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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역사 공부 제 1차 세계대전 요약정리 전쟁 이전 과정 전쟁 이후...

1. 전쟁 이전의 유럽

독일의 통일과정

①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6~7. 약 7주)

→당시 독일은 여러 공국들의 연합으로 느슨한 공동체를 유지

*두 나라는 대립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독일어를 쓰는 다민족 국가는 모두 한나라로 뭉치자는 생각을 가진 대독일주의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순수 독일국민들만 모여 독일을 만들자는 소독일주의의 대립으로 확장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이 승리.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건설. 오스트리아는 배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서로 악감정이 생길법도 하나 독일 내 민족주의자들의 힘이 커짐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소원을 희망할 정도가 되고 자연스레 두 나라의 관계는 개선

→이후 독일 형성(강대국으로 부상)

②보불전쟁(1870.7.19.~1871.5.10.)

→배경

→프-오 전쟁의 승리로 독일의 주도권을 잡은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완전한 독일의 통일을 이루고 싶어했다. 당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한 북독일 위주의 통일뿐이었으니 남독일까지의 완전한 소독일 중심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정복을 택했다.

→전쟁 전 프-오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프로이센에 이를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잠재워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 이탈리아,러시아,영국과의 관계도 원만히 다져놓았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및 이탈리아 원정, 멕시코 내전개입 등으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상태

→원인

→스페인 국왕 자리의 공석을 두고 프랑스 나폴레옹3세가 빌헬름 1세 조카를 추천

→비스마르크도 동의, 그러나 빌헬름 1세가 반대하면서 결국 무산

→프랑스의 반발로 나폴레옹 3세는 빌헬름1세를 만나 다음부턴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문서로의 보장을 요구했고 이는 빌헬름1세가 반대.

→이 사건을 비스마르크는 제 3국인 영국 신문에 과장되게 제보.(엠스 전보사건)

→1970.7.19. 프랑스는 독일에게 전쟁선포

→이에 독일은 방어전을 선포하고 프랑스의 침략임을 알리는데 집중

→남독일 제후국 프로이센 측 가담(민족주의 감정)

→전쟁준비가 잘 되어있던 독일에 비해 약했던 프랑스. 역으로 패전을 거듭하던 중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끄는 12만 대군이 메츠에서 독일군에 패해 스당으로 급히 대피.

→스당에 고립된 프랑스. 9.1일 나폴레옹 3세의 항복

→결과

→이후 양국의 국민들의 적대감정 악화. 흡사 남과 북의 전후 관계.

→독일제국 선포

→독,영,러,이,오 VS 프 (새로운 2강)

독일의 유럽에서의 입지 강화

①베를린 회의(1878)

→발칸반도에서의 러시아 세력확장 방지 → 러시아 불만, 유럽 각 국가들도 불만족.

→발칸전쟁의 원인. 더 나아가 제 1차대전이 발칸반도에서부터 시작하게 된 원인.

②독-오 동맹 (1879.10.7.)

→베를린 회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

→1차대전까지 존속.

→1882년 이탈리아의 합류로 3국 동맹으로 발전.

유럽국가들의 통일된 독일견제

①재보장 조약(1887)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간 대립이 심해짐에 따라 평화를 유지하고자 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다.

→1890 비스마르크를 해임시킨 빌헬름2세가 재보장 거부로 동맹을 깨진다.

②러불동맹(1894)

→독-러간 재보장조약이 깨지고 3제동맹에 위기의식을 느낀 러-불이 체결한 동맹조약.

→1904 영불 협상, 1907 영러 협상 → 3국 협상.

2. 1차 세계대전의 원인

①[국제체제수준]국제체제의 변화

→역외패권+다극체제에서 양극체제(협상국과 동맹국)로 변화

→삼국협상 삼국동맹(7월위기, 최후통첩, 선전포고) 으로 체제가 깨지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체제가 바뀌어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양극체제에서 세력이 붕괴가 되어서 발발을 한 것이다. 즉, 패권국인 영국의 힘이 막강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으나 그게 아니었고 영국의 힘이 불완전 즉, 취약했기 때문에 세력의 힘을 잡아줄 국가가 없었고, 이는 세력균형의 붕괴로 가져와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영국은 그 당시 해군력이 하강하는 시기였고, 그래서 전쟁에서 이길 힘이 없었다. 또한, 양극체제는 영국의 압도적인 힘의 균형에 의해 유지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 팽팽하게 유지를 하는 형태였기에 불완전한 상태의 균형이었다.

