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오늘의 역사 (5월 12일)

토픽셀프 2018. 8. 30. 14:09

오늘의 역사 (5월 12일)

오늘의 역사 (5월 12일)

[ 1962년 ] 남산 케이블카 개통

1962년 5월 12일 서울남산에 우리나라 최초 여객삭도(索道ㆍa cable car)인 남산 케이블카 ‘은하수’와 ‘무지개’가 개통됐다. 남산 케이블카는 이날 개통된 후 하루도 쉬지 않고 운행돼 국내 최장수 케이블카로 서울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한국삭도공업주식회사가 1961년 9월에 착공해 당시 2억9천여만환을 들여 준공됐다. 남산 케이블카는 그 운행거리가 회현동 승강장에서 남산 꼭대기에 있는 예장동 승강장까지 약 600m 이며 평균 초속 3.2m로 운행, 편도 운행 시간은 약 3분 정도이다. 지상과의 고저차는 약 138m로 올라가는 것과 본관 승강장을 향해 내려오는 것 두 대가 동시에 운행되며 이 두 대의 케이블카는 중간지점에서 정확히 마주쳐 지나가도록 설계됐다. 케이블카의 수용 정원은 38명으로, 개통 후 이틀 후인 5월 14일 운행을 시작해 오전 10시에서 오후 11시까지 연중무휴로 운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삭도 산업의 선두주자로 제 몫을 해온 남산 케이블카이지만, 지난 2002년 7월 7일 상하행선 2대가 갑자기 멈춰서는 사고가 발생, 60여명의 탑승객들이 지상 40~50m 상공에 매달려 있다 1시간여 만에 구조되기도 했다. 개통 당시 탑승 정원 31명! 회현동 승강장에서 남산 팔각정까지 605미터 거리를 이동하는 데 4분 정도 걸렸다.

