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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 위 로빈슨 크루소, 210일간 지구 한바퀴

폭풍 못지않게 무서운 것이 적도 인근에 많은 무풍(無風)지대다. 그는 "별도의 동력 없이 바람에만 의지해 항해하는 배에 무풍지대는 지옥이 된다"

삶도 똑같다. 바람이 불어 어려울 수도 있지만 바람을 이용해 앞으로 나갈 수도 있다.

본인 힘으로 노를 젓든 손으로 물살을 가르든 해서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더 멀리 계속 나아가려면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럴때는 차라리 무풍보다 역풍이 낫다.

요트 위 로빈슨 크루소, 210일간 지구 한바퀴

53세에 극한 항해에 도전… 꿈 이룬 김승진 선장

“바다에는 길이 없다… 그 길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無기항·無원조 요트 항해 칠레 최남단 케이프 혼 아프리카 희망봉 거쳐

당진 왜목항으로 돌아와 4만1900㎞ 대장정 마쳐

요트로 세계일주 꿈꾸다 다큐PD로 일하던 2001년

뉴질랜드서 요트매력 빠져 2010년 집 팔아 요트 구입 해양모험가로 본격 나서

流氷의 공포 눈에도 안 보이고 레이더에도 안 잡혀

배가 한 번 부딪히면 산산조각 날 수 있어

印尼서 해적을 만나다 밤중 요란한 알람소리

순간, 해적이구나 직감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시민들 도움이 큰 힘 수억원 드는 항해 비용 당진市 등 많은 곳서 후원

“세계 일주 꿈 이뤄준 왜목항 주민들에게 감사”

지난 2월 2일 남미 최남단 칠레의 케이프 혼(Cape Horn·혼 곶) 바다.

짙은 안개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망망대해에 높이 7m의 파도가 치고 초속 25m 이상의 강풍이 몰아쳤다. 바람의 힘에만 의지하는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나선 해양모험가 김승진(53) 선장은 출항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갑자기 몰아친 폭풍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남극해의 추위를 막을 방한복에 방한모자, 방수복까지 입고 갑판으로 나가 돛대에 걸린 로프를 급히 감아 돛 크기를 줄이고 요트 방향을 조절했다. 바람의 영향을 줄여 요동치는 요트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자칫 마스트(돛대)가 파도에 맞아 부러지기라도 하는 날엔 항해불능 상태에 빠져 침몰할 수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강풍에 날아오는 파도를 뒤집어 쓰자 몸이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여차하면 배에서 튕겨나갈 수도 있었다. 집채만 한 파도가 요트를 덮치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한쪽으로 '나가 떨어지듯' 흔들렸다. 선실로 들어온 바닷물을 퍼내고 돛을 조정하느라 기진맥진해질 무렵, 요트는 큰 파도에 휩쓸려 80도 가까이 옆으로 기울어 거의 전복될 지경이었다.

요트의 창문과 문을 닫았지만 기울어진 배의 거의 절반이 물에 잠기자 지붕 환풍구에서까지 바닷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요트 밑바닥에 매달려 균형을 잡아주고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발라스트 킬)가 없었다면 배는 침몰하고 말았을 것이다.

케이프 혼 바다는 남극에서 흘러온 빙하가 떠다니고 연중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 때문에 '바다의 에베레스트' '선원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다. 지구에서 가장 험한 바다 중 하나로 알려진 이곳을 요트를 타고 통과한 사람에게는 '케이프 호너(Cape Horner)'라는 명예로운 호칭이 주어진다.

김 선장은 "그곳에 들어가기 전 각오는 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아찔했다. 내 평생 처음보는 집채만 한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항해를 도와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19일 한국을 출발한 김 선장은 항해 107일 만인 이날 케이프 혼 앞바다를 통과해 한국인 최초의 '케이프 호너'가 되었다. 그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실패하면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항해였다"고 했다.

'바다의 에베레스트'

해양모험가인 김승진 선장은 지난 16일 충남 당진 왜목항을 떠난 지 210일 만에 무사히 돌아왔다. '단독·무기항·무원조 요트 세계 일주'에 국내 최초로 성공한 것이다. 왜목항을 떠나서 태평양의 섬 피지를 거쳐 남미 대륙 최남단인 칠레 케이프 혼,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인도네시아 순다해협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4만1900㎞의 대장정이었다. 하루에 200여㎞를 밤낮없이 달린 셈이다.

