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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엠팍 유랑기 (겁나 깁니다)

난 메이저리그, 그 중에서도 보스턴 레드삭스 (이하 레삭) 빠다.

레삭이 이기면 하루가 즐겁고, 지는 날은 짜증이 나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이런 광팬이기에 레삭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내 근무처에는 레삭 팬이 딱 한 명 있다.

보스턴에서 오래 살다 와 자연스레 레삭 팬이 된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레삭을 좋아하는 농도에서 나의 10분의 1도 못미치는 것 같다.

결혼 초엔 레삭에 대한 내 넋두리를 억지로라도 들어주던 아내는

어느 순간부터 레삭 얘기만 하면 멀미가 난단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곳이 바로 엠팍이었다.

엠팍은 MLB park의 줄임말로, 박찬호 선수가 미국서 활약하면서 만들어진 사이트다.

글을 쓰진 않았지만 레삭관련 글들을 읽으면서 나름 즐거운 생활을 했는데

11월부터 3월까지, 야구가 없는 시즌 중에는 야구 이야기가 별로 올라오지 않아

엠팍 게시판 중 한 곳인 ‘불펜’에 들르게 된다.

그간 내가 살아온 인터넷 사이트와 달리 불펜은 정말 별천지였다.

1분마다 글이 몇 개씩 올라오고, 글마다 우수수 댓글이 달렸다.

500개, 심지어는 천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는 글이 하루에 한두개는 나왔다.

이를 통해서 난 평소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젊은이들의 생각을 알게 됐는데,

(물론 나이든 분들도 많이 있었고, 그 중엔 정청래 의원같은 소위 네임드도 있었다)

이는 내게 신선한 자극제가 됐다.

그렇게 계속 눈팅을 하다보니 야구시즌이 돌아온 뒤에도 계속 불펜에 머무르게 됐다.

그 와중에 목격한 것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광적인 지지였다.

대통령에 대한 건전한 비판도 “일베는 꺼져라” 같은 공격적인 댓글공세에 시달려야 했지만,

내가 문제삼은 점은 언론에 대한 그들의 조롱 내지는 멸시였다.

우리 사회 각 기관에 다 나름의 문제점이 있기 마련이고, 언론사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문제점을 빌미로 언론사가 없어져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언론은 의제설정 기능이 있어서 여러 언론이 다루지 않으면 어떤 의혹도 이슈가 되지 못하며,

언론이 기사로 써서 검증해 주지 않는 한 어떤 뉴스도 다 가짜뉴스일 뿐이다.

최순실 의혹만 해도 TV조선이 먼저 시작했고, 한겨레와 경향, 그리고 JTBC가 이어받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엠팍에선 기자들을 ‘기레기’라는 비하적인 단어로 부르는데,

한국남자를 칭하는 ‘한남’이란 단어에도 부들대는 분들이

왜 기자들에게 그런 호칭을 쓰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그들이 대통령 비판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리라.

문재인 대통령을 신으로 모시는 그들인지라 사소한 비판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정권교체의 일등공신이라 할 손석희마저 적폐로 취급하는 이유였다.

급기야 그들은 중국 경호원들이 우리 기자들을 폭행했을 때조차

잘 맞았다는 글로 게시판을 도배했다.

기자가 맞은 것이 문대통령의 방중성과에 행여 누가 될지를 걱정한,

문빠 (문재인 지지자 중 일부 광적인 지지자를 칭함)들의 광기였다.

2017년 12월 21일에 쓴, ‘문빠가 미쳤다’는 내 글은 그래서 나왔다.

이 글로 인해 내가 잃은 게 한두개가 아니지만,

그 중 대표적인 일은 내가 졸지에 박사모가 된 것이었다.

지난 8년간 이명박과 박근혜를 까는 칼럼으로 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들은 2006년 말, 내가 노무현 정부에 실망해서 쓴

‘차라리 박근혜가 어떨까?’는 칼럼을 여기저기 퍼나르며 날 박사모로 몰아갔다.

12년 전 쓴 칼럼을 찾아낼 검색능력이라면

최근 몇 년간 쓴 수많은 글들도 능히 검색했겠지만,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 칼럼들을 외면했다.

아마도 나를 박사모로 몰아야만 그들의 정신세계가 유지될 수 있어서였으리라.

그 선동은 아주 잘 통해서, 많은 이들이 나를 박사모로 알고 있다.

심지어 출연이 예정됐던 모 방송사에선 날 불러다가 사상검증을 하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서 난 내가 박사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땐 잘 몰랐지만, 그날의 일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날 슬프게 했다.

내가 가기로 했던 모 처에서는 예정됐던 강연을 취소한다고 전해왔다.

최종보고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아, 그곳의 長(장)이 민주당 소속이란 게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내가 잃은 것이라면,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그로 인한 즐거움에 해당된다.

특히 그간 소홀했던 개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하면서 아내에게 뺏겼던 인기를 차츰 회복하고 있다.

다시 엠팍 얘기로 돌아가자.

12월 말의 그 글 이후, 엠팍에선 나를 욕하는 글들이 꽤 많이 올라왔다.

그 글들을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읽은 것들은 외모비하가 대부분이었고,

전공이 기생충이니 기생충이 됐다는 것, 여자한테 관심을 못받아서 저리 됐다 같은 내용이었다.

늘 대하는 글들이여서 새롭진 않았지만, 어느 분이 내게 꼭 답해 달라는 취지로

장문의 글을 썼다.

그의 글은 내 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고 있었기에, 그분에게 답을 하고 싶어졌다.

서둘러 엠팍에 가입을 했지만, 엠팍은 가입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야 글쓰기가 가능했다.

