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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향일암, 주위섬.

토픽셀프 2019. 10. 13. 06:03

여수 향일암, 주위섬.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남쪽 나라 전라남도 여수(麗水)는 ‘물이 좋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뒤 전국을 순행할 때, “이 지역은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다운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묻자 신하들이 “물이 좋아서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답습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명을 여수라 했다고 전해진다. 여(麗)는 아름답고 화려한 의미를 지닌다.

동백꽃의 고장 여수(麗水)는 전남의 동쪽 경계에 툭 불거져나온 반도이다. 서쪽으로는 순천만을 사이에 두고 전남 고흥반도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광양만을 사이에 두고 경남 남해도가 자리잡고 있다. 본래는 백제땅으로 원촌현과 돌산현이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승주군(지금의 순천)에 속한 해읍현·여산현·마산현이었다가 고려 때 비로소 여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려 때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줄곧 순천부(지금의 순천)에 속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조선 성종 10년(1479) 전라좌수영이 설치되고 선조 24년(1591) 충무공 이순신이 절도사로 부임하면서 조선 수군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행정 구역상 순천으로부터 여수가 완전히 독립한 것은 1896년이다. 이후 여수시와 여천시·군으로 나뉘어 있던 여수반도 일대는 1998년 4월 여수시로 통합되었다. 오랫동안 한 문화권이었던 여수반도 일대에 행정 편의상 그은 시·군 경계는 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복장이 아름다울 때 여복(麗服), 얼굴이 아름다울 때 여안(麗顔), 자색이 아름다울 때 여색(麗色)으로 표현한다. 또한 날씨가 화창할 때 여일(麗日), 양귀비와 같이 아름다운 꽃이 여춘화(麗春花)가 된다. 이것과 맥락을 같이 하여 말씨와 글이 아름다운 것을 미사여구(美辭麗句)로 표현하며, 사람이 아름다울 경우 여인(麗人)으로 표현하므로 미인과 같은 말이다. 두보(杜甫)는 ‘3월 삼짇날 천기가 새로워지면 장안의 물가에 미인이 가득하다’고 시를 읊었다.

강과 바다 등 수향에 바탕을 둔 아름다운 산수가 산자수려(山紫水麗)한 표현에 알맞다. 이런 지역 성격에 부합되도록 붙여진 땅 이름이 여수이다. 그러나 천자문에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했음으로, 금이 생산되는 여수는 일찍부터 존재한 중국의 땅 이름이며,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역만리 머나먼 바닷길을 헤쳐 온 화물선이 기적 소리 울려 대는 여수는 항구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막아 낸 군사적 요충지로 충무공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또한 물결이 잔잔하여 갈치·강달어·멸치·오징어·고등어·병어 등이 많이 잡히고 미역·톳 등 조개류와 굴을 양식하기에도 좋다. 육지 끝자락에 걸쳐 있는 작은 산과 점점이 흩뿌려진 올망졸망한 섬과 청정 바다가 잘 어우러져 있는 여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섬 백도 를 위시하여 섬을 여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오래 전부터 사랑받아 왔다. 여수에는 섬 하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섬들이 많다.

다리로 연결된 돌산도, 방파제로 연결된 오동도, 남해 먼 바다에 홀로 떨어져 있는 거문도와 백도. 이 네 섬뿐만 아니라 사도 · 추도 ·금오도· 안도 ·개도 등 보석처럼 아름다운 섬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아직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고 고요하게 여름휴가를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옛 전라좌수영성터에 자리한 객사로 기골 장대하고 목소리 쩌렁쩌렁 호령하는 장군의 위풍을 떠올리게 하는 진남관, 거북선을 만든 장소이거나 최소한 거북선을 매어두던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소, 남해안 일대에서 활약한 충무공의 행적과 애국충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적은 좌수영대첩비, 충무공과 함께 왜군을 물리쳤던 수군 병사들이 충무공을 기리며 눈물로 세운 타루비, 동백숲으로 유명한 오동도 등이 여수 시내 또는 근교에 자리한 유적지 또는 명소이며, 시내를 벗어나면 여수지역에서 가장 큰 절집이면서 역사가 오랜 고찰인 흥국사, 낙조가 일품인 돌산도의 향일암 등이 있다.

여수 앞바다에 떠 있는 돌산도는 먼바다로부터 여수반도에 불어닥치는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큰 섬인데, 해안 곳곳에 자리잡은 포구마을 정경이 아름답다. 여수반도와 도서로 이루어진 여수시는 동쪽으로는 여수수도(麗水水道)를 끼고 경상남도 남해군이 있고, 서쪽은 순천만을 끼고 고흥반도의 동남쪽과 바다로 경계를 이룬다. 또한 남쪽은 남해바다, 북쪽은 순천시와 접하고 있다.