②[독일의 사과를 기반으로]독일의 책임

ⅰ경제력의 향상을 위해 전쟁(식민지 개척의 측면)

⒜3C-3B정책과 협상과정

→영국의 3C정책 : 카이로(이집트), 캘커타(인도), 케이프타운(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랑스의 식민지 : 알제리, 마다가스카르

→독일의 3B정책 : 베를린(독일), 이스탄불(비잔틴-터키), 바그다드(이라크)

→빌헬름 2세는 해군력을 강화

→전통적 해군강국인 영국은 독일의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시각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 친해질 것인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는 계기

→영국과 독일의 3C-3B정책을 사이에 둔 외교적 협상 *1912

①독일의 해군력 감축

→독일은 거절

②바그다드 철도

→식민지의 경쟁에 있어 영국은 외교적 협상시도

→독일은 요구수용

☞영국의 당시 현상유지적 정책기조로 볼 때, 보어전쟁의 여파로 예전의 막강한 힘을 유지시키지는 못한 것을 유추가능(덧붙여 다른 국가는 징병제였지만 영국은 모병제)

☞냉전시대의 미국과 소련처럼 힘의 균형에 가까운 상태는 아니었다

☞단순하게 2차 세계대전종료 후 미국에게 패권이 넘어간 것이 아니라 힘의 쇠약의 결과?

→독일의 영국에 대한 오인?

→독일은 영국이 중립국의 위치를 지킬 것이라 예상

→영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오인(바그다드철도, 러시아에 대한 협상)

*당시 독일의 생각1 : 영국은 프랑스를 침공하는 계획으로 슐리펜 계획을 짰고, 영국은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은 중립을 지키지 않고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슐리펜 계획은 실패

*당시 독일의 생각2 : 영국과 독일은 여러 차례 협상을 해오면서 영국은 독일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로인해 영국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9월 계획(베트만 홀베히의 비서가 남긴메모)

→1914년 9월에 계획한 ‘9월 계획’에 대한 독일의 수상인 베트만홀베크의 비서가 남긴 메모

①독일은 주변국 영토를 할양받아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의 면적을 결속시켜 중유럽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이는 독일에 의해 통제된다.

②프랑스, 벨기에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영토를 넘겨받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든다.

③독일이 이슬람을 장악한다.

☞그리고 9월 계획을 세운 이유는 1916년에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중동과 터키를 각각 나눠 갖자는 약속을 하는데, 독일이 이런 협정을 맺을 것을 미리 알고 그전에 먼저 중동을 갖기 위해 계획을 세운 것이다. 라고 피셔가 가설을 내세움

ⅱ상부구조(정치)와 하부구조(경제)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 전쟁(전환이론의 측면에서)

⒜피셔테제

→1912년 12월 초에 독일의 핵심 지도부는 빌헬름 2세와 비밀회동을 통해 장내에 전쟁을 벌이기로 계획했다는 사료를 발견

①회의 내용: 이 회동에서 빌헬름 2세는 전쟁이 발생하게 되면 영국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피해를 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라고 말함.

②참모군장 “전쟁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③7월 위기 :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왕국에 최후통첩을 하면서 유럽 전역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던 위기의 시간.

→오인에 기인한 지도자들의 선택

→1달의 시간을 세르비아에게 준 것

*한 달의 기간 동안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하고, 선전포고하기 한달 전 동안 독일에게 도와줄 것이냐는 설득을 했다.