그 밖에 무슨일이 ..... 총 42 건

오늘의인물 (5월 12일) 2009 -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궁궐의 장식그림 개최 (5.12~7.5)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은 2009년 5월 12일(화)부터 7월 5일(일)까지 2층 기획전시실에서「궁궐의 장식그림」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화려한 채색의 일월오봉도와 십장생도로 꾸민 그림창호 및 실내 벽면에 붙였던 부벽화(付壁畵) 등 총 21건 60점(창호그림 19건 58점, 부벽화 2건 2점)과 창덕궁 희정당을 비롯한 침전 내의 벽그림 영상 자료(6건 6점) 등 이제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궁궐 전각의 실내 벽면을 화려하게 치장한 장식그림들을 소개한다. 궁궐은 나라의 정사를 펼치는 공적인 공간이자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서 전각마다 그 위상에 걸맞게 화려한 장식을 하였다. 특히 전각 내부에는 권위와 존엄을 드러내고 왕실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뜻으로 조선 왕실의 꿈과 바람을 담은 장식 그림을 실내 창호나 벽면에 부착하는 치장의 전통이 있었다. 이번에 전면 공개되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그림창호들은 창덕궁에서 전해진 것으로서 창호의 설치 공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도 등의 주제로 보아 궁궐 내·외 전각 중에서도 왕과 왕실 인물들이 거처하던 곳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봉황도, 공작도 쌍폭은 조선 왕실의 침전 내부에 부착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국외 한국문화재 보존처리 지원사업’에 따른 보존 수리 완료 후 국내에 첫 공개되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순종과 순원왕후의 안위를 위해 창덕궁 희정당·대조전·경훈각 등 침전(寢殿)의 대청 동·서 벽면에 마주보게끔 부착한 대형의 부벽화 6점을 영상 자료로 재현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번 전시는 화려한 외관에 가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궁궐 실내를 아름답게 꾸몄던 장식그림의 전통과 의미를 되짚어 보는 자리인 동시에 궁궐건축 실내의 공간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전통 창호 및 장지(障子, 방과 방 사이, 또는 방과 마루사이에 칸을 막아 끼우는 문) 등의 다양한 쓰임에 대한 새로운 조명 및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자리가 될 것이다. 아울러 전시 기간동안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시대 궁궐의 다양한 장식 그림과 건축물 실내외 치장을 주제로 한 특별강연회가 5월 21일(목), 6월 18일(목) 오후 2시 두 차례에 걸쳐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관람안내 등 자세한 사항은 전화(02-3701-7634~5) 또는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www.gogung.go.kr)를 참고하면 된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ocp.go.kr (대전=뉴스와이어) 2009년 05월 08일 http://www.newswire.co.kr/?job=newsno=403781 2008 - 중국 쓰촨성 원촨에서 강도 7.8급의 지진 발생 (5월 12일 오후 2시 28분) 2008 - 중화인민공화국 쓰촨 성의 성도인 청두에서 북서쪽으로 약 90㎞ 떨어진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7.9의 쓰촨 성 대지진이 일어나다. /위키백과 2008 - 중 쓰촨성 7.8강진…최소 8천5백명 사망 청두 북서쪽 92km…피해 커질듯 중국 쓰촨성 청두(성도)에서 북서쪽으로 92㎞ 떨어진 원촨현(문천현)에서 12일 오후 2시28분(현지시각)께 리히터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해 8천여명 이상이 숨졌다. 하지만 지진 규모가 워낙 큰데다, 진앙이 청두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을 석달 앞두고 발생한 이 지진으로 베이징과 상하이까지 건물이 흔들리고, 타이와 대만에서도 진동이 느껴졌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날 강진으로 쓰촨성에서만 8533명이 사망하고, 간쑤성과 윈난성 등 인근 수십여 지역이 피해를 봤다고 보도했다. 특히 피해가 컸던 베이촨현(북천현)에서는 3천~5천명이 사망하고, 1만여명이 다쳤다고 통신은 전했다. 베이촨현은 이번 지진으로 건물의 80%가 무너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쓰촨성 두장옌(도강언)에선 중학교 건물이 무너져 수업 중이던 학생 900여명이 매몰되기도 했다. 한편, 주중 한국대사관 영사부는 이날 오후 11시 현재까지 이번 지진으로 인한 한국인 피해자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target=_blank http://go.daum.net/bin/go.cgi?relative=1url=/Mail-bin/login_f.cgi%3Ferror%3Dlogin%26lu%3D/Mail-bin/send_mail.form.cgi%3FTO%3Dmoon@hani.co.kr /한겨레 2008-05-13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287278.html 2008 - 오후 수업중 와르르…1천수백명 매몰 “구해달라” 무너진 화학공장에 수백명 갇혀 아비규환

신화통신 “베이촨현서만 3천~5천명 사망”

