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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수승대의, 구연서원(龜淵書院)_170430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69 | 거창구연서원관수루

경상남도 거창의 문화재 탐방에서,

거창의 유명한 관광지인 수승대의 구연서원(龜淵書院)을 찾았습니다.

거창을 대표하는 국민 관광지인 수승대(搜勝臺)는,

원학계곡의 빼어난 경치로 거창 여행에서 빼놓을수 없는곳 이기도 합니다.

수승대(搜勝臺)는 경남 거창군 위천면의 수승대는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진,

안의삼동(安義三洞) 계곡 중 으뜸인 원학동 계곡에 둥지를 틀고 있으며,

구연서원(龜淵書院)으로 가는길에는 꽃들이 가득합니다.

서원의 담장 앞에는 효열각(孝烈閣)과 정려각이 있어,

왼쪽에 통훈대부사헌부감찰 신성열(愼性烈)의 효자비와 신성열 처(妻) 진양강씨 열녀비가 있으며,

오른쪽 뒤편에는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신성진(慎性眞)의 효자비와 신재주(愼在周) 처(妻) 안동권(權)씨 열부 정려각을 볼수 있으며,

서원 옆에sms 구연서원 설립과 동시에 심은 은행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된 약 400년된 은행나무가 있어,

이 은행나무는 본래 열매가 열리지 않는 수나무 였는데,

득남을 기원하는 아낙들이 밑둥치를 한주먹씩 잘라가 손상된 자리에 우레탄을 발랐는데,

어느 해부턴가 우레탄의 화학성분에 의해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로 변신했다고 하며,

고사 위기에 처한 고목을 살린다고 바른 우레탄이 나무의 성전환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의 백미인 관수루(觀水樓)로,

거창구연서원관수루(居昌龜淵書院觀水樓)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로 지정 되었으며,

관수루는 구연서원의 문루이며 누 아래는 출입문인 외삼문 역할을 하고,

누 위의 마루는 주변경관을 감상하며 휴식을 하거나 시회를 열고 강학하는 곳으로,

이 문루는 구연서원 건립 후 반세기 가량 지난 1740년(영조 16)에 문인 화가로 유명한 조영석(趙榮?)이 안음현감을 역임할 때 지었다고 하며,

그 후 구연서원이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될 때 이 건물도 영향을 받았고,

이후 다시 구연서원 건물이 중수될 때 이 문루도 함께 중건된 것으로 보입니다.

문루를 들어서면 구연서원의 강당이 눈에 들어오고,

일반 누정 건축물의 경우 보편적인 기법으로 기둥들을 대부분 쪽 곧은 재목을 사용하는데,

관수루(觀水樓)는 건축 자체가 자연암반을 활용하면서 하부 기둥으로 구부러진 자연목을 그대로 이용하는 기법을 적용하였는데,

이는 자연과 조화를 목적으로 한 듯하여 아름다운 형태를 보이고 있어 건축기법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며,

관수루는 누정 건축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입면의 비례가 뛰어나 18세기 전반 조선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관수루(觀水樓)의 자연친화적인 아름다움은 거북바위와 건너 바위사이에 자리하여 누각을 설치 하였는데,

바위들을 서원의 담장에 들이고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대신 거북 바위로 조심스레 올라 2증의 마루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관수루(觀水樓)의 마루에서 볼수있는 편액들을 살펴 보면,

신병교 근차(愼炳曒 謹次)이며,

朱樓浮在碧流汀(주루부재벽류정) 붉은 누각 푸른 물가에 떠 있어

噴雪鳴雷月半庭(분설명뢰월반정) 눈 날리고 천둥 치다 뜰 한 쪽에 달 비추네.

以有遠源能下潤(이유원원능하윤) 먼 근원이 있어서 윤택함을 내려주고

如非後浪必中停(여비후랑필중정) 뒷 물결 아니라면 중간에 멈추었겠지.

衆飮優餘充鼴量(중음우여충언량) 사람들 마시고 남아 두더지 양을 채우겠고

前程許大作鵬溟(전정허대작붕명) 갈 길은 커서 드넓은 바다가 되겠네.

