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0월8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1984년 삼성반도체 256KD램 개발

▶ 1983년 중공, 신학대 개설

▶ 1983년 창경원 동물가족,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 시작

▶ 1983년 전두환 대통령 서남아, 대양주 6개국 순방 등정

▶ 1982년 폴란드 자유노조 해체

▶ 1980년 서울지검, 처음으로 순회법률상담제 실시

▶ 1978년 미국, 크루즈미사일 실험성공 발표

▶ 1977년 예비군, `쌍용 작전` 개시

▶ 1975년 살인마 김대두 검거

▶ 1975년 김옥선 의원 파동

▶ 1973년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사망

▶ 1970년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 사망

▶ 1968년 법관추천회의, 새 대법원장에 민복기 선출(21일 정식임명)

▶ 1967년 영국 정치가 애틀리 사망

▶ 1967년 체 게바라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중 총상 입고 체포

▶ 1963년 유엔총회, 월남의 불교도박해 조사단파견 결의

▶ 1962년 이승만대통령, 미군의 철수연기를 요구

▶ 1959년 정부, 대일통상해제 원칙을 결정

▶ 1955년 국회, 한국통일방안 결의

▶ 1952년 한국휴전회담서 유엔측 무기한 휴전통고

▶ 1951년 한국-미국 재정협정 조인

▶ 1951년 역사학자 김성칠 작고

▶ 1951년 휴전회담장소 판문점으로 결정

▶ 1943년 총독부, 생산증강 노무강화요강 발표

▶ 1942년 인도서 반영국소요. 3천명 사상

▶ 1929년 제1회 경.평축구전

▶ 1928년 장개석,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

▶ 1910년 중추원 부의장에 김윤식, 고문에 이완용 등 14명 임명

▶ 1908년 구세군 한국본영 창설

▶ 1895년 명성황후, 일본에 의해 시해 (을미사변)

▶ 1895년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출생

▶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 1735년 중국 청조 13대 황제 옹정제 사망

[ 사진2. 1988년 서울올림픽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사건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1988년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였습니다. 우리나라는 큰 축제 속에서 기쁨과 환호성을 질렀었죠. 이런 축제 분위기가 가시기도 전인 1988년 10월8일 영등포 구치소에서 공주 교도소로 이송되던 25명의 죄수 중 12명의 죄수가 탈출을 하는 사건이 발생이 됩니다. 일명 지강헌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최악의 인질극 사건입니다. 무려 14시간 동안 벌어졌던 인질극은 '인질극 생중계' 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지강헌은 왜? 그렇게까지 위험한 인질극까지 벌인 걸까요??

지금부터 그때의 사건 현장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 사진3.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거리로 나선 지강헌에게 배운 것이라고는 도둑질밖에 없었다. 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다 경찰에 붙잡혀 처벌을 받고 나면 어떻게든 바르게 살아보려 했지만 기술도, 자격도 없다 보니 변변한 직업 한번 가져본 적이 없고, 바른 길로 이끌어줄 어른도 주위에 없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시인’이 되고 싶었던 지강헌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시간이 있을 때마다 책을 읽었고, 시상이 떠오를 때면 습작을 해보기도 했다.

그런 지강헌의 운명을 바꾼 것은 1980년에 제정된 ‘사회보호법’이었다. 상습 범죄자 등 ‘불순한’ 사회악으로부터 선량한 국민과 사회를 보호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법은 ‘유사한 죄로 2회 이상 실형을 받고 그 형기의 합계가 3년 이상인 자가 다시 유사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등 상습성이 인정될 때 장기간 보호 감호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는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시절이었고, 지강헌 역시 삼청교육대와 사회보호법 등 범죄자와 불량배들을 겨냥한 철퇴에 대해서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그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1988년 7월18일 새마을운동본부 비리 사건으로 구속된 전경환씨. ⓒ 연합뉴스

그런데 1988년, 온 나라가 올림픽 개최의 감격과 흥분에 휩싸여 있던 그때, 남의 집에 들어가 5백56만원을 절취한 뒤 도주하다 붙잡힌 지강헌에게 내려진 형량은 징역 7년에 보호 감호 10년, 도합 17년이었다. 17년이라니! 지강헌은 눈앞이 캄캄하고 앞길이 막막했다. 당시에는 지강헌처럼 ‘사회보호법의 날벼락’을 맞는 재범자가 많았다.

지강헌 등 당시 사회보호법의 적용을 받은 범죄자들의 절망감을 더욱 증폭시킨 것은 같은 시기, 1988년에 터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부패 사건’이었다. 형이 대통령이던 시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전경환의 뇌물 수수와 각종 인사 개입, 횡령 등 범죄 행각에 대한 풍문과 폭로, 비판이 거세게 일던 끝에 전두환의 후임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한 뒤 새 정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그를 사법 처리한 것이다.