7분뒤 베이징 3.9 여진…남서부 통신두절 중국 쓰촨성 7.8 강진 쓰촨성 일대를 덮친 강진에 건물이 무너진 두장옌(도강언)의 쥐위안중학교(한국의 중·고등학교)는 콘크리트 더미에서 자녀를 찾는 부모들의 절규로 아비규환을 이뤘다. 900여 학생이 매몰된 것으로 전해진 이곳엔 응급실이 들어서고, 포클레인이 투입되는 등 난민촌을 방불케 했다. ■ 학교에서 수업받다 참변 건물이 무너질 당시 이곳에선 1학년과 2학년 18개반이 한가로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신화통신은 한 반에 50여명의 학생들이 3층짜리 건물에서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 재앙을 만났다며, 이들 대부분이 폭삭 주저앉은 건물에 그대로 갇혔다고 전했다. 일부 학생들은 재빨리 건물을 빠져나와 변을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부분 학생들은 갑작스레 닥친 지진의 공포에 아우성치다 건물 더미에 깔렸다. 수업을 받다 변을 당한 한 학생의 어머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고 통신이 전했다. 오후 5시40분께 10여명이 학생이 구출되자 학교엔 환성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들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다친 것으로 전해졌다. 숨진 채 발견된 4명의 주검은 운동장에서 부모를 맞았다. 신화통신은 매몰된 잔해 속에서 구해 달라는 학생들의 신음이 들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충칭에서 초등학교 건물이 무너져 4명이 숨진 것을 비롯해, 학교 5곳이 추가로 붕괴돼 수백명이 매몰됐다. 또 중국 시팡의 한 화학공장이 지진으로 부서져, 수백여명이 갇히고, 80t 가량의 암모니아 액체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정확한 사망자와 부상자 숫자가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현재 중국 인터넷에는 무너진 건물에 매몰된 주검과 부러진 팔·다리 등 끔찍했던 사고 순간을 말해주는 수많은 사진들이 떠돌고 있다. ■ 대륙과 바다까지 흔들려 이날 강진의 여파는 베이징과 상하이의 건물까지 흔들었다. 간쑤성과 칭하이성, 후난성, 후베이성, 산시성, 산둥성에서도 진동이 느껴졌다. 미국지질학연구소는 원촨현에서 첫번째 지진이 발생한 뒤 몇 시간 동안, 인근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4.0~6.0 정도의 여진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지진이 일어나자 청두에선 고층건물에 있던 주민들이 건물 밖으로 황급히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중앙텔레비전(CCTV)은 주민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청두 시내를 보여주며, 수도관이 파열되는 등 피해가 잇따랐다고 전했다. 지진이 강타한 중국 남서부에선 통신 두절 사태가 발생했다. 차이나텔레콤 관계자는 티베트 자치구인 쓰촨성 아바의 네 현에서 지역내 유선전화 서비스가 두절됐으며, 간쑤성 다섯 현에서도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거리 통신망은 손상을 입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베이징에선 지진이 일어나고 7분 뒤, 리히터 규모 3.9의 여진까지 겹쳐 혼란이 커졌다. 창안제 등 주요 도로는 건물에서 황급히 뛰어나온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왕징에 사는 한국인 성아무개(43)씨는 “화장실에 있는데 갑자기 바닥이 출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흔들림이 10초 가량 이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이징에선 아직까지 인명피해가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신화통신은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은 지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전했다. 창장(장강)에 들어선 세계 최대 규모의 싼샤댐도 눈에 띄는 피해를 보진 않았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바다 건너 하이난섬을 비롯해 타이와 대만, 베트남에서도 진동이 느껴졌다. 홍콩 천문대는 홍콩에서도 트럭이 옆을 지나갈 때 느끼는 정도의 진동이 감지됐다고 밝혔다. 이 바람에 홍콩에서 청두로 향하는 항공편 3편이 취소되는 등 하늘길도 곤욕을 치렀다. 파리에서 홍콩으로 향하는 항공편 기착지가 베이징으로 변경되는 등 국제선도 피해를 봤다. 미국지질학연구소(USGS)의 브루스 프레스그레이브는 이번 지진이 규모가 크고 진앙지가 얕은데다, 인구 밀집 지역과 근접해 있어 “대단히 위험한 것”이라고 밝혔다고 시엔엔(CNN) 방송이 보도했다. 유엔과 유럽연합(EU)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세계재난감시시스템(GDAC)은 이번 지진이 인구 1천만명에 이르는 청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게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고 밝혔다. ■ 중국 피해 복구 총력 중국 정부는 지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후진타오 주석은 “피해자들을 구하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고 관계 당국에 지시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사태 수습을 위해 급히 비행기편으로 청두로 내려갔다가 바로 원촨현으로 향했다. 인민해방군은 인명 구조와 피해 복구를 위해 현장에 지원병력을 파견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당국은 이날 지진이 발생하자 재난경계경보 중 2급을 발령했다. 중국의 재난경보는 4단계로 구분되는데 2급은 두번째로 심각한 경우에 해당한다. 중국 재난당국은 184명으로 구성된 긴급구호팀을 이날 밤 최대 피해지역인 원촨현으로 급파됐다. 구호팀은 군 병원 관계자 22명을 비롯한 의료진과 군인들로 편성돼 있다. 하지만 쓰촨성 일대에 14일 오전까지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돼, 구조작업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수십년에 걸쳐 중국에서 발생한 지진 가운데 규모와 피해가 가장 컸던 경우는 1976년 7월 허베이성 탕산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알려졌다. 흔히 ‘탕산 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지진으로 적어도 24만여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이정애 기자 moon@hani.co.kr target=_blank http://go.daum.net/bin/go.cgi?relative=1url=/Mail-bin/login_f.cgi%3Ferror%3Dlogin%26lu%3D/Mail-bin/send_mail.form.cgi%3FTO%3Dmoon@hani.co.kr /한겨레 2008-05-13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287275.html

