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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영 별세

토픽셀프 2019. 10. 22. 15:11

노신영 별세

22일 서울대병원 관계자가 "노신영 전 총리가 어제(21) 서울대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숙환으로 별세한 것으로 안다. 빈소는 아침 9시쯤 차려질 예정"이라고 알려져 화제가 되고있습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평안남도 강서 태생으로 실향민인 노신영 전 총리는 서울대 법대 졸업 1년 전인 1953년 고시행정과에 합력해 1955년 외무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죠. 1980년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외무부 장관에 이어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 국무총리 등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80년 8월엔 고시 출신 외교관으로 처음 외무장관으로 발탁이 됐죠.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32년간의 공직생활을 종지부했죠. 이후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 고문을 지냈고 1994년~2012년까지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을 명받기도 했죠.

노신영 전 총리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대표적 멘토로 알려져있죠. 1970년 초대 주인도대사로 나갈 때 반 총장을 서기관으로 데려갔고 방글라데시와 수교할 때도 반 전 총장을 동행했죠. 1985년 총리로 취임했을 당시 반 전 총장을 초고속 승진시켜 의전비서관으로 발탁되기도합니다.

노신영 전 총리는 2년 3개월 간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이명박 정부의 김황식 국무총리 이전까지 최장수 총리기록을 보유하고 있죠. 노신영 전 총리의 부인 김정숙 여사는 10년 전인 2009년 4월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故) 김 여사와의 슬하에 3남 2녀를 두고 있습니다.

노신영 전 총리는 1930년 2월 2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학천리에서 태어났고, 중학교 3학년때 광복이 되어 중학교 졸업후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1949년 서울로 월남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월남 후 노신영은 고구마 등을 팔며 고학을 한 것으로 말했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한 지 불과 2주 만에 6.25 전쟁이 일어나서 서울 수복 후 학도의용군에 지원을 했죠. 군 복무 중인 1953년 2월 부산에서 열린 제4회 고등고시 행정과 3부(이후 외무고시)에 합격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규정상 군 복무자는 수습행정관으로 채용될 수가 없었죠. 이에 방법을 찾던 중 외국의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서와 장학금 또는 재정보증서를 받고 유학시험에 합격하면 제대가 가능하였기에 유학을 가게됩니다. 1955년 미국 켄터키 주립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뒤 외무부(현 외교부)으로 들어갔습니다.

1968년부터 주 로스앤젤레스 총영사를 맡게됩니다. 이때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과 친분을 쌓았고 이 덕분에 훗날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된 후 미국과의 친교를 위해 제5공화국의 외무부장관으로 활동했죠. 이후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 하에서 외무부차관으로 활동하죠.

전두환때인 1980년 9월 외무부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외무부장관으로 있으면서 김대중의 사면, 일본과의 경제협력 차관 문제 등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줬죠. 1982년 당시 세지마 류조가 방한하자 일본으로부터 한국이 공산권을 방어하는 보루이고 이에 의해 일본이 안보에서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논리를 펴서 경제협력 차관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죠.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선전한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오히려 국무총리에 자리하게됩니다. 그리하여 노태우, 장세동 등과 후계자로 주목받았으나 노태우, 정호용 등 군부 출신에 의해 견제를 받으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내려오게되었습니다.

공직을 떠난 이후에는 안중근의사숭모회 6대 이사장을 비롯해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고려대 석좌교수, 롯데그룹 총괄고문 등으로 활동하게됩니다. 그의 두 아들은 정세영, 홍진기의 차녀와 결혼을 하게되었죠. 그 후 2019년 10월 21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별세하셨습니다. 향년 89세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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