전경환은 공식적으로 그가 총재로 있던 새마을운동협회의 공금 73억6천만원을 횡령하고, 새마을신문사의 수익금에 대한 10억원의 탈세 그리고 4억1천7백만원을 수수하고 저지른 불법 이권 개입 등 일곱 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항간에는 전경환의 횡령 액수가 6백억원에 육박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런데 천문학적인 액수의 횡령과 탈세, 뇌물 수수 등의 중대 범죄를 저지른 전경환에게 내려진 형량은 징역 7년에 벌금 22억원과 추징금 9억원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곧 감형과 사면이 이루어지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전경환은 수감된 지 3년 만인 1991년 6월 가석방되었고, 이듬해 1월 대통령 특사로 사면 복권되었다. 이 사건은 철권 독재 통치로 국민의 숨통을 조이던 전두환 군사 정권이 권력을 이용해 자신과 측근, 가족들의 탐욕을 채우느라 국고를 축냈다는 세간의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는 신호탄이었다. 또한,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권력이나 돈이 있으면 쉽게 풀려난다는 속설이 입증되면서 국민적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다.

[ 사진4. 탈옥수 지강헌 사건 지금은 철거 된 역사속의 영등포교도소 ]

1988년 10월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 25명을 태운 법무부 호송 차량은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의례적인 재소자 이감이었다. 호송을 담당한 교도관들은 언제나처럼 이감 대상 재소자들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수갑을 채운 뒤 무기 소지 여부 확인 등 검색을 실시한 후 한 명씩 차례로 호송 차량에 탑승시키고 잠금 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확인했다.

[ 사진5.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

하지만 교도관들이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평소 재소자 이감 때와는 다른 점이 둘 있었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인 재소자들 사이에 전경환 부패 사건과 그에 대한 가벼운 형량이 공통의 화제로 대두되면서 그보다 훨씬 가벼운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처벌은 훨씬 더 무겁게 받았다며 억울해하는 이들 사이의 교감과 연대 의식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 사진6.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

또한, 형량에 덧붙여진 기나긴 보호 감호 기간을 버텨낼 자신이 없어 모든 것을 걸고 필사의 탈주를 준비해온 재소자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강헌 등 탈주를 준비하던 이들은 교도소 식당이나 작업장 등에서 주은 쇠붙이 등을 오랜 시간 갈고 손질해 머리카락 안에 감출 수 있을 정도로 가는 특수 도구를 만들어 감방 안에 보관 중이던 간장통과 콜라 병 안에 감춰두고 있었고, 공주교도소로 이감되는 기회를 노렸다.

[ 사진7.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

순조롭게 도로를 달리던 호송 차량에서 갑작스런 소동이 일어났다. 호송 교도관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지강헌 등 일부 죄수들이 몰래 숨겨둔 도구를 이용해 수갑을 풀고 다른 죄수들의 수갑도 풀어준 뒤 서로 눈빛을 맞춰 교도관을 공격하고 집단 탈주를 감행한 것이었다.

[ 사진8.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생방송 취재 기자 ]

결박이 풀린 죄수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호송 차량은 멈출 수밖에 없었고, 이중 삼중으로 잠긴 출입문마저 열렸다. 자유와 감금의 갈림길, 25명 중 12명은 ‘위태롭고 불안한 자유’를 향해 탈주를 감행했지만 나머지 13명은 ‘안정되고 안전한 감금’을 택했다.

지강헌이 인질극을 벌이다 경찰의 총격을 받고 긴급 호송되고 있다. ⓒ 연합뉴스

호송 차량에서 탈주한 12명 중 7명은 추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거나 고향집을 찾던 중에 붙잡히거나 자수를 하면서 길지 않은 자유에 종지부를 찍었다. 조기에 체포되지 않은 다섯 명 중 지강헌 등 네 명은 교도관에게서 탈취한 권총을 들고 서울 시내 가정집 여러 곳을 돌며 절도와 강도를 일삼다가 탈주 일주일 만인 10월15일 밤 9시40분쯤에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에 있는 고 아무개씨 집에 침입해 고씨 가족을 인질로 잡게 된다.

지강헌 일당의 집단 강도 및 인질극에 동참하지 않은 김길호는 홀로 도주해 숨어지내다 탈주한 지 1년 9개월 만인 1990년 7월1일 경찰에 검거되었다.

인질극을 벌인 4인조는 가장 나이가 많은 지강헌(35세)을 중심으로 20대 청년인 안광술(22세), 강영일(21세), 한의철(20세)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방송과 신문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잘 알려져 있던 ‘흉악 탈주범’들이 침입해 공포에 사로잡혔던 고씨 가족은 침착하게 순응하며 긴장을 완화시켰다.