知學吾人觀術處(지학오인관술처) 학문에 뜻을 두니 우리가 보는 방법은

肯將心本役於形(긍장심본역어형) 기꺼이 마음 근본을 가지고 형상을 만드는 게지.

丙午 春 友 古當 愼炳皦 謹此(병오년 봄에 친구 고당 신병교가 삼가 차운하다)

관수루(觀水樓) 편액은 여러개 있어 그중 하나로,

龜淵源接泗洙汀(구연원접사수정) / 活發淸流繞廟庭(활발청류요묘정)

混混續來知有本(혼혼속래지유본) / 悠悠過去自無停(유유과거자무정)

盈科豈憚經千曲(영과기탄경천곡) / 勇進綜能達四溟(용진종능달사명)

觀水名樓誠有意(관수명루성유의) / 有形觀處覺無形(유형관처각무형)

黃皐 愼守彛 崇禎四 庚午 孟秋 追揭(황고 신수이 숭정4 경오년(1808) 음력 7월 추가로 걸다.

"月城 金東準 稿(월성 김동준 고)" 입니다.

燭天金碧泛長汀(촉천금벽범장정) 하늘의 촛대, 금원산 푸름이 긴 물에 떴고

觀搜術傳夫子庭(관수술전부자정) 물을 보는 방법이 서원 뜨락에 전하네.

澹生渾處流無腐(담생혼처류무부) 담박함은 섞임에서 생기고, 흐르면 썩지 않아

來自源頭活不停(래자원두활불정) 근원에서 절로 흘러 활발하여 멈추지 않네.

珠貝還疑浮蜃閣(주패환의부신각) 진주가 돌아가 조개 집에 떠 있는 듯 하고

波瀾將放化鵾溟(파란장방화곤명) 물결은 장차 흘러가서 바다가 되겠거니

如斯看得何難有(여사간득하난유) 이처럼 보는 데 무슨 어려움 있으랴마는

堪笑遊人役勝形(감소유인역승형) 하늘이 경치를 만들어 사람들을 웃게 한다.

월성(月城) 김동준(金東準) 지음(稿)

경차관수루운(敬此觀搜樓韻) 편액으로,

觀搜樓連樂水亭(관수누연요수정) 관수루가 요수정과 잇닿아 있어

泗洙源是繞前庭(사수원시요전정) 사수의 근원이 뜰 앞을 둘러있네.

泉流混混來相繼(천류혼혼래상계) 샘물 줄기 모여서 서로 이어져 있고,

波勢沄沄去不停(파세운운거불정) 물결 기세 요동치며 멈추지 않고 간다.

勇益日新經萬壑(용익일신경만학) 날로 더욱 용맹스레 일만 골짜기 지나서

進無間斷注東溟(진무간단주동명) 중단 없이 나아가 동쪽 바다로 흘러드는데

顧名思義憑欄坐(고명사의빙란좌) 명분, 의리 생각하며 난간에 기대 앉아

日氣淸寒覺本刑(일기청한각본형) 한 기운 맑고 찬 절개에 본래 모습 깨닫는다.

庚戌 暮春日 十二世孫 鴻晟 謹稿(경술년 음력 3월 12세손 홍성 삼가 지음)

* 泗洙(사수) : 사수(泗水)와 주자(洙水)는 공자(孔子)가 태어난 노(魯)나라의 수명(水名)입니다.

관수루(觀水樓) 또다른 시판 입니다.

鉉誦儒宮杜若汀(현송유궁두야정) 거문고와 시 읊는 서원 물가엔 두약 있고,

長川如帶繞堦庭(장천여대요계정) 긴 냇물 띠처럼 섬돌과 마당을 둘렀네.

眞源浩浩知多積(진원호호지다적) 참된 근원 넓디넓어 많이 쌓인 걸 알겠고

淸波悠悠不暫停(청파유유불잠정) 맑은 물결 유유히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肯逐雨晴似溝澮(긍축우청사구회) 비 개어 기꺼이 쫓아가면 도랑과 같고

終兼晝夜到滄溟(종겸주야도창명) 밤낮으로 흘러서 마침내 푸른 바다에 이른다.