2008 - Conference, Telecom Africa 2008 ITU, Egypt, 12-15 May 2008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2009.asp 2007 - 국내 한정식집 원조 장원 여주인 주정순씨 별세 한국 한정식집의 원조 격인 서울 종로구 필운동 ‘장원(莊園)’의 주인 주정순(朱貞順· 86)씨가 1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유족으론 국내 금융시장에서 MA(기업 인수·합병)와 펀드투자 전문가로 이름난 아들 이재우(50) 보고펀드 공동대표, 딸 수정(54·현 장원 대표), 윤미(48·미국거주)씨가 있다. 광주 태생으로 목포 부잣집에 시집가 음식 솜씨를 익힌 주씨는 서른둘이던 1953년 광주에서 처음 장원을 열었다. 이후 서울로 이전 개업하면서 정·관계 실력자들이 모여들어, 금세 장안의 명소가 됐 다. 내부 구조가 복잡하고 입구가 여럿으로 손님끼리 마주칠 일이 적어, 정치인들 ‘비밀 모임’에도 적합했다. /조선 2007 - 보복폭행 혐의 김승연 한화회장 구속, 수감 아들을 때린 술집 종업원들을 보복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화 그룹 김승연(55) 회장이 12일 새벽 구속, 수감됐다. 재벌 총수가 폭행혐의로 구속된 것은 처음이다. 서울중앙지법은 11일 밤 11시쯤 김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김 회장은 자정을 넘겨 서울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김 회장은 지난 3월 8일 자신의 아들과 몸싸움을 했던 서울 북창동 S유흥주점 종업원 4명을 경기도 성남시 청계산 인근 신축 건물 공사장에 감금한 뒤 쇠파이프 등으로 폭행하고, S유흥주점에 찾아가 다른 종업원 2명을 손과 발로 폭행한 혐의다. 김 회장 구속은 사건 발생 64일만이다. /조선 2007 - 한국 화물선 골든로즈호, 중국 해역서 침몰 16명 실종 12일 오전 4시5분쯤(한국시각) 중국 다롄(大連) 남동쪽 38마일 해상에서 제주 선적 화물선 골든로즈호(3849t급)가 중국 컨테이너선 진성호(4822t급)와 충돌한 뒤 침몰했다. 골든로즈호에는 선장 허용윤(58)씨를 비롯, 한국인 선원 7명과 미얀마인 선원 8명, 인도네시아인 선원 1명 등 모두 16명이 타고 있었으나, 모두 실종됐다. /조선 2003 -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 연속 4차 폭발사건 발생

