”은 이미 자본-시간의 이러한 기이한 특질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의 이론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시간의 일상적 외양에 국한되어 있고, 그러므로 자본-시간이 교환 가능한 시간의 단위(크로노미터적 시간으로 측정된 구체적 노동 시간)와 교환 가능성 그 자체의 질, 즉 다른 시간의 파편들의 통약가능성(추상적 노동 시간)을 모두 허용하는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역설적 사실에 직면하지 않는다. 이러한 통약가능성은 화폐라는 일반적 등가물과 그 삼중적인 기능―교환의 수단, 가치의 척도, 화폐로서의 화폐(자본)―에 의해 초월(론)적으로 보증된다. 이러한 세 가지 기능을 감안할 때, 자본-시간(“화폐로서의 화폐”-시간)은 화폐를 구체노동의 척도(단위 시간 당 임금)인 실제적인 교환의 수단으로서, 그리고 상이한 상품들 및 노동력의 측정가능성measurability의 조건으로서 상정한다. 구체노동의 크로노미터적 측면이 화폐(임금) 및 시간 단위(초, 시, 주)에 의해 양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데 반하여, 노동력 지출의 가치 측면, 즉 추상노동은 가치로서의 추상노동이 화폐 형태를 전제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화폐의 양에 의하여 소급적으로만 결정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시간의 고리loop를 도입한다. 결과적으로, 추상적 노동시간은 적절한 크로노미터적 형식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구체노동의 전체적인 시간 척도의 역사적 운동과 그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성의 수준을 표현한다. 만일 우리가 가치의 표현의 수준으로부터 자본으로 이동한다면, 추상적 노동시간의 시간적 특질―응결된, 곡선적curved, 가짜 반복적인pseudo-repetitive, 그리고 동시에 균질한, 선형적, 미래지향적인 것으로서―이 더욱 더 두드러진다.

자본-시간은 그것이 화폐를 그 초월적인 조건으로 요청하면서 동시에 그 자체의 결과로서 바로 이러한 조건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이거나 순환적이다. 화폐가 단순한 기호, 실제적 사물들로부터의 추상인 것 같아 보여도, 이러한 명목상의 ‘사물’은 물질적 형체를 갖는다. 화폐는 주화, 지폐, 그리고 다른 물질적 표상으로서 나타난다. 더욱이, 맑스가 간결하게 서술했듯이, 화폐는 비록 추상적인 개념일지라도 마치 그것이 실재적 실존을 갖는 것처럼 ‘행동한다.’ 『자본』의 1867년 원작에서 가치형태의 특질을 설명하면서, 맑스는 그가 후속판에서 빠뜨렸던 강력한 알레고리를 사용한다.

이것은 마치 동물 왕국의 여러 가지 유(類), 종(種), 아종(亞種), 과(科) 등을 형성하고 있는 사자, 호랑이, 토끼와 다른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들 외에 전체 동물 왕국의 개별적 성육신인 동물 그 자체도the animal 여전히 존재하는 것과 같다(MEGA, II.5: 37).22)

따라서 가치의 영역 내부에서 우리는 유명론nominalism과 실재론realism의 교착intertwinement, 즉 화폐가 가치를 위한 초월적인 개념(선험적인 일반적인 등가물)일 뿐만 아니라 생산 영역 내부에서 실제로 생산된 상품이기도 하다는 근본적인 역설에 봉착한다. 이러한 역설은 선형적, 크로노미터적(벤야민의 용어로, “균질한, 공허한”) 시간에 근거해선 해소될 수 없다.