김 선장이 도전한 항해는 오직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요트 한 척으로(단독) 항구에 정박하지 않고(무기항·無寄港), 식량 보급 등 아무 지원 없이(무원조·無援助)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항해였다. 인류 최고의 극한 모험 중 하나로 꼽힌다.

"항해 도중 응급상황이 발생해도 인근 항구를 찾아갈 수 없다. 그 어떤 중간 보급이나 도움도 없이 망망대해에서 나 홀로 항해해야 한다. 퇴로(退路)나 우회로는 없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런 요트 세계 일주는 날씨와 바람 등 변수가 워낙 많아 세계적으로 성공 사례가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1969년 영국의 로빈 녹스 존스턴이 312일 만에 처음 성공한 이후 세계 요트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성취로 평가받고 있다. 이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은 그는 김 선장이 항해를 성공한 직후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김 선장은 "빙하 피해와 추위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남극해의 여름(12~2월) 바다를 지나기 위해 10월에 출발했다"고 했다. 한겨울이 아니더라도 남극해는 뱃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항로 중 하나로 꼽힌다. 김 선장은 "남극해 구간은 남극에서 떠내려오는 유빙(流氷)이 지뢰처럼 곳곳에 깔려 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가장 많이 느낀 곳"이라고 했다.

"영국령 포틀랜드 제도에 있는 사우스조지아섬 인근을 지날 때는 뿌연 안개 속에 남극에서 떠내려오는 폭 30m 정도의 집채만 한 빙하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운동장만 한 빙하는 레이더에 잡히지만 이 정도의 빙하는 레이더에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빙하라도 한번 부딪치면 배가 산산조각 난다. 순식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빙하를 피하느라 며칠 동안 뜬 눈으로 밤을 샜다."

그는 "남극해 쪽으로 갈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바람과 파도가 거칠어 뱃사람들 사이에 '광란의 (위도) 40도' '울부짖는 50도' '비명의 60도'라는 말이 있는데, 괜히 붙은 이름이 아니다. 남극해에 접어들면서 조난자동통신장치와 비상 식량 등이 들어간 '서바이벌 킷'을 준비했다"고 했다.

"남극해는 대개 흐린 날씨에 회색 바다인 경우가 많다. 웬만한 빙하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밤이 되면 속수무책이다. 작은 빙하는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고, 눈으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이곳은 바다가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통행이 불가능한 곳이다."

폭풍 못지않게 무서운 것이 적도 인근에 많은 무풍(無風)지대다. 그는 "별도의 동력 없이 바람에만 의지해 항해하는 배에 무풍지대는 지옥이 된다"며 "적게는 1~2시간, 많게는 17시간 바람이 한 점도 없어 닻을 내리고 적도의 뙤약볕 아래서 무작정 기다린 적도 있다"고 했다.

김 선장은 지난해 11월 27일 적도를 통과했다.

"적도 인근에서는 보통 거의 옷을 안 입고 발가벗고 지냈다. 40도까지 오르는 열기에 옷을 입을 수도 없다. 이날 밤 적도 무풍지대를 통과한 기념으로 캔맥주 하나를 땄다."

집 팔아 중고 요트 구입

21일 당진 왜목항에 정박 중인 김 선장의 요트에 타 보았다. 돛에 연결된 밧줄을 풀자 마스트에 달린 두 개의 돛이 바람을 감싸안으며 부드럽게 펴졌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밧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의 손은 온통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김 선장이 요트 뒤편에 있는 조종실에서 자전거 바퀴만 한 방향타를 조절하자 요트는 햇살로 반짝이는 서해바다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김 선장은 바다에 접하지 않은 충북 청주 출신이지만 젊었을 적부터 바다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생 시절 처음 접한 스킨스쿠버는 바닷속 미지의 신세계를 보여주었다. 스킨스쿠버 동아리를 만들고 전국대학연합잠수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바다에 빠졌다."