3. 1차 세계대전의 전개

전쟁의 발단 - 사라예보 사건(1914. 6. 28)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가프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계승자 대공부부 저격 및 살해

*가브릴로 프란치프(1894~1918) :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대공, 추정상속자)는 게르만, 슬라브인의 화합 및 제 3동맹당국 건설 추진

→세르비아인들이 독립을 원하는것과 연관된 사건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

전쟁의 발발(1차 세계대전의 선전포고 과정)

→세르비아계 청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후계자를 암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

*최후통첩의 내용 : 반 오스트리아 해산/ 세르비아에 있는 암살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가서 직접 조사하기를 요구

→세르비아는 이를 내정간섭으로 여겨서 거절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

→러시아는 총동원령 선포(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인해)

→독일 또한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맞서 총동원령 선포

→독일은 일방적으로 러시아에게 총동원령 해제 요구

→러시아 묵살

→독일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

→독일은 프랑스에게 선전포고(슐리펜 계획의 발동)

→독일 ⇒ 프랑스 침공계획

→독일의 프랑스 침공을 위해 전진하는 과정에서 중립국가인 벨기에와 충돌

→독일 ⇒ 벨기에를 침공

→(독일의 벨기에에 대한 침공으로 인해)영국 ⇒ 독일에게 선전포고

*독일의 영국에 대한 오인에서 기인한 침공으로, 슐리펜 계획으로 프랑스를 침공하러 가는 도중 벨기에를 지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는 독일이 벨기에를 지나가는 것을 거절했고, 이 때문에 독일은 벨기에도 침공을 했다. 하지만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 슐리펜 계획은 실패를 한다.

→삼국협상(협상국) vs 삼국동맹(동맹국)의 구도 형성

*협상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동맹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의 국지전을 원했지만, 위의 과정을 통해 세계대전으로까지 확산 됨

두 개의 전선

→서부 : 독일 vs 영국, 프랑스

→동부 :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vs 러시아

동부전선의 해소

→(1917) : 러시아는 10월혁명(볼셰비키) 발생, 러시아 붕괴(내전 17~22)

*혁명결과 차르가 지배하는 왕정 붕괴

휴전협정

→(1918. 11. 4)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휴전 합의

→(1918. 11. 11) : 독일 휴전협정

☞1차 세계대전의 종료, 국제연맹 탄생(1920), 유럽 내 민족주의, 파시즘 유행

4. 1차 세계대전의 결과

전쟁 직후

①사망자와 부상자(통계치) *단위 : 명

구분 협상국 동맹국 사망(군병력) 552만 5,000 438만 6,000 부상(군병력) 1,283만 1,500 838만 8,000 실종 412만 1,000 362만 9,000 총 사상자 2,247만 7,500 1,640만 3,000

*사상자는 병사숫자와 비례

②전제주의 국가들의 몰락

→오스만제국, 러시아제국,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제국들의 급격한 붕괴로 정세 불안

군사 기술 발전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군사기술발전

→전열보병의 소멸

→초기 형태의 전투기의 모습과 최초의 탱크(영국) 등장

→기존의 참호전에서 기동전, 화력전으로 전술 변화

→항공모함의 재조명으로 인해 기존의 거함 거포주의와 함대결전사상이 사장

☞참호전을 견딘 유럽국가는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탱크와 비행기등의 발전도모, 기동전, 화력전으로 대표되는 현대 군사교리의 기초를 쌓는 계기

세계 권력의 이동

→패권의 이동(영국에서 미국으로)

*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대공황이 세계 대공황으로 확산

→전간기의 미국은 철저히 고립주의적인 국가

*2차 세계대전까지도 비슷한 양상이었으며, 일본의 진주만 폭격이후 적극적으로 참전

베르사유 조약

→이안 베케트 교수 “징벌적인 배상을 물리려는 프랑스의 열망과 안정을 바라는 영국의 소망, 국제주의와 민주주의, 자결의 원칙에 기반한 더 나은 세계를 만들려는 미국의 희망 가운데 이루어진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 타협책

→독일의 알자스-로렌지방의 반환

→공업지대인 라인란트는 승전국들이 3분할하여 각각 5년, 10년, 15년씩 점령

①배상금 문제

→정확한 배상금이 정해진 것은 1920년대 초반

*1320억 골드마르크

→1932년 히틀러가 배상금 지불 중단을 선언한 당시, 십수 년전 책정된 배상금의 절반도 갚지 않은 상태

②군사력의 제제

→징병제에 기반한 대규모 국민군이나 잠수함, 전함, 군용기 같은 공격적 무기를 보유할 수 없게됨

→그러나 독일의 전쟁수행 능력을 뒷받침해주던 독일의 공업단지들은 고스란히 유지

③베르사유조약 231조

→독일과 그 동맹국을 전쟁책임자로 명시한 일명 ‘전범자 조항’을 신설, 이어서 이를 법적 근거로 독일 측에 1320억 골드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배상금을 부과