헤겔주의적 맑스주의 학자들이 주장했듯이, 맑스의 자본 유통 개념은 헤겔의 자기 반성적 운동과 유사하다.23) 그리고 실제로, 자본에 대한 맑스의 논리 내부에서 화폐는 헤겔적인 개념Begriff(notion)으로 체계적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하게 헤겔주의적인 맑스 독해가 했던 것과 달리, 자본의 자기-전개self-deployment는 결코 그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비록 맑스가 자본을 “자동적인 주체”(Marx1990/2008: 255/234)라 불렀을지라도, 화폐로서의 화폐의 자기 반성적 과정은 헤겔의 개념Begriff의 자기-운동과 구조적으로 동일시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맑스의 자본을 그것의 자기-운동의 외화된 계기들에서 그 자체를 반성하는 동일한 주체-객체로서 독해한다면, 우리는 자본-시간의 한 가지 결정적인 특징을 놓친다. 헤겔의 개념Begriff과 대조적으로, 자본은 결코 그 순환circulation(유통)을 완수할 수 없고, 지젝이 주장했듯이 그 자신으로 복귀할 수 없다. “맑스의 주장은 이 움직임이 결코 그 자체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 신용을 회복하지 못하며, 해결책은 영원히 지연되고 위기가 최심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운동은 영원히 그 자체를 재생산하는 ‘악무한spurious infinity’의 하나가 된다.”(2006/2009: 51/108) 신용자금, 구조적 부채, 끝없는 상환 연기는 자본과 신용이 서로를 따라잡지도 심지어 그들의 관계를 해결하지도 못한 채 상호간에 서로를 전제하고 있는 악무한의 운동으로 이끌면서, 자본 순환의 완전한 주기를 곡선으로 만들고 변형시키는 매개변수이다.

거짓으로 무한한 연기postponement에 대한 지젝의 언급은 자본의 또 다른 낯선 특질을 가리키고 있다. 자본의 변증법은 (헤겔에서처럼) 역사적 시간에 빠져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자본의 변증법적 운동은 현재 시간의 악무한성으로서 미래를 향해 노출되고 연기되는 그 본래의 수축된 시간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궁극적으로, 자본의 시간은 선형적, “균질한, 공허한 시간”과 벤야민의 용어로 “시간의 미분소time differential”라 불릴 수 있는 단축된, 곡선적인 시간 둘 다를 설명한다.24)

자본-시간 대 지금시간

내가 주장했듯이, 자본-시간은 이중적이다. 자본-시간은 그 자체의 비선형적인 또는 역사적 시간을 생산하면서, 크로노미터적으로 측정된 균질한, 공허한 시간 속에서 진행한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감안할 때, 우리는 단순히 양적인 것으로서 자본-시간을 공산주의의 질적인 자유로운 시간에 대립시키는 것을 자제해야만 한다. “척도로서의 시간”이라는 아포리아와 관련하여, 자본의 자기-전개는 주, 일, 시의 표준으로 측정될 수 없는 추상노동의 통약가능한 시간 단위들의 끝없는 반복을 자동-시간적으로 한정한다. 따라서 자본-시간의 가치 차원은 논리적 시간―소급하고retroacting 선취하는anticipating 시간을 함축하므로, 그것의 역사적 동학은 선형적-연속체를 초과한다. 즉, 가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성의 수준에 의해 소급적으로 결정되는 동시에 미래의 축적의 원환들에 정향된 응결된 또는 “죽은” 구체적 노동시간에 의해 형성된다.

벤야민에 관한 논쟁적인 주석에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벤야민의 지금시간Jetztzeit(now-time)은 자본의 시간적 특질을 파악하기 위한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자본은 척도 및 체계로서 뿐만 아니라 진보progress로서도 자처한다. 이러한 규정은 대외적 정당화legitimization뿐만 아니라 그 내부적 정당화를 위해서도 본질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경제학은 전적으로 역사가―어떤 경우에서든―행정의 시간(즉, 행정으로서의 축적의 시간, 영원회귀의 가역적이고 순환적인 시간) 안에서 생산하는 혁신적 요소를 끌어내는 쪽으로 향해 있다. 지금시간Jetztzeit, 혁신적 시간 엄수, 유토피아: 자본은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 진보는 지금시간Jetztzeit의 섬광으로 환하게 밝혀진 영원회귀이다(2003: 108).25)