請君學道須淵搏(청군학도수연박) 그대는 도를 배워 반드시 모처럼 넓어져

欲識無形見有形(욕식무형견유형) 형체 없는 걸 알려면 형체 있는 걸 보게나

癸亥 端陽 趙榮䄷(계해 단양 조영석) 계해년(1743) 음력 5월 조영석

* 杜若(두약) : 생강과의 여러 해 살이 향기로운 풀

수승대유감(搜勝臺有感)의 시판으로,

此臺聲價擅邦鄕(차대성가천방향) 이 대의 명성이 나라, 고을에 자자하니

遊賞客來自遠方(유상객래자원방) 구경하려는 손님들이 멀리서 오신다.

樂祖千秋遺躅在(요조천추유족재) 요수 선생께서 천추에 남긴 자취 있고

退翁當日錫名芳(퇴옹당일석명방) 퇴계선생께서 당일에 주신 이름이 아름다워

樓亭左右還增景(누정좌우환증경) 누각, 정자가 좌우에 있어 주변 경치 더 했고

花樹東南亦有光(화수동남역유광) 종친들이 동남쪽에 있어 또한 빛이 나누나 勝地何嘗無定主(승지하상무정주) 명승지에 어찌 일찍이 정한 주인 없으랴? 一邱一壑我先莊(일구일학아선장) 한 언덕 한 골자기가 우리 선조의 별장이라네. 요수선생(樂水先生) 11세손(十一世孫) 신종현(愼宗賢) 지음(稿)

또다른 "관수루(觀水樓)" 시판 입니다.

朱樓隱瑛綠陰汀(주루은영녹음정) 붉은 누각 은은하게 숲속 물가에 비쳐

松自成梯石自庭(송자성제석자정) 소나무는 절로 사다리 되고, 돌은 뜰이 되었네.

爽可迎風春袖拂(상가영풍춘수불) 상쾌한 바람을 맞아 봄 소매를 떨어내고

高宜問月夜肧停(고의문월야배정) 높은 달에게 물으니 밤 술잔에 머문다네.

山爲勝狀環開谷(산위승상환개곡) 산은 고운 모습으로 골짜기 둘레에 열려 있고

水滌塵心遠入溟(수척진심원입명) 물은 마음의 티끌 씻어 멀리 바다로 들어가는데

魚鳥也嫌車馬客(어조야혐거마객) 물고기와 새들이야, 손님과 말, 수레를 싫어하지만

主人於此欲忘形(주인어차욕망형) 주인은 여기서 몸을 잊고자 하네.

경자(庚子) 육월(六月) 하한(下澣)

왼쪽의 근차관아재운(謹次觀我齋韻)의 시판이며,

龜淵之樓壓水汀(구연지루압수정) 구연의 누각은 물가에서 물을 누르고

雙松盤石護門庭(쌍송반석호문정) 두 그루 솔과 반석은 문과 뜰을 지키고 있네.

前人韻致華扁在(전인운치화편재) 앞 사람의 시 운치는 편액에 화려한데

太水風流早盖停(태수풍류조개정) 태수의 풍류는 사람과 수레를 멈추게 했지.

峰列衆星環北極(봉렬중성환북극) 별들이 북극성을 에우듯이 산들이 늘려있고

波分萬折湊東溟(파분만절주동명) 만 갈래 나뉘었던 물줄기는 동쪽 바다로 흘러간다.

尋眞會値重陽節(심진회치중양절) 심진동에 모여서 중앙절을 보내노니

泛菊樽前却忘形(범국준전각망형) 국화꽃 띄운 술동이 앞에 문득 나를 잊었노라.

戊辰歲 金麟淳(무진세 김인순)

위의 관아제(觀我齋)는 함안인 조영석의 호 입니다.

한글이 혼용된 "근차산고수장비운(謹次山高水長碑韻)" 편액으로,

絶世貞民不日成(절세정민불일성) 비길 데 없는 비석을 짧은 기간에 이루니

先生遺跡倍前明(선생유적배전명) 선생의 유적이 전보다 훨씬 밝아졌네.