그래서 그에게 이메일로 답을 드렸고, 엠팍에 가입한 사실은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봉주 성추행 의혹이 터졌다.

엠팍은 남성들이 주를 이루는 곳이라 여혐에 관한 글이 많이 올라온다.

페미니즘에 대한 강연이 있을 때 엠팍 댓글을 가끔씩 보여주기도 할 정도인데,

당연히 이들은 정봉주를 편들고 고발자인 A양을 욕하는 글로 게시판을 도배했다.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곳 블로그에 정봉주가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썼는데,

엠팍 분이 그 글을 가져다가 다시금 나를 욕했다.

뭔가 반론을 하고 싶었는데, 그때 마침 내가 엠팍에 글을 쓸 자격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서민기생충’이란 닉네임을 쓰고 싶었지만,

나라는 것을 남들이 알면 그들이 불편할까 싶어서

물고기의 입에 기생하는 ‘시모토아’를 닉네임으로 정했다.

거기서 정봉주를 감싸는 이들의 논리를 공격하는 와중에,

어느 분이 내가 바로 서민임을 알아냈다.

내가 나라는 걸 남들이 안다고 해서 새삼 당황할 것은 없었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아낸 것에 천년 묵은 산삼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했다.

그래서 난 시모토아가 내가 맞다고, 엠팍에서 놀면 안되느냐고 글을 썼는데

이 사건은 ‘서민이 익명으로 여론조작하다가 들통났다’는 사건으로 비화해 조롱을 당한다.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이가 익명으로 글을 쓰는 곳에서

내가 시모토아라는 닉네임을 쓴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엠팍 말고 다른 곳에서도 이런 반응이 나온 걸 보면,

이들이 생각이 참 신기하다.

엠팍 말고 다른 사이트에서도 이 사건을 빌려 나를 조롱했다. 신기한 일이다.

3월 27일, 정봉주를 고소했던 A양이 셀카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의 의미를 모르는 분이 많던데,

이는 그간 성추행 시간을 특정하지 않았던 A양이 최.초.로. 발생 시간을 특정했다는 의미가 있었다.

결국 그 후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었던 정봉주는

사건 당일 자신이 호텔에서 결제한 카드내역을 공개하며 사실상 패배를 선언한다.

정봉주가 성추행을 했다는 게 증명된 건 아니지만,

A양의 말이 더 사실에 가깝다는 뜻,

줄기차게 정봉주를 옹호한 엠팍은 패닉에 빠졌다.

인터넷의 쏠림현상을 얘기하기도 하고, ‘확증편향’이란 어려운 단어로

현 사태를 설명하는 분도 있었다.

그 중 몇 분은 나를 언급하기도 했다.

정봉주를 의심했던 내 글에 인신공격을 했는데 사과해야 하지 않느냐는 분도 있었고,

내가 그분들을 제발 좀 고소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도 있었다.

글에 달린 욕설의 대부분이 외모에 대한 언급이었기에,

명예훼손에 매우 엄격한 우리나라의 법으로 보아 고소만 하면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

특별히 지켜야 할 명예랄 것도 없고, 모욕이라는 건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일진대

외모나 전공이나 그밖에 다른 욕설에 대해 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이게 다 어려서부터 당한 외모 비하 덕분인데,

심지어 그 악플들에 공감한 적도 꽤 많았으니, 말 다했다.

이런 걸 승리라고 하긴 쑥스럽지만,

정봉주 성추행 사건에선 어찌됐건 내 예측이 맞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엠팍에서 내가 참여한 마지막 사건이 됐다.

누군가와 댓글로 말다툼을 하던 중 내가 한 말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한 탓이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글을 쓰지 못한 건 내 잘못이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던 상대의 무례함이 나로 하여금 과한 댓글을 쓰게 만든 측면도 있다.

아마도 그가 엠팍 집행부에 내 댓글을 신고한 것 같고,

그래서 며칠 전부터 엠팍에 글쓰는 게 금지돼 버렸다.

규정상 15일 정도만 있으면 그게 해제되겠지만,

엠팍이 겨우 그 정도 댓글 가지고-문제의 글이 삭제된 탓에 캡쳐가 안된다는 게 안타깝다-

글쓸 권리를 박탈하는 곳이라는 게 안타깝다.

내게 가해진 수많은 악플을 내가 견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내 댓글도 참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레기가 공식적인 명칭처럼 통용되고, 여성에게 온갖 모욕적 글이 달리는 것은 참아내는 분들이

정말 별 것도 아닌 내 댓글을 걸고넘어져 글을 못쓰게 하는 곳에

더 이상 회원으로 있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실 난 이런 일에 동조해주는 집행부가 더 원망스럽다. 그가 쓴 윗 댓글들을 봤다면 내 댓글도 양해가 됐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직접 참여해보니 엠팍이 참 재미있다는 점이었다.

댓글 없는 곳에서 오래 살다보니 수많은 댓글이 우수수 달리는 게 정말 신기했다.

두 번째는, 엠팍에 제대로 된 사과를 못했다는 점이다.

그간 엠팍을 문빠의 온상처럼 여기며 모욕한 건,

지금 생각하니 내가 성급했던 것 같다.

회원수로 따졌을 때 국내 5대 사이트에 들만큼 사람 수가 많은 곳이 엠팍이고,

그들 중 정치성이 강한 일부가 포함돼 있다고 해서

엠팍 전체를 매도한 건 내 잘못이었다.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엠팍에 나타나 글을 썼으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조만간 여기에 대해 사과하는 게 예의겠다 싶었지만,

이젠 이런 것도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쭉, 아내와 개들을 사랑하고, 또 기생충을 사랑하는 자연인으로 살아가야지.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보니, 정봉주의 말과 비슷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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