여수반도의 동남단 앞바다에는 대경도(大鏡島)와 소경도(小鏡島)·가장도(加長島)·야도(冶島)·오동도(梧桐島)·돌산도(突山島) 등의 섬들이 천연의 방파제를 이루고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지역답게 여수에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유인도 46개와 무인도 268개, 연륙도 3개 등 총 317개의 섬이 수려한 자연경관을 뽐내고 있다. 여수는 통일신라 때부터 해읍현(海邑縣)으로 불려 왔으므로, 물줄기의 종착지인 바다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산에 있는 마을을 산읍, 바닷가에 있는 마을을 해읍이라 하는데, 이는 위치에 바탕을 둔 부락의 유형 구분이다. 바다에 면한 오늘의 상황이 옛날과 다르지 않다고 전제하더라도, 해읍은 해안 환경이 탁월한 지역에서만 출현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자산공원을 내려와 오동도 방파제를 걸으면 예전과 사뭇 달라진 보도를 만난다. 우레탄으로 산뜻하게 포장된 인도를 따라 방파제 벽에 그려진 형형색색의 동백과 바닷게, 물고기의 문양이 관광객을 반긴다. 768m의 방파제를 지나 오동도를 들어서면 섬 전체를 덮고 있는 3천여 그루의 동백나무로 이루어진 동백림이 눈길을 잡는다. 오동도의 자랑이기도 한 동백나무는 10월부터 개화를 시작해 겨울에도 붉은 꽃을 볼 수 있으며, 2월 중순경에는 약 30% 정도 개화하다가 3월 중순경에 절정을 이룬다.

바다는 수군의 활동 근거지가 되는 곳이기에, 군사 기능을 관장하는 수군절제사가 주둔하면서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선 조에는 한때나마 이곳에 충청 · 전라 · 경상의 삼도수군(三道水軍)통제사가 주둔하면서, 수군 활동의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하여 당시의 병영과 관련된 시설로서, 진남관(鎭南館)이 국보 제304호의 대표적 역사 유물로 남아 있다.

여수라는 지명의 출현은 영조 때에 도호부의 현판을 달면서부터이다. 오동도는 동백과 신이대 등 193여 종의 울창한 희귀 수목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지며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울창한 숲 사이로 잘 닦인 산책로, 푸른 잔디로 곱게 조성된 5천여 평의 야외광장,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음악분수대, 2012여수세계박람회 홍보를 위한 박람회홍보관, 새로 개축하여 2002년에 준공된 오동도등대 등이 여행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야간선상투어를 했을 때, 구항에서 바라보는 돌산대교는 시간에 따라 형형색색 바뀌는 조명을 받아 신비로움 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대로 장군도에서 바라보는 여수항의 야경은 환상적 분위기와 포근한 포구의 정경이 어우러져 김양호의 「겨울 여수항」을 절로 생각나게 하였다. "박제된 복어의 나뒹구는 은빛 눈썹에/ 진눈깨비 내릴 것 같다/ 더러는 밀물로 선 간끼 든 사랑으로/ 햇살의 깊이만큼 깎여지는 바다에/ 흰빛 갈매기의 낮은 휘파람 소리로/ 겸손하게 출렁이는 여수항/ 닻을 올린 어선하며 어구의 깊은 잠수/ 일어서고 있다" 유인도 중 면적이 가장 넓은 섬은 돌산도로 70km 2 에 달하고 이어 금오도 (27km2), 개도 (8km 2 ) 순이며 면적이 가장 좁은 섬은 광양만의 소륵도 로 겨우 0.02km 2 에 불과하다.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섬 역시 돌산도로 3,700여 가구에 4,275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갈치 잡이로 유명한 거문도 는 331여 가구에 7,304명이 거주하고 있다. 반면 금죽도 와 부도는 단 두 명만 거주해 ‘유인도’라는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다.

여수세계박람회를 개최하는 2012년까지 여수 화양면 공정리에서 조발도 - 둔병도 - 낭도 - 적금도 와 고흥군 영남면을 연결하는 교량이 만들어질 계획이어서 여수 도서 관광 활성화 등 도서 발전이 앞당겨질 전망이다. 여수의 섬과 고흥 간 교량이 건설되면 여수-고흥 간 이동 시간이 승용차로 현재 한 시간 거리에서 사십 분대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2012년까지 여수 묘도 와 광양을 연결하는 교량이 건설되면 여수-광양 간 이동 시간도 승용차로 현재 한 시간에서 삼십 분가량으로 줄어든다.