이러한 숨 막히게 매력적인 오독에 도전하기 전에, 네그리의 직관은 언뜻 보이는 것만큼 나쁘진 않다. 만일 자본-시간을 단순히 “영원회귀의 가역적이고 순환적인 시간”으로 환원한다면, 혁신과 진보를 상상할 수 없다. 혁신을 위한 체계의 요구는 정확히 벤야민이 “새로운 것의 영원한 재발”을 자본주의적 이름이 유행이라고 불렀던 것이다(Benjamin, GS I: 677). 만일 새로운 것에 대한 지향성―축적의 새로운 주기들―이 이데올로기적 본성일 뿐만 아니라 자본 자체의 운동에 고유하다면, 미래의 더 높은 수준의 생산성에 대한 전망은 언제나 이미 자본주의적 지금의 일부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네그리가 자본주의의 혁신적 요소를 행정의 시간, 즉 드보르의 용어로 가역적이고 순환적인 시간이 아니라 불가역적이고 가장된 순환적 시간 안에 위치시킨 것은 옳다. 자본 축적 내부의 혁신적 요소는 생산의, 가치증식의 외화된 주기들 및 화폐의 상품으로의 형태변환 없이 즉각적인 생산성의 영점시간zero-time이라는 자본주의적 유토피아를 암시한다. 하지만 네그리는 신학적으로 격앙된 메시아적 시간의 관념과 유토피아적 시간의 세속적 판본의 차이를 흐릴 뿐만 아니라 자본-시간의 시간적 특수성specificity를 과소평가하면서 자본의 유토피아의 시간을 벤야민의 지금시간Jetztzeit(now-time)과 융합한다. 왜냐하면 후자(자본-시간)는 “균질한, 공허한 시간”에 국한되지 않고, 구체적 노동시간, 즉 자본 자체의 “역사적 시간”(포스톤)의 수준으로는 나타날 수 없는 역사적 지표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고, 가치의 시간적 차원은 다른 시간의 개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벤야민의 카이로스적인kairological 지금시간Jetztzeit과 구조적으로는 다르지 않게, 자본의 역사적 시간은 역사적으로 상이한 생산성의 기본 수준들 간의 비선형적, 파열적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시간의 이중적 성격을 암묵적으로 폭로하는 네그리의 오독을 유발한 것이 바로 이러한 모호한 평행이다. 네그리에 반대하여, 우리는 자본-시간과 지금시간의 얇지만 결정적인 차이의 구별선을 고수해야 한다. 벤야민의 지금시간Jetztzeit이 과거의 특정한 파편과 공식적 역사기술의 “균질적, 공허한 시간”으로 환원 불가능한 정치적 행위의 지금 사이의 구속적 단락을 도입하는 데 반하여, 자본의 지금-시간은 추상적 시간에 의한 측정을 벗어날 수 없다. 나아가, 자본-시간은 구조적으로 그 소급적인 측정의 끝없는 반복을 필요로 한다. 비록 최종적인 측정은 끝없이 연기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형태의 악무한성에 반대하여, 벤야민은 자본-시간의 자동-시간적으로 한정하는 운동의 역사적 동학을 중지시키고, 방해하고, 탈선시키는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messianic arrest of happening”(Benjamin, SW 4/선집 5: 396/348)을 요청한다.

네그리에 대한 그의 독해에서, 체사레 카사리노는 벤야민에 대한 그의 “도착적perverse 독해”에 관해 네그리를 올바르게 비판했다(2008: 2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사리노 역시 지금시간Jetztzeit과 자본-시간에 대한 네그리의 병렬화에서 강력한 논점을 발견한다.

네그리가 지금시간Jetztzeit을 너무나 유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시간에 의해 구성된 내재성의 평면을 생산성으로 초월론적이게 만든다transcendentalize는 것이다. 지금의 시간은 영점시간, 즉 실재적 생산 시간의 부정이다. 벤야민이 직면한 문제는 충분히 실재적이었다. 부르주아 역사주의는 시간을 진보의 역사로 지양(止揚)했다. 하지만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발견했던 해결책은 역효과를 낳는다. 진보의 역사를 벗어나고자 시도하면서, 지금시간Jetztzeit은 시간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으로 치닫는다. 결국 벤야민의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는 자본 그 자체가―그 부르주아적 형태에서든 아니면 사회주의적 형태에서든―당장에 동경하고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생산성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이 정확히 밝혀졌다. 이제 우리는 만일 지금시간Jetztzeit이 그렇게 선취될 수 있다면, 그것이 생성의 생산적 흐름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그 생명 공급에서 분리되면, 그것을 척도로서의 추상적인 시간 단위로 환원하고 죽음의 시간에 대한 봉사에 그것을 넣기에 충분히 쉬워진다(2008: 229).26)