전문가는 1998년 주 동아프리카 미국대사관 폭발 및 911테러습격 수단과 일치하다고 하면서 치밀히 획책한 테러활동이라고 인정. /중국국제방송

남녀 사이의 현대적 애정 모 럴을 추구, 한국문단에 새로 운 장을 열어 보인 작가 강 신재. /조선 2001 - 여류 문학가 강신재 별세 여류문학가 강신재씨가 2001년 5월 12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였다. 그는 6·25 전쟁 이후 한국문단에서 남녀 사이의 현대적 애정 모럴을 추구, 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어 보인 여성 작가였다. 특히 1960년작 `젊은 느티나무`는 계부의 아들인 이복 오빠와 손아래 누이가 가족 아닌 순수한 남녀 사이로 돌아가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섬세하고 리얼한 필치로 그려내 당시 독서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40년 전 이 작품은 월간 `사상계`에 전격 발표되면서, 본연한 인간성과 순수한 경지를 추구하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경기고녀(현 경기여고)와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1949년 등단한 강씨는 `임진강의 민들레`, `명성황후`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중앙문화대상(1984) 등을 수상했다. 1960년대 말부터 한국문인협회 PEN 이사, 여류문학인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83년부터 예술원 정회원으로 활동했다. /조선

2001- 소련의 항공기 설계가 투폴레프(Tupolev, Alexei) 사망

투폴레프 [Tupolev, Alexei Andreyevich , 1925.5.20~2001.5.12]

Alexei Andreyevich Tupolev (May 20, 1925 ? May 12, 2001) was a Soviet aircraft designer who led the development of the first supersonic passenger jet, the Tupolev Tu-144 . He also helped design the Buran space shuttle and the Tu-2000 , which has been suspended because of the lack of funds.

Tupolev was the son of famed Soviet aircraft pioneer, Andrei Tupolev . He graduated from the Moscow Aviation Institute in 1949 and began working with his father at the Tupolev Design Bureau. He became chief designer in 1963 and general designer in 1973.

http://en.wikipedia.org/wiki/Alexei_Tupolev

1963년 그의(A.N.투폴레프의) 아들 알렉세이는 TU-144 초음속 수송기 제작 팀의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모스크바와 중앙 아시아 또는 극동간의 비행시간을 단축시키고자 여러 실험을 한 결과 1969년 TU-144가 시험비행에서 음속벽을 돌파했고 1년 후 음속의 2배에 달하는 속도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설계상의 문제와 부실한 관리로 1970년대의 제트 여객기로서 짧은 수명을 누렸다. 안드레이 투폴로프가 죽은 후 알렉세이 투폴레프가 설계부서의 부장이 되었다. 그는 1970, 1980년대의 가변익(可變翼) 항공기인 중항속거리 TU-26과 TU-160(초음속 항공기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의 제작을 감독했다. (투폴레프) /브리태니커

1998 - 거평그룹 부도

3000여명의 인도네시아 대학

생들이 자카르타 의회 앞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조선

1998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유혈시위 발생

인도네시아 시위소요사태가 드디어 수도 자카르타를 강습,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경제 및 물가난에 의해 1998년 1월부터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시위소요상황이 최정점을 향해 급상승한 것이다. 잠시 소강 상태를 보였던 대학생 시위가 1998년 5월 12일 자카르타 트리삭티 대학에서 학생 6명이 사망하면서 성난 파도로 바뀌었다.

시위대들은 이날 수하르토의 하야를 외치며 정면 돌파를 시도하다, 군경이 발사한 플라스틱 탄에 맞아 하나둘씩 흩어졌다. 목격자들은 이 중 2명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고 밝혔으나, 인근 숨베르 와라스 병원 관계자는 모두 6명이 사망했다고 확인했다. 이번 사태로 대학생과 자카르타 시민 등 수천명은 유혈사태에 흥분, 트리삭티 대학 주변에서 상점과 주유소 은행 경찰차량을 불태우는 등 시위사태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빠져들었다.