해안의 아름다운 경관과 병풍바위·용굴·지붕바위 등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오동도 입구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이나 모터보트를 타야 한다. 배를 타면 오른쪽으로는 돌산도의 아늑한 섬 정경이 시야를 압도하는데, 새하얀 포말이 뱃전을 때리면 오동도를 소재로 한 수많은 시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신병은의 「그 섬이 있다-오동도」도 역시 그런 시 중의 한 편이다. 저 멀리 수평선에 떠 있는 엄마섬과 애기섬 사이로 새해 첫날의 붉은 해가 솟으면, 수평선을 기준으로 붉은 태양과 여명이 채 가시지 않은 오동도의 실루엣이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새해 첫날, 여수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수를 찾은 관광객들이 왜 자산공원을 찾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오동도의 새로운 자랑거리인 음악분수대는 한여름밤에 절정을 이룬다. 여수 신항에서 실려 오는 갯내음을 맡으며 자전거를 타고 오동도방파제를 달리면 호수 같은 내해에 오색찬란한 불빛들이 밤하늘의 별보다 더 영롱하게 하나 둘씩 물 위에 떠오른다. 오색찬란한 조명을 한껏 받은 물줄기는 부드럽게 좌우로 흔들리다가 때로는 격정적으로 밤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관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는데 답례를 해야 할 지휘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모여 앉은 야외음악당엔 밤이 깊을수록 사람들이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어느새 바다 위에서 맞은편 도시의 야경이 거울처럼 비치며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걸린다. 밝게 열어주는 숲의 마을 웃자란 그리움이 동백꽃 빨간 입술로 열리는 날에 동박새 낯익은 울음 또르르 또르르 벼랑 아래로 구르다 바람의 갈피를 세운 아주 가끔씩 스스로 그늘이 되어 문득 고요해지는 그 섬, 여수항이 여수반도와 돌산도를 연결하는 돌산대교는 각종 농수산물의 육상 물류 운송뿐만 아니라 오동도, 향일암, 방죽포해수욕장 등 여수 주변 관광벨트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다리이기도 하다.

돌산대교 바로 앞에 위치한 돌산공원에 오르면 아름다운 여수항과 여수의 시가지 주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주변에는 장군도와 이순신 장군이 발명했던 거북선 모형(추정되는 실제 크기)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향일암은 전국 4대 관음 기도처 중의 한 곳으로 전국의 많은 신자들, 특히 경상도 지역의 불자(佛者 )들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해안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은 속세의 번뇌를 털고 중생을 위해 떠나는 구도의 길과 같이 험난하고 에돌아가는 길이다.

남해 수평선의 일출 광경이 장관을 이루어 향일암이라 하였으며, 또한 주위의 바위 모양이 거북의 등처럼 갈라져 있어 ‘영구암’이라 부르기도 한다. 향일암은 금오산의 기암절벽 사이, 동백나무와 아열대 식물에 둘러싸여 있다. 마을에서 향일암을 오르는 산길은 제법 가파른 편으로, 암자 근처에 이르면 집채만한 바위 두 개 사이로 난 석문을 통과해야 하는 등 아기자기한 등산 코스가 섬 여행의 운치를 더해 준다. 임포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5백 년 정도 된 동백나무가 있고, 뒷산인 금오산에는 흔들바위와 부처바위가 있다.

암자 뒤편 금오산 정상에 오르면 오밀조밀한 섬과 잘 어우러진 맑은 남해바다의 섬세함을 볼 수 있는데, 한려수도의 절경을 압축해 놓은 듯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다. 특히 남해 수평선의 일출 광경은 장관이어서 평일은 물론 새해 첫날이면 일출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로 분비는 해맞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향일암은 원래 644년인 백제 의자왕 4년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당시는 원통암이라고 불렀다. 958년인 고려 광종 9년에 윤필대사가 금오암으로 고쳐 부르던 것을, 조선 후기인 1715년(숙종 41)에 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개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충무공을 도와 싸웠던 승병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현재 향일암은 대웅전과 관음전, 칠성각, 독서당, 취성루 등이 복원되어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금오도 여행은 여수 중앙동 물양장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을 타고 함구미에 내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함구미에서 매봉산 산록 안부까지 오르노라면 다도해의 많은 섬들이 호수 위에 떠 있는 섬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길목 어귀 마을 돌담길이 유독 정겹게 느껴지는데, 한국 영화 「인어공주」를 촬영했던 그 돌담길이다.

돌담 위로 고개를 내민 담쟁이넝쿨이 지나는 길손들을 정겹게 반기는 듯하다. 금오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으로, 금오도 여천마을의 조개더미 유적은 유송리 여천마을 동쪽 바닷가에 위치한다. 현재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조개더미층이 드러난 면적은 동서 30m, 남북 15m 정도의 작은 규모이다. 조개더미층은 흑갈색 자갈층 위에 형성되어 있으나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금오도는 조선시대에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혹은 임금의 관( 棺 )을 짜거나 판옥선 등의 전선( 戰船 )을 만들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황장봉산( 黃腸封山 )이었다. 소나무의 중요성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기간도 길었는데, 봉산으로서 금오도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멀리 신선대를 바라보며 걷는 옛 송광사 터로 가는 길에 펼쳐진 푸른 망망대해가 여행길의 고단함을 한방에 날리고도 충분하다. 송광사 터에서 잠깐 다리쉼을 하고 매봉산으로 가다 보면 곳곳에 초분이 보인다.

남해안 섬지방에 아직도 남아 있다던, 그야말로 전설처럼 들리던 초분을 대하면 섬뜩함 때문에 발길이 잠시 멈칫거린다. 남면의 면소재지가 있는 우학리에는 봉산이었던 금오도가 1885년 민간인들이 들어와 살 수 있도록 국유지에서 민유지로 바뀐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18년에 세운 ‘금오도 개척 100주년 기념비’가 면사무소 옆에 나란히 서 있다. 또한, 내외진마을 중앙에 위치한 한국전력공사 남면서비스센터 안에는 금오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78년 12월 5일 세운 ‘남면전화점화기념비’도 볼 수 있다.