벤야민적 “지금”이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의 환원 불가능하게 우발적인 조우와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심지어 후기 벤야민에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인27)―의 혁명적 기회를 나타낸다면, 메시아적 시간의 관념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의 시간적 구조와 관련된다. 하지만 네그리 및 카사리노와 대조적으로, 벤야민의 지금시간Jetztzeit은 단지 ‘영점시간’이나 ‘시간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내재성의 평면을 초월론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젝이 주장하듯이, 메시아적 시간은 “역사의 ‘정상적’ 시간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시간이 아니라, 역사적 시간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내면적 고리이다.”(2003/2007: 134/217) 벤야민의 지금시간Jetztzeit이 정확히 “생성의 생산적 흐름에서 떨어져 나왔기”(Casarino 2008: 229) 때문에 지금시간Jetztzeit을 허용하는 이러한 시간 내부의 내면적 고리는 자본-시간에 의해 선취될 수 없다. 벤야민의 세속적인 “메시아적 시간의 모델”(SW 4/선집 5: 396/349)로서 지금시간Jetztzeit은 우리의 일상 세계의 ‘외부’로부터의 초월적인 침입으로 오해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그것은 내부로부터 자본-시간의 생산적 동학dynamics을 해산하고, 탈선시킨다. 다시 말해서, 지금시간Jetztzeit은 자본-시간의 내재성 내부의 초월적 차원―자본-시간의 궤도를 탈선시키는 내면적 고리―을 지시한다.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것으로서 혁명에 대한 벤야민의 유명한 은유에 의해 의도된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맑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SW 4/선집 5: 402/356). 이러한 브레이크를 가동시킬 시간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자본-시간 내부의 내면적 고리는 크로노미터적 시간에 의해서도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적 시간에 의해서도 표상될 수 없다. 그것은 순간-지점과 선형적인 연속체의 시공간적 사용역으로 정확히 밝혀질 수는 없다. 따라서 벤야민적인 “역사적 유물론자”의 과제는 자본-시간에 압축되어 있는 수축된, 응결된 시간을 자유롭게 하고 소급적으로 구속(救贖)하기 위한 시간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이러한 시간 내부의 내면적 고리를 포착하는 것이다. 만일 자본-시간이 축적된 크로노미터적인 균질한, 공허한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가치의 시간적 차원, 즉 공간화되고 문자 그대로 상품의 형태로 물화된 비선형적, 응결된 ‘추상적 인간 노동시간’을 표현한다면, 메시아적 시간에 대한 유물론적 독해는 자본 그 자체의 시간적 구조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다.28) 한편으로, 벤야민의 과거에 대한 메시아적-유물론적 구원은 가치의 사용역 내부의 소급적(그리고 언제나 지연된) 측정으로부터 엄밀하게 차별화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카이로스적으로 결절結節하는punctualizing(시점화하는) 지금시간Jetztzeit과 크로노스적으로chronologically(연대기적으로) ‘곡선을 이루는’ 자본-시간(즉, 그 자체의 역사적 시간을 시간적으로 한정하면서 크로노미터적 시간에 ‘던져진’ 추상적 노동시간)은 이질적인 영역에 속하는 비변증법적 대립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아감벤이 지적했듯이,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의 고전 그리스적 구별은 필연적으로 두 개의 철저하게 다른 시간의 질서 사이의 범주적 분할을 수반하진 않는다. 비록 카이로스에 대한 그리스적 이해가 유대교의 메시아적 관념 및 초기 바울적 그리스도교와 연결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메시아적 시간의 특수한 시간의 구조는 연속-파열, 선형적-곡선적, 공허한-충만한, 추상적-구체적 등과 같은 이분법적 속성의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질적으로 서로 상이한 것으로 대치되”는 것이라는 평범한 이해에 반대하여, 아감벤은 카이로스―사이의 시간을 지시하는 ‘옳은’ 또는 ‘시의적절한’ 순간, 비범한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시간의 결정되지 않은 기간의 순간―가 크로노스적 시간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2005/2008: 68/117). 나아가, 메시아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순간인 카이로스는 “파악된 크로노스 이외의 것은 아니다.”(2005/2008: 69/118). 그러므로, 카이로스적 시간, “사건Event”의 시간은 단순히 크로노스적 또는 “상스러운 시간vulgar time”(하이데거)에 대립되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메시아적 시간은 수축된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enacted” 크로노스적 시간이다. 크로노스적 시간의 메시아적 장악은 자본-시간에서 “생성의 생산적 흐름”을 빼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산적 시간으로 전혀 번역될 수 없는, 활동력을 없앤dosdeactivating 또는 작동하지 않게 만든inoperative ‘작업operation’을 지시한다. 정확히 이러한 환원 불가능한 차이가 자본의 도착적인 지금-시간now-time으로부터 벤야민의 지금시간Jetztzeit을 구별해주는 것이다. 메시아적 시간은 자본-시간에서 인간 노동을 빼내기 위한―자본-시간을 비활성화하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끝내기 위한―시간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자본 시간 내부에/의 내면적 고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급 없는 사회의 관점에서 자본-시간의 이러한 (무)활동적인(in)operative 종결은 “역사에서의 진보가 다다르는 최종 목표가 아니라 그 진보의 중단, 자주 실패했지만 끝내 이루어진 중단이다.”(Benjamin, SW 4/선집 5: 40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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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mi Khatib, “The Time of Capital and the Messianicity of Time. Marx with Benjamin,” published in the journal “Studies in Social and Political Thought,” Volume 20 - Winter 2012, pp. 46-69. ** Sami R. Khatib is a lecturer in Media and Cultural Theory at Freie Universität Berlin. In 2012, he handed in his doctoral dissertation on “‘Teleology Without End’. Walter Benjamin’s Dislocation of the Messianic.” He is currently working on a research project on ‘messianic nihilism’ and the Freudian notion of death-drive.