記銘豈比金銀寶(기명기비금은보) 명을 쓴 걸 어찌 금은보배에 견줄까?

表績猶優竹帛名(표적유우죽백명) 비석 세우는 게 오히려 역사책 이름보다 낫지.

高截裕山瞻蓄德(고철유산첨축덕) 높고 가파른 덕유산은 덕을 쌓은 듯 보이고

長淸渭水想交情(장청위수상교정) 오래도록 맑은 위수는 서로 뜻을 알겠도다.

餘徽又有樓坮勝(여휘우유누대승) 또 남은 아름다움이 관수루와 수승대에 있어

能詔千秋永振聲(능조천추영진성) 영원토록 명성을 떨쳐 알릴 수 있겠네.

同頌祝詞(동송축사) 축사를 같이 노래함.

"구연동 끼친 터에 세상에 비길 데 없는 비석이 높았으니, 산고수장 변함없는 요수선생 유적이네. 장하다 수승대와 함께 천추만대에 빛나리라."

병오년(1966) 가을 7월 16일 후학 문재근 삼가 지음.

구연서원 관수루기(龜淵書院 觀水樓記)의 기문 현판도 볼수 있습니다.

관수루(觀水樓)의 건물 규모와 형태는 중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ㄷ"자 기단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놓고 8개의 기둥을 세웠고 기둥은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기둥 바깥쪽의 네 모퉁이에는 적절하게 높이를 조절한 활주를 세웠으며 누의 정면에는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달았으나,

나머지 방향의 공간들은 모두 개방시킨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위층 밑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사방 주변으로 계자난간을 둘러 안전에도 대비 하였습니다.

"觀水(관수)"란 맹자의 "관수유술"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하며,

"관수유술(觀水有術)"은 맹자의 사상을 보여 주는 말로 "물을 보고 천류불식을 깨닫고, 형체 있음을 보는 곳에서 형체 없음을 깨닫는 것"으로,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적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은 1694년(숙종 20)에 지방유림이 신권(愼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구주서당(龜州書堂) 자리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그 후 성팽년(成彭年)과 1808년에 신수이(愼守彛)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 하였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1990년 3월에 복설 하였으며..

구연서원(龜淵書院)에는 세분의 신위를 배향하고 있어 살펴 보면, 신권(愼權, 1501~1573)은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호는 요수(樂水)이며 안음출신이며 임득번(林得蕃)의 사위로, 임훈(林薰)과 더불어 학문을 쌓았고 천성이 효성스럽고 덕이 많았으며 학문에 뜻이 깊어 널리 성현을 찾아 배웠습니다.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중앙의 회시(會試)에는 뜻을 이루지 못해 관직에는 진출하지 못하였고, 평생에 소학(小學)을 중요시하여 그 문도를 가르침에 반드시 소학으로 우선 하였으며, 후진들에게는 퇴계와 일두선생을 종사(宗師)로 삼으라고 가르쳤으며, 야담(夜潭)에 갈 때 천석(泉石)의 절승이 있어 그 귀에 집을 짓고 요수(樂水)라고 편액을 하고, 때때로 처형제인 임훈과 이정(李楨)이 모여 여러 날을 강의하며 토론하고 혹은 시를 짓고 소요하다가 세상을 마치니, 학자들이 일컫기를 요수선생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두번째 성팽년(成彭年, 1540~159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옹(?翁), 호는 석곡(石谷)이며 안음(安陰) 출신으로, 아버지는 교위(校尉) 한량(漢良)이며 임훈(林薰)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었으나, 1569년(선조 2) 아버지가 죽자 학업을 그만두고 오직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으며, 효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金沔)이 고령·거창·현풍 등 경상도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을때, 정유명(鄭惟明) 등과 함께 안음에서 기병유사(起兵有司)로 창의문(倡義文)을 발통하는 등 김면의 참모가 되어 의병활동을 하였습니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고, 의약(醫藥)·복서(卜筮)·산경(山經)·지지(地誌) 등 유학 이외의 분야도 두루 섭렵 하였으며, 지평에 추증되고, 안의(安義)의 구연사(龜淵祠)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문집인 ≪석곡집≫이 있습니다. 세번째는 신수이(愼守彛, 1688~1768)로 자는 군서(君敍)이며 호는 황고(黃皐)이며, 도백(道伯)이 신수이(愼守彛)의 학문이 독실하고 효행이 극진함을 수차 조정에 보고하여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아들 인명(認明)이 한림원의 시종관이 된 은전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경기도 용인의 한천(寒泉)으로 도암 이재를 찾아 뵙고 몇 달 동안 같이 지내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서원 터에는 비석들이 자리하고 있어,