남면 우실마을에는 여남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 여남중학교·여남고등학교 등 교육기관이 자리잡고 있다. 여남초등학교는 1921년 우학리교회에서 세운 개량 서당으로 시작해 4월 4일 남면사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1981년에는 병설유치원을 설치하여 유치원과 초등 교육의 중심이 되고 있다.

여남중학교는 1965년 12월 24일 개교하였고, 여남고등학교는 여수시의 도서지역에서 일반계 고등학교로는 처음으로 1985년 4월 18일에 세워졌다. 금오도는 항일운동과 관련된 사건이 많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936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1938년 9월에 열린 제27회 한국 기독교의 장로회총회에서 강압적인 신사참배가 결정되자 당시 우학리교회 목사 이기풍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일로 이기풍은 여수경찰서에 투옥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기 직전 금오도로 강제로 옮겨졌으며, 1942년 6월 20일 일요일 아침 우학리교회 목사관에서 죽었다. 송고마을은 1879년 소라면 달천에서 살고 있던 김양단이 조정의 명을 받고 금오도에 사슴사냥을 나왔다가 이곳을 지나던 중 산수가 수려하여 전 가족을 옮겨 정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밀양박씨와 경주김씨 등이 이주해 옴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전체가 소나무로 우거져 ‘솔고지’라 부르다가 송고( 松高 )로 이름을 바꾸었다.

송고마을에는 금오도를 비롯한 많은 섬에서 이어내려 왔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린 당제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송고마을에서는 당제를 모시는 것을 ‘제만 모신다’라고 부르는데, 상당과 하당, 그리고 선창에서의 헌식제로 모두 세 곳에서 이루어진다. 당제는 음력 정월 초하루 자시부터 시작되는 상당제와 이튿날 오전에 행해지는 헌식제까지 이틀 동안 치러진다.

안도선착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10m 높이의 풍향대이다. 바람의 방향을 알려 주는 풍향대는 1918년 안도어업협동조합에서 처음 세웠다. 그후 세월이 흘러 낡아지자 20여 년 전에 보수를 했지만, 녹이 슬고 제구실을 못하자 GS 칼텍스에서 제작해 준 것이다. 기단부에는 ‘섬마을 사랑’이라고 새기고 있는데, 1995년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사고로 직접적인 피해를 보았던 섬 지역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풍향대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정자나무와 팔각정이 있으며, 그곳에1896년 새롭게 설치된 돌산군의 초대 군수였던 조동훈( 趙東勳 )이 남면 일대를 순시하다 안도에 들른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높이 90 cm , 폭 40 cm 크기의 직사각형 사암에 ‘호남한위 팔역요충( 湖南捍衛 八 域要衝 )’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훼손된 일부분은 시멘트로 메웠다. 안도항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주 좁아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섬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S자를 이루며 폭이 넓어져 천연 호수를 형성하고 있다.

밀물 때는 큰 배도 마을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1959년 사라호 태풍을 제외하고는 태풍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천혜의 요새이다. 이러한 지형 조건 때문에 옛날에는 해적이나 왜구의 근거지였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다. 안도항에서 마을을 돌아 여안초등학교와 여남중학교 안도분교장을 지나면 이야포해수욕장에 도착한다. ‘이야포’라는 땅 이름은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면서 노동의 힘겨움을 이기고, 서로 호흡을 맞춰 노동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이야 이야”라고 가락을 맞추는 소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야포는 ‘이앳게’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마을 뒤편에 있는 바닷가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이야포에는 오랜 세월 바위가 파도에 갈라지고 서로 부딪쳐 닳아진 작고 고운 자갈밭이 있다. 자갈 사이로 들어 온 바닷물이 다시 내려가면서 내는 소리는 인간이 흉내내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준다. 안도마을 동쪽에는 백사장이 발달되어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안도해수욕장은 모래가 맑고 깨끗하여 백금포( 白金浦 )라고도 부른다. 해수욕장과 몽돌해안이 있는 안도는 여름철 또다른 매력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알려 주는 조개더미 유적이 있는 안도는, 9세기경 일본 승려 엔닌[ 圓仁 ][794~864]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 )』에 땅 이름이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 838년 6월 13일 중국 당나라의 불교를 배우기 위해 선발된 일본 승려 엔닌은 당나라에 파견될 사신의 배를 타고 지금의 큐슈 후쿠오카를 출발하였다.

엔닌은 천태종의 발상지인 천태산 순례가 좌절되자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 머물며 당나라 불교를 배울 방도를 찾다가, 840년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인 오대산 대화엄사에서 고승들의 가르침을 받고 불교 유적을 순례하기 시작하였다. 840년 8월, 당나라 수도 장안에 도착한 엔닌은 자성사라는 절에 머물면서 일본에 없는 불경을 손으로 베끼어 쓰고, 고승들을 찾아 불교의 도리를 깨우쳤다. 그러나 장안에 머물기 2년째 되던 해에, 당시 황제였던 무종( 武宗 )이 행한 대대적인 불교 탄압에 845년 5월 강제로 일반인으로 환속( 還俗 )하게 되었다.