1) This article is an ongoing work based on four papers presented at the “German Studies Association Annual Meeting” 2009, Washington D.C., the “Historical Materialism” conference 2009, London (UK), the “Spirit of Capital” conference 2011, New York City, and the “SSPT conference” 2011, Sussex (UK). I would like to thank Kieran Aarons, Cinzia Arruzza, Ali Alizadeh, Jacob Blumenfeld, Frank Engster, Andrew McGettigan, Alison Hugill, Blair Ogden, Moishe Postone, John Toews, Massimiliano Tomba, Alberto Toscano, and Chris Wright for their comments and critical remarks to earlier versions of this article.

2) Cf. Marx/Engels: “In der bisherigen Geschichte ist es allerdings ebensosehr eine empirische Tatsache, daß die einzelnen Individuen mit der Ausdehnung der Tätigkeit zur Weltgeschichtlichen immer mehr unter einer ihnen fremden Macht geknechtet worden sind (welchen Druck sie sich denn auch als Schikane des sogenannten Weltgeistes etc. vorstellten), einer Macht, die immer massenhafter geworden ist und sich in letzter Instanz als Weltmarkt ausweist.”(Marx/Engels, MEW 3: 37.) “In history up to the present it is certainly an empirical fact that separate individuals have, with the broadening of their activity into world-historical activity, become more and more enslaved under a power alien to them (a pressure which they have conceived of as a dirty trick on the part of the so-called universal spirit, etc.), a power which has become more and more enormous and, in the last instance, turns out tobe the world market.” The English translation of Marx’s and Engels’s German Ideology is taken from the online source , transcription: Tim Delaney, Bob Schwartz.