대학생 시절인 1986년 한강 350㎞를 스킨 다이빙으로 종단하고, 같은 해 일본 시나노강 380㎞를 같은 방식으로 헤엄쳤다. 한성대 미술과와 일본 동경비주얼아트 방송예술과를 졸업한 그는 다큐멘터리 프리랜서 PD로 활동했다. KBS '도전 지구탐험대' '환경스페셜', TV조선 크로스미디어 와이 '탈북자 한국적응기' 등이 그의 작품이다.

―요트는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2001년 다큐멘터리 PD로 일하던 시절에 갔던 뉴질랜드에서 요트의 매력을 처음 접했다. 바다 어디든 내 마음대로 탐험할 수 있는 보물선이었다."

―세계 일주는 단순히 요트를 즐기는 것과는 다른 큰 모험 아닌가.

"요트를 배우면서 일본의 시라이시 고지로라는 사람이 항구에 정박하지 않고 아무 지원도 없이 세계 일주를 한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읽고 눈이 확 뜨였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무모해 보이는 모험을 하며 신천지를 파헤쳐보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세계 일주 요트 항해를 꿈꿨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다큐멘터리 제작 프로덕션을 운영하다 2008년 귀국했다. 2010년 집을 팔아 크로아티아에서 중고 요트를 구입했다. 해양모험가이자 해양탐험가로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2010~2011년 크로아티아에서 한국까지 2만㎞를, 2013년에는 카리브해에서 한국까지 2만6000㎞를 요트로 항해하는 등 경험을 쌓았다. 이 과정을 통해 단독 세계 일주 결심을 다졌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코스라 비용이 많이 필요했겠다.

"예비용 돛과 위성통신 장비 등 각종 장비를 갖추고 수리하는 데 3억원 정도가 필요했다. 무동력(無動力)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요트 내 전기기기를 작동하기 위해 풍력발전기와 태양광 전지 3개를 달았다."

―그 돈은 어떻게 조달했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나의 꿈을 이야기해주면서 후원을 요청했다. 단독·무기항·무원조 세계 일주는 우리나라 요트계의 오랜 염원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충남 당진 왜목항에 사는 요트 애호가 김종득씨의 소개로 당진시와 주민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충남도와 해양수산부, 그리고 700여명의 요트 동호회원과 시민들도 도움을 주었다. 왜목항은 서해안에서도 일출을 볼 수 있는 관광지로만 알려진 작은 바닷가 마을인데 주민들은 해양레저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 했다. 왜목항이 세계 일주 프로젝트의 베이스캠프가 됐다."

―이번 항해를 '희망 항해'라고 이름 붙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전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는 의미다. 2013년 희망항해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요트 아라파니(ARAPANI)호의 오른편에는 'Sailing with Hope'(희망 항해)라는 글귀를 붙였다."

'아라파니'호는 바다의 순우리말 '아라'와 달팽이의 순우리말 '파니'를 합쳐 지었다. '바다달팽이'라는 뜻이다. "달팽이는 느리지만 멀리 여행을 많이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요트는 다른 배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누구보다 멀리 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아라파니호는 길이 13.1m, 폭 3.9m, 무게 9t으로, 원래 엔진이 달려 있으나 이번에는 바람만 이용하는 항해이니만큼 엔진을 봉인했다.

―국내에서 이번 항해를 지원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나.

"항해 기간 내내 요트가 운행하는 지역의 기상정보를 제공할 육상지원팀이 만들어졌다. 박주용 한국크루저요트협회 부회장 등 육상지원팀 10여명은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며 미국·영국·일본 등의 5개 기상사이트 정보를 종합·분석해 매일 위성통화로 알려주었다."

김승진 선장이 적도 인근 바다를 항해할 무렵 요트에서 키운 새싹채소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기른 새싹채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 김승진 제공

해적과의 추격전

―1년여 동안 준비하고 떠난 항해이니만큼 의욕이 넘쳤을 것 같다.

"사실은 출항 직후부터 곤욕을 치렀다. 출항 첫날 우리나라 해역을 벗어나기도 전에 요트가 그물에 걸렸다. 잠수복에 공기통까지 메고 바닷속에 들어가 그물을 겨우 잘라냈다."

―요트가 고장난 적은 없는가.