결국 수하르토의 사임 발표로 자카르타 유혈사태는 마무리 됐고,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자신들의 민주화 요구가 정당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조선

조명재 LG생활건강부문 사장과 영

국 스미스클라인 비참社의 하우슨

수석부사장과 `퀴놀론계항생제`의

전략적 기술제휴에 관한 계약서에

사인한 뒤 악수하고 있다. /조선

1997 - LG화학, 차세대 `퀴놀론계 항생제`개발

LG화학이 탁월한 효능을 지닌 차세대 `퀴놀론계 항생제(LB20304a)` 개발에 성공했다. 이 항생제 개발로 1997년 5월 12일 세계적인 다국적 제약회사인 영국 스미스클라인 비참사에 3천7백75만달러(3백40억원)의 기술 수출료와 2000년 상품화 이후 매년 3백억원씩 20년간 총6천억원의 로열티를 조건으로 기술제휴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이 항생제는 호흡기와 요로감염증, 피부감염증에 탁월한 효능이 입증됐다. 회사측은 이 신약을 5년간의 연구끝에 개발하여 국제적인 전문 시험용역회사인 영국 코반스사의 비임상 동물실험과 1단계 임상실험을 거쳤다고 밝혔다. LG화학의 신약 개발은 독자 연구개발은 거의 없고 원료를 외국에서 들여와 포장해 파는 국내 제약사들에게 제약시장이 얼마나 큰 성장 가능성이 있는지를 시사했다. /조선

팩티브 [Factive]

한국의 LG생명과학이 개발해 2003년 4월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퀴놀론계 항균제(항생제).

생명과학 전문회사인 LG생명과학이 1991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2001년과 2002년에 각각 뉴질랜드와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신약 승인을 받은 뒤, 2003년 4월 5일 국내 신약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승인받은 퀴놀론계 항균제이다. 한국의 신약이 FDA의 승인을 받은 것은 한국 최초의 제약회사인 동화약품공업(주)이 1897년(고종 34) 의약품을 생산한 지 106년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국제적 공인을 위해 40여 개국 1,500개 병원에서 임상시험을 거쳤다. 개발과 임상시험 등에는 총 2,800여 억 원이 들었다.

만성 기관지염과 폐렴 등 호흡기 질환자들에게 사용되는 퀴놀론계 항균제로, 기존에 널리 사용되어 온 페니실린계 항균제보다 약효가 뛰어나고, 내성을 가진 균주에 특히 효과가 있다. 구조는 기존의 퀴놀론계 항균제인 시프로플록사신을 변형시킨 독창적 화합물인 옥심(oxime)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경증·중증 폐렴과 만성 호흡기 질환의 급성 악화 환자들에게 쓰이는 새로운 치료제이며, 항균 효과가 빨라 치료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투여도 모든 증상에 1일 1회만 투여하면 되기 때문에 판매 로열티 및 원제 공급 등을 통해 해외에서 올릴 수 있는 연간 수익만도 800억 원 정도로 추정된다. 국내에서는 2003년 7월부터 판매된다. /naver (2000/06/07 - 이달의과학기술자상홍창용박사선정 - 퀴놀론계항생제개발)

한국과학재단과서울경제신문사가공동으로주관하는이달의과학기술자상6월수상자로LG화학기술연구원홍창용(42)박사가선정되어6월7일과학기술부회의실에서서정욱과학기술부장관및수상자부부등관계인사참석한가운데시상식이열렸다.

홍창용박사는연구소내보배로통한다.홍박사가개발해낸항생제퀴놀론계항생제Factive(Gemiloxacin)가황금알을낳기시작했기때문이다.다국적제약사스미스클라인비첨(SKB)사에개발권을매각한항생제가미국,유럽등전세계40여개국의나라에서9천명이상의환자를대상으로임상시험을모두성공적으로끝마치고,지난해12월한국최초로미국FDA에신약발매허가신청완료하고현재는발매승인을기다리고있는상태다.

항생제는크게페니실린계,세파계,마크로라이드계그리고퀴놀론계의네가지범주로구별된다.지금까지수십년동안주로페니실린계,세파계,마크로라이드계항생제들이쓰여왔으나,최근많은원인균들이이들항생제에대해내성을획득해기존항생제로는치료가어려워짐에따라항균력이더욱우수한항생제의개발이필요한상황이다.따라서기존의항생제보다부작용이적으면서도내성균을포함하는원인균들에대해약효가뛰어난퀴놀론계가항생제시장을급속히대체할것으로전망된다.