서고지마을은 안도의 서쪽에 위치한 ‘곶’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에 있는 섬은 모양이 가마솥을 닮아 ‘가마도’라 부르다가 ‘가마부( 釜 )’ 자를 써서 ‘부도( 釜島 )’라고 했다. 안도 상산봉에서 본 부도의 아름다움을 이옥근은 「안도에서 시를 줍다」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845년 5월 15일, 엔닌은 그동안 베껴 쓴 불경과 그림 등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신라 사람으로서 통역을 담당한 유신언, 관리 장영 등의 도움을 받아 적산법화원에 머물며 귀국선을 구하였다. 그리고 유신언과 김진 등의 도움을 받아 847년 7월 20일 귀국길에 오른다. 엔닌은 8월 15일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다시 머리를 깎고 승복으로 갈아입었으며, 우리나라의 남해안을 거쳐 9년 3개월 만인 9월 17일에 후쿠오카로 귀국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엔닌이 9년 이상을 여행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의 847년 9월 8일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산들이 있는 섬 사이를 가니 남북 양쪽은 다 산과 섬으로 겹겹이 겹쳐져 있어 태연하게 보였다. 오전 10시가 되려고 할 무렵 안도( 雁島 )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이곳은 신라의 남쪽 땅으로 궁궐[ 內家 ]에서 말을 기르는 곳이다. 동쪽 가까이에 황룡사의 장원이 있으며 띄엄띄엄 인가 두세 군데가 보인다. 서남 방향에는 멀리 탐라도가 보인다.

여수시 남면 작은 섬, 안도의 앞바다가 시를 쓰면 나는 미명을 딛고 상산봉에 올라 그 시를 줍는다. 육지에서 온 이는 그 시를 낚싯대로 낚아 올리고 아침상에 올라가 풍성한 반찬이 되어, 마을 사람들은 그 시를 주워 집으로 나르고 바다로 내려간 배들은 그 시를 그물로 끌어내기도 한다 섬으로 올라 온 시들은 동백나무에 걸려 꽃으로 피어나고 파도처럼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 분교 운동장 구석구석에 나뒹군다. 나는 오늘도 그 시를 주워 불꽃 가슴으로 그리운 이름을 적어..."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책으로 여수 지역과 관련된 땅 이름이 나오는 책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 고려 전기인 1145년(인종 23)에 편찬된 『삼국사기( 三國史記 )』이다.

『삼국사기』에는 원촌현( 遠村縣 )과 돌산현( 突山縣 ) 등 여수 지역의 옛 행정구역이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보다 3백여 년 전에 기록된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 )』에 ‘안도( 雁島 )’라는 땅 이름이 나타남으로써, 안도가 당시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는 항로에 있으면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남쪽으로 탐라, 즉 제주도가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상산에 올라가면 맑은 날 제주도를 볼 수 있는 것도 엔닌이 현재의 안도에 기착했음을 알려 주는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거문도에서는 세 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쳐서 1백만 평 정도의 천연 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을 도내해( 島內海 )라고 부른다. 큰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항구 구실을 하고 있는 이러한 입지적 여건 때문에 거문도항은 예부터 빈번히 열강의 침입을 받아왔다.

거문도에 있는 영국군 묘지도 그 흔적의 하나이다. 거문도는 섬 일대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곳으로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그 중 거문도등대는 거문도를 찾는 관광객이 여행하는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여객선 선착장이 있는 거문리에서 등대까지 걸어서 약 1시간 남짓 걸리는데, 삼호교를 거쳐 유림해수욕장을 벗어나면 물이 넘나드는 ‘무넘이’를 지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바다의 기암절벽을 낀 1.2㎞ 거리의 동백나무 숲이 우거진 산책로가 펼쳐진다. 거문도등대까지 오르는 길은 산책로로도 손색이 없다. 길을 따라 늘어선 동백나무숲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하고, 초입을 5분 정도 오르면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아이들과 함께 올라도 무리가 없다. 약 20분간 산을 타면 등대가 나타나는데,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잔디가 고운 별장 같은 관사를 만날 수 있다. 또 절벽 위 관백정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해 바다가 진풍경을 연출한다. 군함 6척과 수송선 2척으로 구성된 영국 해군선단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기지와 항구를 구축한 것은 1885년(고종 22) 4월이었다.