그 덕에 탈주 인질범들도 마음의 안정을 찾아 마치 친구나 친척 집에 온 듯 편안하게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밀린 잠을 자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 이들의 태도가 바뀔지 모르고 궁지에 몰린 탈주범들이 가족을 해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 아버지 고씨가 다음 날인 16일 새벽 4시, 자신을 감시하던 인질범이 잠에 빠져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집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뒤 인근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했다.

이미 최고도의 비상경계령하에 대기 중이던 경찰 1천여 명이 곧바로 출동해 북가좌동 주택가 좁은 골목을 완전히 에워쌌다. 아버지 고씨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인질범들에게도 비상이 걸렸다. 새벽 4시40분, 아버지를 제외한 고씨 가족 전체를 인질로 잡은 집 안의 지강헌 일당과 집을 완전히 에워싼 1천여 명의 집 밖 경찰들 사이에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 시작되었다.

[ 사진9.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강영일 어머니 ]

1988년 당시만 해도 한국 경찰에는 ‘인질 협상’ 전문가도 없었고 매뉴얼도 없었다. 경험 많은 베테랑 형사와 계급 높은 고위 경찰 간부가 오직 상식과 감정에 의존해 지강헌 일당의 투항을 종용하고 설득하거나 호소하는 ‘일방적 협상 시도’와 지강헌 일당의 저항과 반발, 돌발 행동이 이어지는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 사진10.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강영일 ]

이후 지강헌 일당은 마치 테러리스트처럼 자신들의 주장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해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고, 경찰은 그 요구를 수용했다. 몰려든 방송사의 카메라와 마이크는 사상 초유의 ‘인질극 생중계’를 하게 되었고 갑자기 ‘거물’ 취급을 받게 된 인질범들은 공명심과 과시욕이 고조된 가운데 탈주극을 벌이게 된 원인인 억울함과 절망감이 뒤섞이면서 정제되지 않은 말을 마구 쏟아냈다.

[ 사진11.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안광술 ]

비극의 광시곡이 된 비지스의 <홀리데이>

그 가운데 지강헌이 자신의 삶에 대해 늘어놓은 독백, 특히 ‘시인’을 꿈꿨다는 이야기 등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강영일이 동생에게 전해달라며 쓴 편지에 언급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어구가 이 사건 전체를 대표하는 표현이 되면서 유행어가 된다.

[ 사진12.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생방송 취재 기자 ]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오늘날까지,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은 죄를 저질러도 벌을 받지 않고 힘없고 돈 없는 사람은 작은 실수와 잘못에도 벌받고 전과자가 되는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우리 사법 제도를 풍자하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 사진13.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

10월16일 정오(12시)쯤이 되었을 때 지강헌은 일행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강영일에게 ‘밖에 나가서 경찰이 약속한 도주용 승합차가 준비되었는지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다. 밖에 나온 강영일이 승합차가 준비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지강헌은 땅바닥을 향해 총을 쏘며 강영일에게 자수를 권유했다.

[ 사진14.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지강헌이 강영일에게 자수를 권함 ]

끝까지 함께하겠다며 자수하기를 거부하던 강영일은 결국 지강헌의 뜻을 받아들여 자수하게 되고, 네 명의 일당 중 유일하게 살아남는 사람이 된다. 그 사이 안광술과 한의철은 지강헌에게서 총을 가져간 뒤 차례로 자살했다.

인질극을 벌이는 동안 인질인 고씨 가족을 해치지 않았던 지강헌 일당을 신뢰하고 이들에게 연민을 느꼈던 고씨의 딸은 비극을 막기 위해 경찰의 강제 진압을 만류하며 시간을 끌고 인질범들을 달래고 설득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비극을 막지는 못했다.

[ 사진15.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강영일 자수 ]

두 공범이 자살한 뒤 자포자기 심정이 된 지강헌은 경찰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국 팝그룹 비지스의 노래 <홀리데이>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이 전달해준 <홀리데이> 노래를 크게 틀고 독백을 하던 지강헌은 깨진 유리창 조각을 들고 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고, 그 순간 경찰특공대가 전격적으로 진입해 총으로 지강헌의 다리를 쏴 자살을 저지했다.

[ 사진16.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한의철 ]

하지만 무릎을 관통한 총알이 복부마저 관통해 지강헌은 과다 출혈에 이은 쇼크에 빠지게 된다. 대기 중이던 응급 구조 차량으로 인근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지강헌은 결국 과다 출혈로 숨지게 된다.

[ 사진17. 탈옥수 지강헌 인질극 사건 ]

당시 해당 병원 흉부외과 의사였던 한 블로거는, 응급 수술을 실시했다면 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일반외과와 흉부외과 교수 사이에 책임을 미루며 수술을 하지 않는 바람에 지강헌이 사망했다는 고백의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하기도 했다. 2006년에 한 영화사에서 지강헌 사건을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 제목을 <홀리데이>로 정하기도 했다.

from http://blue-lemonade.tistory.com/135 by ccl(A)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