LG화학기술연구원에서는1990년1월,기존제품인사이프로플록사신의공정개선을목적으로퀴놀론계항생제프로젝트를시작했다.그뒤국내에물질특허가도입되고신물질,신의약이절실히요구되어1991년신규퀴놀론계항생제프로젝트가시작되었다고한다.퀴놀론계항생제는최근가장빠른속도로그시장이성장하고있으나,약효가그람음성균으로만제한되어있었기때문에,주로그람양성균에의해발생하는감염에는별로쓰이지못했다.따라서홍박사연구팀은가장큰시장인호흡기감염을치료할수있는그람양성균에대해서도효과를갖는신약개발에주목하기시작했다.홍박사의퀴놀론계항생제는키프로플록사신(Ciprofloxacin)이라는널리알려진물질에서출발했다.효능은높지만,독성이심해모든과학자들이포기했던이물질을홍박사는옥심이라는독특한5각형구조를부가,마침내그람양성균,음성균에모두탁월한약효를갖춘새로운퀴놀론계항생제Factive를발굴하는데성공했다.

Factive의주요적응증은폐렴,기관지염,급성부비강염등호흡기감염이며,기존제품이지니고있던중추신경계,심장순환계에대한부작용을해소해안전성이현저히높고,1일1회만복용해도약효가지속되어1일3회복용하던불편을감소시켜상품화의모든조건을갖추고있다.특히기존항생제에내성을가진균주에대해서도시험관내에서최고수백배이상의우수한약효를보여내성균을퇴치할수있는명실공히차세대항생제임이증명되기도했다.

2000년도하반기에는Fative가미FDA의승인을받아세계적으로상품화될것이확실시되고있으며,따라서특허보호기간인2020년까지20년동안전세계에독점적으로판매되어,로열티및원료독점공급등으로매년적어도700억원이상,모두1조5천억원이상의순이익이예상되는등엄청난경제적가치를창출할것으로보인다. 한국과학재단 과학포상DB /Google 1997 - 중국 동방홍3호 통신위성 발사 성공 /중국국제방송 중국의 우주산업 또한 놀랄만한 발전을 이룩하여 이미 완전한 연구, 설계, 제작, 실험 및 생산체계를 갖추고 있다. 중국은 현재 각종 탑재 로케트를 제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유형의 인공위성을 제작 및 발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주로 탑재로케트 및 위성탐사망의 우주탐사체계의 우주탐사 체계를 건립하였다. 현재 중국의 위성 회수기술과 발사대 하나로 여러 개의 위성을 발사하는 기술, 위성 탐사기술, 고성능 저온 연료 로케트 기술 등은 세계의 선진대열에 진입하였으며, 근거리 궤도의 회수식 원격탐지 위성과 지구궤도의 통신위성, 태양궤도의 기상위성은 외국위성의 발사 및 탐사임무를 관찰하여 통제할 만한 조건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1997년 중국은 장정계열의 탑재 로케트로 통신위성인 “동방홍 3호”와 기상위성인 “풍운 2호”, 필리핀의 마부하이 위성, “아시아 태평양 2호” 위성, 미국 모토로라 회사의 두개의 이리듐 위성을 쏘아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segero.hufs.ac.kr /Google

에릭 에릭슨 /조선

1994 - 독일 출생의 미국 정신분석학자 에릭슨(Erikson, Erik Homburger, 1902~1994) 사망

프로이트 심리학 이론을 청년기와 성년기에 적용시킨 정신분석학자로 `정체성 위기`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던 에릭 에릭슨이 1994년 5월 12일 미국 일 하리치의 한 양로원에서 9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0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난 에릭 에릭슨은 정규대학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한때 화가를 지망하며 유럽을 방랑했으나 빈의 정신분석원에서 만난 안나 프로이트에게서 정신분석학 훈련을 받았다. 31세에 미국으로 이주, 미국 각지에서 임상연구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정신분석학 체계를 잡아갔다. 비록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예일 버클리 하버드 등의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쳐 20세기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자아의 성장에 초점을 둔 에릭슨의 이론은 흔히 `자아 심리학`으로 불리운다.