그 후 영국군은 거문도에 2년간 머물렀는데, 이러한 행위는 우리나라 주권을 무시하는 도발행위로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거문도 주민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철수 당시 거문도에는 영국인의 묘지가 7~9기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3기만이 확인될 뿐이다. 남아 있는 묘지 2기는 거문도 뒤편 산령에 자리잡고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문도등대에서 해뜨는 방향으로 39개의 무인군도로 이루어진 백도가 보인다. 상백도와 하백도를 포함한 상백도·하백도일원은 1979년 12월 명승 제7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백도는 특히 여름 관광지의 대표적인 명소로 천연기념물 제15호인 흑비둘기를 비롯하여 팔색조, 가마우지, 휘파람새 등 30여 종의 희귀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또한 풍란, 석곡, 눈향나무, 후박나무, 동백 등 아열대식물들이 즐비하며 353종의 식물분포와 연평균 수온이 섭씨 16.3℃로 큰붉은산호, 꽃산호, 해면 등 170여 종의 해양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그야말로 생태계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거문도에서 비정기적으로 유람선이 출발하며, 섬 주위를 관람하는 데는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백도라는 이름은 대략 백여 개의 섬이 모여 있어 백도라 하기도 하고, 백에서 하나가 모자란 99개여서, ‘일백백( 百 )’ 자에서 ‘한일( 一 )’ 자가 빠진 백도( 白島 )라 하기도 한다. 매바위와 병풍바위가 있는 상백도와 옥황상제의 아들이 바위로 변했다는 서방바위·각시바위·거북바위가 있는 하백도 일원에는 각종 해식애와 시스텍이 발달해 있어 가히 해식지형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백도는 생태계 파괴 방지를 위해 섬에 내릴 수 없어 배를 타고 돌아보는 것만 허용된다. 또 날씨가 안 좋으면 배가 운항하지 않으므로, 그 자태를 본다는 것은 행운이 따라 줘야 가능한 일이다. 날씨가 맑을 경우, 보통 하루에 1회~3회 정도 운항한다.

대삼부도에는 주민들은 거주하지 않고, 폐사( 廢寺 )와 폐가옥 몇 채가 있는데, 이곳에서 염소를 키우던 동도 주민이 일시적으로 거주하던 곳이다. 대삼부도와 소삼부도는 현재 전라남도교육청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갯가는 원래 거문도 동도리 어촌계의 재산이었으나, 해방 후 어려웠던 시절 동도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의 급료를 마련하기 위해 동도 주민들이 자기들의 재산이었던 삼부도를 학교에 양도한 것이다. 대삼부도는 1980년대 ‘박종철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문경관 ‘이근안’이 도피 생활을 했던 섬으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스킨스쿠버 동호회를 비롯한 관광레저 스포츠 활동이 성하다.

소삼부도에는 무인 등대가 있으며, 주위에 있는 ‘검등여’는 1948년 여순사건 때 좌익사상을 가진 거문도 젊은이들이 그곳에서 처형되어 바다에 수장된 슬픈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백도라는 이름은 대략 백여 개의 섬이 모여 있어 백도라 하기도 하고, 백에서 하나가 모자란 99개여서, ‘일백백( 百 )’ 자에서 ‘한일( 一 )’ 자가 빠진 백도( 白島 )라 하기도 한다.

매바위와 병풍바위가 있는 상백도와 옥황상제의 아들이 바위로 변했다는 서방바위·각시바위·거북바위가 있는 하백도 일원에는 각종 해식애와 시스텍이 발달해 있어 가히 해식지형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백도는 생태계 파괴 방지를 위해 섬에 내릴 수 없어 배를 타고 돌아보는 것만 허용된다. 또 날씨가 안 좋으면 배가 운항하지 않으므로, 그 자태를 본다는 것은 행운이 따라 줘야 가능한 일이다. 날씨가 맑을 경우, 보통 하루에 1회~3회 정도 운항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문도등대에서 해뜨는 방향으로 39개의 무인군도로 이루어진 백도가 보인다.

상백도와 하백도를 포함한 상백도·하백도일원은 1979년 12월 명승 제7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백도는 특히 여름 관광지의 대표적인 명소로 천연기념물 제15호인 흑비둘기를 비롯하여 팔색조, 가마우지, 휘파람새 등 30여 종의 희귀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또한 풍란, 석곡, 눈향나무, 후박나무, 동백 등 아열대식물들이 즐비하며 353종의 식물분포와 연평균 수온이 섭씨 16.3℃로 큰붉은산호, 꽃산호, 해면 등 170여 종의 해양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그야말로 생태계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거문도에서 비정기적으로 유람선이 출발하며, 섬 주위를 관람하는 데는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사도는 본도와 추도, 중도, 시루섬[증도], 장사도, 나끝, 연목 등 일곱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 2월 영등일 등 두세 차례에 걸쳐 2~3일 동안 ‘물 갈라짐[일명 모세의 기적]’ 현상이 일어나는데, 길이 1.5㎞, 폭 30m의 길이 생겨나 일곱 개의 섬들이 ‘ㄷ’자형으로 연결되는 장관이 연출된다. 뿐만 아니라 본섬의 선착장에서 20분간 해변도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마주치는 중도의 기암들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순신의 눈에 띄어 거북선을 구상하게 했다는 거북바위, 충무공의 전설이 어린 시루섬의 장군바위, 맑은 물이 솟아나는 젖샘바위와 멍석바위, 남산 야외음악당을 방불케 하는 높이 20m의 동굴바위, 사람의 옆얼굴을 닮은 바위, 고래바위를 비롯해 용꼬리를 닮은 용미암 등 기암마다 갖가지 전설이 숨어 있어 더욱 흥미롭다.