왼쪽에는 "거창신씨황산입향조 승훈랑휘우맹택리비(居昌愼氏黃山入鄕祖 承訓朗諱友孟宅里碑)"가 있으며,

"承訓郞(승훈랑)"은 조선 시대 문관 정6품 하(下)의 품계명 입니다.

건너편 오른쪽에는 야천(夜川) 신선생 유적비가 자리해 있고,

커다란 비석 3기가 위용을 자랑하듯 서있어,

오른쪽 부터 "황고신선생유적비(黃皐愼先生遺蹟碑)", 그리고 "석곡선생유적비(石谷先生遺蹟碑)"가 있으며,

가장 큰 비석인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로 산고수장은 "산은 높고 물은 유유(悠悠)히 흐른다"는 뜻으로,

군자의 덕이 높고 끝없음을 산과 냇물에 비유한 말이며 구연서원이 군자를 양성하고 기르는 장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의 신권(愼權)을 포함한 세분의 학자들은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제자를 양성했는데,

그 문하에서 두 정승과 일곱 명의 판서가 나왔으며 위의 비석도 그 문하생들이 스승을 존경하여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은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동재와 서재등의 건물대신 비석들이 자리해 있고,

강학의 중심 공간인 구연서원(龜淵書院)의 강당이 들어 옵니다.

강당에 걸린 구연서원(龜淵書院)의 시원한 필체의 현판이며,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인 강학당의 마루에도 편액들이 올려져 있어,

"구사구용(九思九容)"의 현판으로 구사(九思)와 구용(九容)을 각자해 둔 것으로,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에 나오는 귀절로 군자가 가져야 할 아홉 가지 생각과 태도를 알려 주는데,

"아홉 가지 생각"은 “볼 때는 환히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안색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고,

태도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진실 될 것을 생각하고, 일할 때는 조심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날 때는 물어볼 것을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곤란하게 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이 생기면 의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으로,

"아홉 가지 태도"는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고, 손은 공손하게 가지며, 눈은 바르게 뜨며, 입은 다물고 있으며,

말소리는 조용히 하며, 머리는 곧게 들며, 숨소리는 정숙하게 하며, 서 있는 모습은 의젓해야 하며, 얼굴빛은 위엄이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경재잠(敬齋箴)의 편액으로,

"의관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있기를, 마치 옥황상제 대하듯 하라"는 의미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68세 때,

17살의 왕에게 "삼가 공경하는 잠언"으로 올린 글이며 구절 하나하나가 모두 새겨들을 만합니다.

백록동규(白鹿洞規) 편액으로 학도들에게 이 서원의 규칙을 정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백록동은 중국 강남성 여산에 있으며 백록동규는 남송(南宋)때 주자(朱子)가 강학을 하면서 만든 규약을 실천한 것이 시초가 되어 백록동규라 합니다.

서원철폐 후 중수를 하고 남긴 기록인 중수기(重修記)의 편액이 있으며,

구연서원중건기(龜淵書院重建記)의 편액도 마루에서 볼수 있습니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의 본건물인 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로 좌우에 각각 방 한 칸을 두었고 나머지는 마루를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 입니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은 훼철된후 제대로 복원하지 않고,

서원의 마당에는 비석들만 가득한곳이 되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구연서원을 나오며 수승대의 정점인 거북바위를 찾아 봅니다. 수승대엔 거북바위(암구대)를 바라보는 정자 요수정이 있어 발길을 돌리며, 거창의 명승 수승대(搜勝臺)에 있는 구연서원(龜淵書院) 방문기를 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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