3) In the Grundrisse, Marx highlights this methodological problem when he discusses at the teleological effect of linear historiography: “Die sogenannte historische Entwicklung beruht überhaupt darauf, daß die letzte Form die vergangnen als Stufen zu sich selbst betrachtet und, da sie selten und nur unter ganz bestimmten Bedingungen fähig ist, sich selbst zu kritisieren [...] sie immer einseitig auffaßt“ (MEGA II.1: 40f.). “The so-called historical presentation of development is founded, as a rule, on the fact that the latest form regards the previous ones as steps leading up to itself, and, since it is only rarely and only under quite specific conditions able to criticize itself[...] it always conceives them one-sidedly.” If not otherwise indicated,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e Grundrisse is taken from the Penguin edition, transl. Martin Nicolaus, London 1973.

4) Translation mine. Cf. Marx: “Aber das Kapital ist kein Ding, sondern ein bestimmtes, gesellschaftliches, einer bestimmten historischen Gesellschaftsformation angehöriges Produktionsverhältnis, das sich an einem Ding darstellt und diesem Ding einen spezifischen gesellschaftlichen Charakter gibt” (MEW 25: 822).

5) Translation mine.

6) Cf. Žižek: “역사 유물론을 규정하는 것은 (사태를 그것의 전체적인 상호연관성과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포착해야 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독사doxa와는 대조적으로) 역사의 전체성에서 세부를 분리해냄으로써 역사의 운동을 정지시키고arrest 부동화시키는immobilize 능력이다. 바로 이처럼 모나드 속에서 역사의 운동을 ‘응결시키고’ 결정화하는 것을 통해 과거를 전유하는 순간이 예고되는 것이다. 모나드는 (진화의 연속성을 위반하면서) 과거와 직접적으로 결부되는 현재의 순간이다. 예를 들자면 그것은 자신을 실패한 과거 상황들의 반복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과업 완수를 통해 그것들을 소급적으로 ‘구원했다’고 생각하는 현 시대적인 혁명의 상황인 것이다.”(1989/2008/2001/2013: 139/155/240/225).

7) Cf. Benjamin’s note in the Arcades Project, Konvolute N 8,1: “역사의 미완결성이라는 문제에 관한 1937년 5월 16일자 호르크하이머의 편지: ‘역사가 완결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그러한 미완결성 속에 완결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한 관념론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과거의 부정不正은 이미 저질러졌으며, 완결된 것입니다. 희생자들은 실제로 살해당한 것입니다. […] 역사의 미완결성을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최후의 심판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 어쩌면 이 미완결성과 관련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사이에 차이가 있으므로 과거의 부정不正이나 공포, 고통만이 회복 불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행해진 정의, 환희, 일은 시간과 이와 다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진 긍정적 성격은 그러한 것들의 덧없음으로 인해 대부분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 개인의 존재에 적용됩니다. 개인의 존재에 있어 죽음에 의해 봉인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벤야민의 답변적 성찰:) 이러한 사유 경로에 대한 교정책은 역사는 단순히 하나의 과학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회억Eingedenken(回憶, remembrance)의 한 형식이기도 하다는 고찰에서 찾을 수 있다. 과학이 ‘규정’한 것을 이러한 회억은 수정할 수 있다. 회억은 미완결된 것(행복)을 완결된 것으로, 완결된 것(고통)을 미완결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신학이다. 그러나 회억에 있어 우리는 역사를 철저하게 비신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역사를 직접 신학적 개념으로 기술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1999/2005 I-2: 471/1073)

8) Cf. Marx: “Die Zeit ist alles, der Mensch ist nichts mehr, er ist höchstens noch die Verkörperung der Zeit. Es handelt sich nicht mehr um die Qualität. Die Quantität allein entscheidet alles: Stunde gegen Stunde, Tag gegen Tag [...]” (MEW 4: 86). The English translation of Marx’s The Poverty of Philosophy is taken from the online source , translated from the French by the Institute of Marxism Leninism, 1955.

9) Cf. Marx: “In fact aber, wenn die bornirte bürgerliche Form abgestreift wird, was ist der Reichthum anders, als die im universellen Austausch erzeugte Universalität der Bedürfnisse, Fähigkeiten, Genüsse, Productivkräfte etc der Individuen? Die volle Entwicklung der menschlichen Herrschaft über die Naturkräfte, die der s. g. Natur sowohl, wie seiner eignen Natur? Das absolute Herausarbeiten seiner schöpferischen Anlagen, ohne andre Voraussetzungals die vorhergegangne historische Entwicklung, die diese Totalität der Entwicklung, d. h. der Entwicklung aller menschlichen Kräfte als solcher, nicht gemessen an einem vorhergegebnen Maaßstab, zum Selbstzweck macht?” (Marx, MEGA II.1: 392).