양면이 바다로 트여 있는 양면바다해수욕장, 고운 모래밭이 일품인 사도해수욕장, 해변 가득 피어난 들꽃이 눈길을 끄는 본도해수욕장 등 작은 섬 안에 세 개의 해수욕장이 자리잡고 있다. 가족 단위 피서객을 위해 새롭게 조성된 벚나무공원의 언덕에 앉으면 바다 건너편의 낭도까지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사도와 추도 간에 공룡발자국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화석 중 가장 길다고 한다. 최재환은 이러한 사도( 沙島 )의 아름다운 대자연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사도( 沙島 )에서」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배를 띄운다. 포효( 咆哮 )하듯 쫓고 쫓기는 이리떼들 한식경 지나면 바람이 깃빨처럼 펄럭이는 안개숲 사이 개벽( 開闢 )일까, 창세( 創世 )의 길이 열린다. 삶이 여울지듯 구비구비 발자국도 선명한 것을 잠룡( 潛龍 ) 드디어 승천하능갑다.

고샅에 깔린 찡한 그림자들 모두가 살붙이라. 가끔 낯익은 얼굴들이 선수( 船首 )를 스쳐가고 삿대를 비껴 쥐고 잊혀진 흔적들을 뒤적이며 어둠 속에도 내일이 있음을 늘 감사한다." 백야도는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18.5㎞ 떨어져 있다. 원래는 호랑이같이 사나운 사람이 산다 하여 백호도라 불렀으나, 1897년 돌산군 설립 당시 백야도로 개칭되었다. 약 4백 년 전 장흥고씨가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백호산에 봉수대와 백야산성이 있었고, 말을 사육하던 백야목장이 있었다. 짐막골해수욕장과 화백해송림 등 아름다운 경관으로 해마다 여름에 많은 피서객들이 찾고 있으며, 특산물로는 향기 좋은 유자가 유명하다. 산길 양 옆에는 ‘결초보은( 結草報恩 )’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수크렁이 널려 있다.

수크렁은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지낸 대부분의 어른들에게는 추억을 되살려 주는 재미난 풀이다. 풀 끝을 한 움큼 잡아 서로 옭아매 놓고 친구를 일부러 건드려 쫓아오는 친구가 걸려 넘어지도록 했던 추억의 풀이다. 백야도등대는 여수시 화정면 백야리 산 3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1928년 12월 대한제국 세관공관부 등대국에 소속되어 최초로 밤바다를 밝혔다. 현재는 1997년 5월 이후 여수지방해양수산청 백야도항로표지관리소로 불리고 있다.

백야도의 명물 백야대교는 여수시와 고흥군을 잇는 11개 연륙교와 연도교 중 첫 다리로서, 2005년 4월 14일에 준공됐다.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와 화정면 백야리를 연결하는 백야대교는 길이 325m, 너비 12m로 착공된 지 5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주탑 없이 아치로 상부를 지탱하는 주전자 손잡이 모양의 닐슨 아치교로, 교각간 거리가 국내 최장인 183m이다. 하화도 마을 앞바다에는 밀물 때는 물 속에 잠기고 썰물 때만 보이는 일곱 개의 바위섬이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칠때’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대표적인 농어 낚시 포인트이다.

주변에 장구섬과 문여 등 많은 무인도와 서( 嶼 )가 점점이 흩어져 있고, 불을 피우면 반대편 팽바위에서 연기가 난다는 큰굴 등 해식동굴이 발달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여수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약 22.2㎞ 떨어져 있는 상화도와 하화도는 사도를 지나는 길목에 도열해 있다. 원래 진달래꽃과 동백꽃, 선모초가 많은 꽃섬이라 하여 상화도·하화도라고 불렀다. 숲이 울창하고 해안을 따라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섬으로, 봄에 꽃이 필 때 가장 아름다운 섬이다. 상화도는 37가구, 98명이 살고 있는 조그만 섬이다.

하화도는 한국 영화 「꽃섬」에서 주인공 임옥남이 “꽃섬에 가면 모든 슬픔과 불행을 잊을 수 있다”고 말하며 찾아가는 바로 그 섬이다. 하화도 주위에는 ‘자갈도래’라는 역빈이 있다. 자갈로 된 해안으로 해안선 길이가 300m가 채 안 되는 조그만 해안이다. 백야도의 야생화로는 길가에 핀 노란 고들빼기, 우리나라 토종인 비목, 팔만대장경 목판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는 산벚나무, 환경의 지표식물이기도 하고 줄기가 하얗게 보이는 국수나무에 이어 일명 멩감나무라 불리는 청미래덩쿨 등이 서식한다.

청미래덩쿨의 뿌리는 굵고 구불구불 옆으로 뻗어 토복령으로 불리며 성병에 효험이 있는데, 수은의 해독제로도 사용된다. 줄기가 질겨서 소의 코를 꿰뚫는 데 사용되어 ‘코뚜레나무’라고도 불리는 노간주나무의 열매인 도송실은 향이 좋아 드라이진의 원료가 된다. 숙성이 되면 럼주가 탄생한다. 한편, 노간주나무의 줄기에는 가시가 박혀 있어, 섬사람들은 쥐구멍에 거꾸로 꽂아두어 쥐 퇴치용으로 사용했다.