☞국민들의 공분

☞히틀러와 나치는 이런 국민감정을 동원하여 정권장악

④1920년대 말~1930년대 초 프랑스

→전쟁에 대한 환상을 깨는 문학작품들의 등장

→경기침체와 대규모 실업

☞전쟁을 회피하자는 인식의 확대

→히틀러의 야심이 드러나는 와중에도 각국은 유화책으로 일관하면서 적극적으로 이에 대처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음

☞이러한 인식의 확대로 각국이 어떻게는 손을 써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또 다른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후

전간기의 끝

→각국의 전쟁억제수단의 부재

→독일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난

☞나치독일 건설의 계기

→독일은 라인란트를 기점으로 재무장을 완료하며 2차세계대전의 시작 조짐

5.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잔재

소련의 스탈린

→러시아 10월 혁명(~1918. 3. 3)

→볼셰비키 혁명은 1차대전이 혁명시기를 앞당긴 것

*당시 노동자는 소수, 농민이 다수

*니콜라이 2세가 전통적 농민공동체 해체, 부농중심 농업정책 실시

*농민이 전쟁물자로 인해 수탈을 당하는 상황

→혁명을 일으킨 농민과 노동자들이 왕정에서 소비에트 연방을 만듦

→그러나 혁명세력인 농민과 노동자들의 존재기반은 다름

*노동자 : 사회개혁

*농민 : 토지원함(=쁘띠부르주아)

→소비에트 혁명이후 내전상태(농민, 농민, 왕당파 등 세 조직)

→혁명파의 기본방침

①평화(이로인해 전쟁 이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러시아-프랑스 강화조약

☞독일은 이것이 동부전선을 마무리 시켰다고 생각함, 그로인해 서부전선에 집중하는 전략

②토지(부농중심이 아닌 소농중심으로 토지배분)

③사회주의 체제 건설

☞토지와 사회주의는 서로 상충됨

*혁명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농민이랑 노동자들이 주축, 농민은 자신의 토지를 가질 수 있는 소농중심의 토지배분을 원했고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체제를 건설하고자 함, 그러나 사회주의는 모두 평등하게 분배하는 이념이기 때문에 둘의 존재기반은 다르고 상충

독일의 히틀러

→베르사유 조약

→국제제도를 통해 영구적 평화를 원한 조약

→최초의 세계적, 함구적 평화를 목적으로 한 평화조약

→그러나 패전국에 가혹하다는 주장과 불충분한 응징이어서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주장으로 갈림

→미국이 결정적 입장

→갑작스러운 전쟁의 종결이라 체제가 불안정(독일에게 영향을 미침)

→독일군과 연합군 사이에 종전협정으로 전쟁이 종전

→전쟁의 장기화로 독일 국내에서도 저항

*정치구조는 권위적, 경제구조는 자유적이라 모순

→자본주의 발전으로 노동자계급 저항 상승

→1918 독일이 유화정책을 위해 입헌군주제 선언과 독일-러시아 강화조약 체결

→독일국민들은 종전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

→그러나 빌헬름 2세가 독일함대 출병명령

→수병들은 명령 거부(킬함대의 수병)

→이후 전열을 이탈한 수병들은 혁명 노동자 세력들과 합류

→후방의 교란상태를 낳음

→후방교란상태

→노동자가 주범, 대부분 유태계 출신

→이후 유대인들은 전방에 군인들 등에 칼을 꽂는다고 생각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 항복

→독일 뮌헨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선포(제국붕괴, 공화정)