10) Cf. Marx: “Oekonomie der Zeit, darin löst sich schließlich alle Oekonomie auf” (MEGA II.1: 103f.).

11) Osborne suggests a binary structure of ‘good’ and ‘bad’ time within Marx’s philosophy of time based on the socio-political antitheses of wage labour versus free activity, alienation versus appropriation, and value versus wealth (2008: 17).

12) Cf. Marx: “Wie nun die Größe seines Werts messen? Durch das Quantum der in ihm enthaltenen ‘wertbildenden Substanz’, der Arbeit. Die Quantität der Arbeit selbst mißt sich an ihrer Zeitdauer, und die Arbeitszeit besitzt wieder ihren Maßstab an bestimmten Zeitteilen, wie Stunde, Tag usw” (MEW 23: 53).

13) English translation is taken from the edition Complete Works of Aristotle (1991) ed. Jonathan Barn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4) By “material” I mean a material or immaterial commodity resulting from the expenditure of labour. The commodity-form of these results is not depending on their materiality or persistence in time. That is to say, a commodity which is not resulting in a stable object but is immediately consumed during the expenditure of labour (e.g. service industries) can nevertheless be a commodity in the strict sense of being one form of existence of capital. At this stage, I do not follow Marx’s distinction between “productive and non-productive labour” as stated in Resultate des unmittelbaren Produktionsprozesses (MEGA II.4.1: 108ff.; resp. pp. 115-116).

15) In post-structuralist terms, one could call the register of the value a sensuous-supra-sensuous sphere introducing a third register “between” the register of the “real” (the site of ontology of capital as a social relation) and the register of the “imaginary” (the site of the critique of ideology). The “symbolic” register of the value could then be conceived of as “commodity language” (Marx, MEW 23: 66).

16) Translation modified; cf. Marx: “Im graden Gegenteil zur sinnlich groben Gegenständlichkeit der Warenkörper geht kein Atom Naturstoff in ihre Wertgegenständlichkeit ein. Man mag daher eine einzelne Ware drehen und wenden, wie man will, sie bleibt unfaßbar als Wertding. Erinnern wir uns jedoch, daß die Waren nur Wertgegenständlichkeit besitzen, sofern sie Ausdrücke derselben gesellschaftlichen Einheit, menschlicher Arbeit, sind, daß ihreWertgegenständlichkeit also rein gesellschaftlich ist, so versteht sich auch von selbst, daß sie nur im gesellschaftlichen Verhältnis von Ware zu Ware erscheinen kann” (MEW 23: 62).

17) “가치의 실체로서 추상노동이 이러한 사회적 관계이다”라는 것을 확실히 해둬야 한다. 이러한 관계 외에는 어떤 다른 물질적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18) Cf. Postone: “『자본』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동학을 궁극적으로 상품, 따라서 자본의 이중적 성격에 정초시킨다. 내가 윤곽을 그렸던 트레드밀 동학은 이러한 동학의 중심에 있다. 만일 잉여가치의 범주가 잉여가치―부의 시간적 형태의 잉여로서―로서 함께 이해되지 않고, 단지 착취의 범주―잉여가치―로서만 이해된다면, 그것은 파악될 수 없다. 이러한 동학의 시간성은 단순히 추상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비록 사용가치 차원에서 생산성 변동이 단위 시간 당 생산된 가치의 총량을 변화시키진 않을지라도, 그것들은 무엇이 주어진 시간의 단위로서 간주될지에 대한 규정을 변화시킨다. (추상적) 시간의 단위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를테면, (역사적) 시간 안에서 진행된다. 여기서 운동은 (추상적) 시간 안에서 운동이 아니라, 시간의 운동이다. 추상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 둘 다 지배의 구조로서 역사적으로 구성된다.” (2009: 42).

