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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천만 명 이상이 숨진 20세기의 비극,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올해가 백 주년이 됩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메이 영국 총리가 프랑스 솜 지방 티에프발을 찾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백 주년을 맞아 영국군 희생비가 세워진 이곳을 찾아 양국 정상은 함께 헌화했습니다.

1916년 솜 전투에서 영·불 연합군은 독일군을 저지하려고 4개월간 치열한 참호전을 벌였고, 이 전투로 무려 100만 명 이상이 전사하는 전쟁 역사상 최악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솜전투는 1916년, 서부전선에서 펼쳐진 대규모 전투 중 하나로써 제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철조망과 기관총 그리고 참호전으로 인해 군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가운데 가장 잔인한 학살극을 벌인 전투입니다. 작전 개시 당일에만 인명 손실이 영국 육군에서만 5만 8천명으로 대략 3~5개 보병 사단이 하루 만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솜전투는 최초의 전차투입, 이동 포격 탄막 전술의 전개 등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8일 간의 준비포격에 이어 7월 1일 영국 육군의 돌격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대량 포격에도 독일 육군의 중심방어망은 상당부분 남아있었습니다. 포병이 다 때려 부쉈으니 소총 들고 유유히 걸어가 깃발만 꽂으면 된다고 교육받았던 영국군의 보병들은 개전 첫날부터 독일군에게 대량으로 학살을 당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단 하루만에 5만 8천명의 인명이 사라졌는데, 심한 곳에서는 기관총반 1~2분대에게 대대급 병력이 쓸려버린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공격준비 포격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에는 여러 주장이 있는데, 영국 육군 포탄의 품질 불량으로 불발탄이 많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고 무른 솜 지방의 토질을 들기도 합니다. 아직도 경작지 개간 중에 불발탄이 심심찮게 나온다고하니 아주 근거없는 말은 아닌듯합니다.

또한 독일 육군의 참호 깊이가 수 미터에 달했던 점, 독일군이 포격시 기관총을 해체시켜 안전한 곳으로 신속하게 옮기는 훈련을 해뒀던 점도 한몫 한것으로 전해집니다. 여기에 워낙에 많은 수의 야포를 일단 동원하다 보니 발생한 사거리 격차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프랑스 육군이 동원한 포는 사실상 목표거리를 달성했지만, 소구경까지 끌고 온 영국 육군의 포격은 허울만 좋았지 사실상 전장에 닿지도 못하고 중간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영국 육군이 쓴 포탄의 대부분은 참호나 철조망 등의 시설물의 파괴를 기대할 수 없는 인마살상용 유산탄(shrapnel)이었지 참호 등의 구조물들을 부술 수 있는 고폭탄(High Explosive-HE)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포격한 곳은 진격했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위에 언급한 예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터무니없는 공격은 5개월 이상 지속됐습니다. 전투를 시작한 이유였던 (베르됭 등)다른 곳의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공격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뒤부터는 마찬가지로 참호전의 연속. 전형적인 참호전 공격이 지속됐고 인명피해는 첫날만큼은 아니라도 꾸준히 발생했습니다.

다만 공격이 반복되면서 영국 육군의 공격 능력은 조금씩 성장해갔다. 대표적으로 최초의 전차인 Mark I이 공세 후반기인 9월 15일 전선 돌파를 위해 나왔습니다. 다만 전투에서만 쓸 만했지, 전술적이나 전략적인 돌파를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직 전차를 쓰기엔 기술적으로도, 작전적으로도 조건이 성숙하지 못한 때였습니다. 사용 그 즉시는 독일 육군에게 큰 정신적 타격을 입혔지만 전차 자체의 성능 문제로 다수가 고장 났고, 독일 육군도 곧 익숙해져서 대처 방법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기술적 한계로 장갑이 얇아서 총알이나 막아내지 포에는 간단히 뚫렸다.) 실질적으로 전차가 의미를 가지게 된 건 이후에 제병협동 전술이 확립된 이후였습니다.

당시 영국 육군은 Pals(팔스, 지역연대)라고 해서 한 부대에 같은 지역/구역의 사람들을 몰아서 배치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게 솜 전투에서 최악의 결과를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지역의 젋은 남자들이 떼거지로 몰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죠.

이런 팔스에 소속되어 참전한 어떤 젊은이는 전쟁이 끝나고 동네에 돌아와 보니 동네에 자기 또래의 남자가 모두 죽어 자기만 남는 암울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몇년 간 죽도록 싸워서 겨우 살아남아서 고향에 돌아갔더니, 어린시절 부터 알던 수백명이나 되던 동네 친구들, 형, 동생, 심한 경우 삼촌, 아저씨들까지 말 그대로 죽거나 상이군인이 되었고, 멀쩡한 사람은 많지 않은 상황이며, 반겨주는건 가족 뿐이고 주변사람들은 자식이나 형제, 남편 잃은 분노에 생존자들을 겁쟁이라서 살아남았다고 매도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은 민간인들도 도시 폭격등으로 직접적으로 전쟁에 노출된 제2차 세계대전이 되어서야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더 심한 비극은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 몇백단위로 계속 죽어나가는 걸 바로 옆에서 계속 지켜봤다는 것입니다. 멀쩡히 살아 견뎌낸 사람이 비정상인 지경이 됐습니다.

자료출처 - 연합뉴스 / YTN / 나무위키 / 구글이미지

from http://shin-hwa-making-1.tistory.com/52 by cc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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