"출항 보름 후 바람 세기에 맞춰 돛의 넓이를 조절하는 장치가 부러졌다. 풍력발전기는 강풍에 기어가 망가져 작동하지 않았고, 냉장고도 돌아가지 않았다. 풍향풍속기와 자동항법장치도 삐걱거렸다. 한동안 몸으로 풍속을 감안하고 방향도 어림잡는 '원시 항해'를 해야 했다."

―인도네시아 바다에서 해적(海賊)의 공격에 당할 뻔했다는데.

"수마트라 섬과 자바 섬 사이의 순다해협 인근은 해적이 들끓는 곳이다. 지난 4월 중순쯤 잠자리에 들면서 레이더에 배가 접근하면 경보를 주도록 해놓았는데, 한밤중에 요란하게 알람이 울렸다. 갑판 위로 올라가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더 속 물체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순간, 해적이구나 직감했다. 요트의 모든 불을 껐다. 그랬더니 갑자기 접근하던 배에서 서치라이트를 켜고 요트를 비추며 추격하기 시작했다. 급하게 엔진의 봉인을 풀고 시동을 걸어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동력을 사용하지 않는 항해라는 원칙을 어긴 건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살아남거나 다른 사람을 구조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예외가 적용된다."

김 선장은 "바람이 없는 날은 요트의 닻을 내리고 스노클링을 즐기며 바닷속 풍경과 물고기들도 촬영했다"고 했다.

―상어를 만난 적도 있었다는데.

"지난해 12월 초 적도 부근이었다. 바람이 잠잠해 요트 주위로 모여든 돌고래들을 촬영하러 바닷속에 들어갔다. 돌고래들을 따라가며 근접 촬영을 하다보니 배에서 멀어졌는데, 갑자기 상어가 나타났다. 몸길이 3m 정도의 큰 놈이었다. 수영복에 카메라 하나뿐, 방어 무기는 없었다. 배는 6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상어가 다가오자 몸을 '큰 대(大)'자로 만들고 카메라가 끝에 달린 막대기로 위협했더니 상어가 주춤했다. 상어는 도망가는 목표물을 끝까지 쫓아오는 습성이 있다. 무조건 도망가지 말고 거꾸로 위협을 줄 필요가 있다. 그사이 정신없이 헤엄쳐 배에 올라왔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0년)를 보면 택배회사 직원 톰 행크스(척 놀랜드 역)가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표류된 이후 배구공에 '윌슨'이란 이름을 붙여 4년이란 시간을 함께 살아가며 외로움을 이겨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신에게 '윌슨'은 누구였나.

"나에게 윌슨은 새, 파도, 물고기였다. 자연과 교감하고 끈끈한 정을 나누며 마치 사람과 같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사람과 떨어져 있다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남극해를 지날 무렵 갈매기와 친구가 되기도 했다"고 했다.

"날개를 펴면 2m 정도 되는 큰 녀석이었다. 어느날 배 뒤쪽 해수면에 날아와 앉아 있길래 '이리 와' 했더니 정말 다가왔다. 그래서 이름을 '이리 와'로 지었다. 부리로 배를 쪼고 배 주위를 돌며 살펴보기도 했다. 바람이 많이 불면 날아갔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왔다. 거의 두 달 동안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길동무가 되었다."

바다의 길은 내가 만든다

김 선장은 "이번 항해로 지구는 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며 "지구라는 아름다운 별에서 태어난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했다.

―그 아름다운 바다가 배를 뒤집을 수도 있지 않나.

"바다의 양측면을 봐야 한다. 바다에서는 폭풍과 순풍(또는 무풍)이 반복된다. 폭풍 때 바람과 싸우듯 항해하다가 바람이 잠잠해지면 쉴 수 있다. 하지만 요트는 순풍 때는 별로 나아가지 못한다. 폭풍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야 그 에너지를 가지고 속도가 붙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극한의 모험에 도전하다니.

"도전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이번 항해는 자칫 실패하면 살아돌아올 수 없는 모험이었다. 각오하고 떠났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충만감과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에게 도전이란 무엇인가.

"이번 항해에선 어려울 때 항구에 피신할 수도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극복해야 한다. 극복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지만, 해가 지면 반드시 해가 뜨더라. 바다에는 길이 없다. 길은 내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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