개도 여석마을은 옛날 숫돌의 원료가 많이 생산되었던 곳이다. 여석마을에서 동쪽 운구지마을로 가는 길에 두 개의 벅수가 세워져 있다. 이 벅수는 마을 어린이들이 질병에 자주 시달리자 그 원인을 귀신의 짓으로 생각하여 잡귀·잡신을 모두 마을 밖으로 쫓아내고자 동구 밖에 세운 것이라 한다. 1921년( 辛酉年 )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수 지역의 다른 벅수와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훨씬 이전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벅수의 생김새로 보아 시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연상할 수 있다. 두 벅수는 모두 옛날 벼슬아치들이 썼던 모자나 군인들이 썼던 전립( 戰笠 )이 없는 민머리형이다. 개도의 특산품으로 유명한 것이 조선시대부터 만들어 내려 와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개도막걸리이다. 개도막걸리는 물이 좋기 때문에 부드럽고 깔끔한 맛을 지니고 있다. 생산과정이 기계화되면서 찌꺼기가 거의 없어 여성들이 특히 좋아하며, 많이 마셔도 다음 날 머리가 아프지 않는다고 한다. 개도 화산마을에는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민속으로 천제( 天際 )와 당산제가 있다. 천제는 음력 3월 1일 자정 무렵에 지내고, 당산제는 3월 2일 오후 5시쯤 지낸다.

천제는 천제봉에서 지내는데, 돌로 쌓아 만든 넓은 제단이 있으며,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상당’이라고 부른다. 중당 아래 산 중턱에는 ‘기우집’이 있어 이곳에서 제를 모시기 전에 몸과 마음을 닦고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는 마을 옆에 있는 ‘천제당’이라는 당집에서 행해지며, 이곳을 하당이라고 부른다. 천제당 내부에는 제기가 보관되어 있고, 지난 해 제물로 쓴 명태 한 마리가 매달려 있다고 한다. 개도에 있는 전통가옥으로 ‘강석원 가옥’이 있는데, 이 가옥은 사각형의 대지에 동쪽으로 대문을 내고, 안쪽에 남서향으로 안채를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가옥을 ‘도가집’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술을 만드는 곳, 즉 주조장을 의미한다.

안채의 가옥구조는 정면 4칸, 측면 3칸에 전퇴가 있고, 왼쪽으로부터 부엌-방-대청-건넌방 순으로 각각 1칸씩 자리하고 있다. 가옥의 전체 구조는 ‘ㄷ’자 모양이다. 해안선을 따라 도로가 발달하고, 청석포와 모전의 몽돌해수욕장과 낚시터가 유명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는 개도는, 1994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여덟 군데의 조개더미가 발견되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발견된 유물로는 덧무늬토기, 눌러찍은무늬토기, 무늬없는토기 조각과 돌칼, 돌도끼 등이 있다.

『여산지』에는 조선시대 개도에 목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화산마을에는 높이 30m, 둘레 10m 정도의 느티나무 노거수( 老巨樹 )가 있는데, 400년 이상 자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를 ‘마녀목( 馬女木 )’이라고 하며 그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월항마을에는 장수감이 될 아이가 부모의 손에 의해 수장( 水葬 )되었다는 ‘용바구[용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라남도 동남쪽에서 남해로 길게 돌출한 여수반도로는 북쪽 순천 방면에서 내려온 17번 국도가 시의 중앙을 지나 시의 남쪽 끝 돌산도 돌산읍까지 뻗어 있다. 그리고 17번 국도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시도로가 시의 곳곳으로 이어져 있으며 호남고속도로 순천교차로와 남해고속도로 광양교차로가 가까이 있어 여수로 찾아가는 길은 다소 시간이 걸릴 뿐 그리 어렵지는 않다. 여수로는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대구·대전·광주·진주·하동·마산·전주·진도·목포·해남·광양·순천 등지에서 고속버스와 직행버스가 다닌다. 또 서울에서 여수까지는 전라선 열차가 다니며 서울과 제주에서 여수공항으로 운항되는 항공편도 있다. 또한 여수항에서는 제주·부산을 비롯해 거문도와 인근 섬으로 이어진 배편도 있어 여수와 연결되는 대중교통은 다양한 편이다. 일부 몇 곳을 제외하면 여수에는 숙식할 곳이 많이 있다.

여수는 물만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항이자 손꼽히는 휴양지로 여수의 바다는 매우 아름답다. 여수의 바다는 유인도 51개와 무인도 269개 등 총 317개 섬이 연꽃처럼 내려앉아 그야말로 넓은 바다에 꽃이 피어난 듯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 화려한 물의 도시이다. 최근 2012년 세계박람회 유치에 성공했을 정도이다. 여수,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바다에 둘러싸인 이 고장은 항구이자 공업도시인 탓에 다소 번잡스러움이 없진 않지만, 외려 그같은 이유로 살림이 튼실한 고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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