→그러나 사민당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집권

*군부세력의 반대 및 독일국민의 전폭적인지지 부재

→바이마르 공화국은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한 당사자

→그러나 독일 국민은 베르사유조약 서명은 반역이라 생각

→(1920) 사회주의 노동자당(나치당) 창당

→독일은 두 개의 정당으로 분열된 상태

☞결국 1차 세계대전이 남긴 것은 노동자와 유대인에대한 반감

☞히틀러는 사회주의 세력과 유대인에게 적대감(2차 세계대전의 씨앗)

중동문제

→(1915. 10) 맥마흔 선언

→영국은 독일편에 있던 오스만제국 내의 아랍인들의 반란을 일으키는 대가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독립국가를 약속한 것이 맥마흔 선언

→(1916. 5) 사이크스-피코조약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 영국은 이라크와 요르단, 러시아는 터키의 동부지방을 주며 팔레스타인 지역을 공동관리로 한다는 내용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

→(1917. 11) 밸푸어선언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목표인 시오니즘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며 국제사회에 혼란을 야기 시킴

☞1917년부터 시작된 이러한 혼란의 시작은 100년도 더 지난 2018년 현재까지도 영국의 위임통치에 의한 아랍·이슬람권 분할과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 통치 그리고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 등 정치적 요인으로 인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폭탄 공격과 이스라엘 반격 등 가자지구 내부 군사작전으로 계속되는 공습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고한 사람들의 인권이 침해되는 등 해결되지 못한 채 여전히 국제사회의 큰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분쟁 속에서 발생하여 떠돌게 되는 난민문제는 EU의 난민문제로 이어지면서 국제사회와 의 갈등은 심화되어 가고 있다.

6. 현재의 유럽

제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 요약

→시간 : 현지시간 2018. 11. 11. 오전 11:11

→종선선언을 주도한 영국은 잊지 말라는 의미로 11월 11일 11시 11분 제안

→장소1 :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광장

→장소2 : 전날 파리 북쪽의 소도시 콩피에뉴를 함께 찾음

→콩피에뉴의 숲에 있는 열차 안에서 독일의 항복서명

→참석 : 프랑스, 독일, 미국, 캐나다, 러시아, 터키, 이스라엘, 스페인 등 세계 정상

→1차 세계대전에 관련된 국가들 참석

→엠마누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애국주의는 국가주의와 정반대다”며 우리(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은 국가가 가장 소중히 여기며 국가에 생명을 불어넣는 도덕적 가치들을 말소시키는 일이다

파리평화포럼(독일은 사과, 미국은 행사에 냉소적)

→11. 11~13일까지, 파리 라빌레트 전시관

①미국이 1차세계대전 중간까지 고립주의적인 성격, 프랑스가 지금 미국이 고립주의적으로 전환한 것에 대하여 미국저격

②메르켈 “1차 대전은 고립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편협한 국가주의자들의 관점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메르켈 “국가적인 자만심과 군사적인 거만함이 두 개의 세계 전쟁을 무분별한 유혈 사태로 이끌었다”며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독일의 과오를 반성.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 대한 경고이자 국수주의·패권주의적 행태로 회귀하려는 듯한 행태로 동아시아의 협력과 화해를 저해하는 일본 아베 신조 행정부에 대한 비판으로도 들린다.

☞독일이 과거사를 통절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발언은 이웃 국가들을 참화로 내몬 자신들의 행위가 자국 우선주의와 패권주의의 산물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21세기 현 시점에서도 세계가 새겨들어야 할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메르켈 “우리는 1, 2차 세계대전 이후 세워진 것들을 유지하고 보호해야 하며, 유엔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타협이라는 민주주의 정신의 약화와 규범에 대한 무시는 다원주의에 대한 두 개의 독극물”이라 며 미국을 간접적으로 비판

→(독일사과)메르켈 “독일은 세계가 더 평화로울 수있다면 무슨일이던 하겠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둔다”

미국의 불편한 기색

→마크롱-트럼프 회의중 불편한 기색, 돌연 트럼프는 악천후 핑계를 대며 미군 묘지방문을 취소, 비서실장과 합참의장이 미군묘지 방문

→트럼프 트위터로 “나토분담금을 공평하게 내야할 것”

→파리평화포럼에 미국은 참석하지 않고, 추후 미군묘지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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