19) Cf. Lyotard, 1973; Assoun, 1999; Löschenkohl, 2008.

20) Debord differentiates between the “cyclical time” of ancient and feudal societies and the “pseudo-cyclical time” of capitalism (1994: 92-117).

21) Although today’s stock market transactions are highly automatized by means of computer-to-computer communication, a minimal temporal delay between buying and selling yet remains. Latest up-to-date communication technology seeks to limit these delays toward the absolute speed of today’s light-wave cable technology: the speed of light. Nevertheless, the separate transactions of selling and buying, be it M-M, C-M, or M-C, can never be identical by definition. Without this necessary circulation (and its temporal delay―as minimal as it may be) the commodity-form cannot be maintained.

22) Cf. Marx: “Es ist als ob neben und außer Löwen, Tigern, Hasen und allen andern wirklichen Thieren, die gruppirt die verschiednen Geschlechter, Arten, Unterarten, Familien u. s. w. des Thierreichs bilden, auch noch das Thier existirte, die individuelle Incarnation des ganzen Thierreichs“ (MEGA II.5: 37). Translation mine. [Cf. Heinrich: “It is as if, in addition to lions, tigers, hares and all other really existing animals which together constitute the various families, species, subspecies, etc. of the animal kingdom, the animal would also exist, the individual incarnation of the entire animal kingdom.”]

23) Cf. Reichelt, 1970.

24) Benjamin’s idea of the “dialectical image” and its “time differential” could provide a model of how to conceive of the inner structure of capital-time and its dialectics. In his first sketches of the Arcades Project Benjamin notes: “변증법적 이미지에 관해. 그것 속에는 시간이 들어 있다. 헤겔에게서 이미 시간은 변증법 속에 들어오고 있다. 하지만 이 헤겔식 변증법은 시간을 오직 사유의 심리적 시간이 아니라 고유하게 역사적인 시간으로만 바라본다. 시간의 미분소time differential(Zeitdifferential)―오직 여기 안에서만 변증법적 이미지는 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그에게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 실제 시간은 자연적 그키가 아니라―두말할 필요도 없이 심리적으로도―가장 작은 형상gestalt으로 변증법적 이미지 속에 들어간다.”(Benjamin 1999/2006 Ⅱ: 867/1935). 벤야민과 더불어 맑스를 읽는다면, 자본의 자기-운동은 우리가 앞서 “추상적 노동시간”이라고 불렀던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단축된 시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변증법적 이미지”로서 이해될 수 있다.

25) Translation modified.

26) Translation of Casarino’s Benjamin quote modified.

27) Cf. the paralipomena to Benjamin’s On the Concept of History: “계급 없는 사회의 개념에게 그것의 진정한 메시아적 얼굴이 다시 부여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프롤레타리아 계급 자신의 혁명적 정치의 관심 속에서 부여되지 않으면 안 된다.” (SW 4/선집 5: 403/356).

28) In a stunning article on the messianism of commodity language, Werner Hamacher elaborated this parallel further. In short, it is capitalism and its “commodity language” (Marx, MEW 23: 66) itself that produces an immanently messianic promise ―a promise that is already at work on the categorical level of the quidproquo of the form of value. “The commodity cloth not only speaks, it promises (itself) something else, and it is its promise of something else: as a phenomenon it is, like every phenomenon and every possible and real world, spectrally and henceforth messianically constituted” (Hamacher 1999: 170). Marx’s famous idea of a “Reich der Freiheit” (MEW 25: 828), arealm of freedom is thus derived from commodity’s own promise to finally overcome labour and to turn human existence into an immediately productive activity. As Hamacher comments on Marx’s promise of a realm of freedom beyond the realm of necessity: “But doesn’t this promise necessarily remain the promise of capital, of self-capitalizing and abstract labor, the promise that labor itself is capital, a selfproducing and self-reproducing substance?” (1990: 179). Without answering this question, one can also turn Hamacher’s argument upside down and ask whether the messianic structure of commodity language is precisely the reason why a messianic ‘derailing’ of capital-time has to find its grounds within the temporal structure of capital itself.

from http://chyt.tistory.com/17 by cc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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