프로이트에게서 배웠지만 그의 이론은 프로이트와 몇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에릭슨은 인간행동의 기초로서 이드보다는 자아를 더 강조했다. 그는 프로이트와 달리 자아를 성격의 자율적 구조로 간주했다. 주요저서로는 발달의 사회성을 주창하는 `유아기와 사회`(1950) `정체성과 생활주기`(1959), 개인생활사와 역사의 만남을 예증하는 `청년 루터`(1958) `간디의 진리`(1969) 등이 있다. /조선

1992 - 중국-슬로베니아공화국 수교 /중국국제방송

1991 - 네팔,32년만에자유총선실시 /tgedu

1990 - 청소년헌장 선포

1990 - 청소년헌장 발표

1990- 현대,대북한무상공여위해중장비와승용차를일본으로반출

1985- 프랑스화가뒤뷔페(Dubuffet, Jean) 사망

뒤뷔페 [Dubuffet, Jean-Philippe-Arthur, 1901.7.31~1985.5.12] M.타피에에 의하여 앵포르멜 미술의 선구자 로 간주된다. 1918년 파리로 나와 단기간에 그림을 배우고, 주로 독학을 했다. 생활을 위해 한때 그림을 포기한 적이 있으나 1942년부터는 그림에 전념했다. 작품은 타르 ·모래 ·유리 등 여러 종류의 정크(폐물)의 집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소재의 직접성이 박력 있는 묵직한 마티에르 를 낳는다. 거기에 형성된 인간의 얼굴이나 모양에는 낙서나 어린이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P.클레적(的)인 소박한 선의 자유스러움이 살아 있다. 1948년 아르 브뤼(생경한 예술)라는 이름 밑에 주로 정신병 환자의 작품을 많이 수집하였다. /naver

지혜로운미술이라니,얼마나어리석은생각인가!

미술이란도취와광기만으로이루어진것이다.

나는본능/열정/변덕/폭력/착란등원시적인것을높게평가한다.

- 장 뒤뷔페

1984 - 교육부 고교국어 문법 통일안 마련

1981 - 검찰 우편진술제 실시

1975 - 캄보디아 미국 상선 `마야구에스`호 나포

1974 - 이탈리아 국민투표로 이혼법존속 결정

1972- 미국뉴욕타임즈의솔즈베리와엠리기자,북한방문 /tgedu

1971 - 비스마르크 독일 수상 취임

1970 - 한국등반대 히말라야 `추렌히말`봉 정복

1966 - 히피 패션 런던 상륙(1966)

1966년 오늘,

영국 런던의 카나비(Carnaby) 거리!

미국에서 건너온 이른바 히피 패션이 이곳 런던 패션의 진원지에 상륙했다.

길고 굽슬굽슬한 머리에 인디언풍의 머리띠, 꽃무늬 셔츠, 바지 끝이 넓게 펴지는 판탈롱, 프릴이 장식된 블라우스 차림에서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관습에 대한 히피족 특유의 반항 의식이 엿보인다.

비틀스의 음악에 열광하던 히피족 패션은 196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동해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등 유럽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YTN

1965- 미국-영국-프랑스,독일재통일에관한공동선언발표 /tgedu

1965 - 서독,이스라엘과외교관계수립,아랍10개국은반발하여서독과단교

1965 - 서독, 이스라엘 외교관계 수립

1964 - 대한상공회의서 상공인의 날 제정 첫 실시

1964 - 서울 시내버스 총파업

1963 - 미국 앨라배머주서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운동 격화

1962년 5월 12일 남산

의 새 명물로 등장한 남

산 케이블카. 이름은 삭

도차(索道車-a cable

car)였다./조선

1962 - 남산 케이블카 개통(1962)

1962년 오늘!

남산 케이블카가 개통됐다.

우리 나라에 처음 등장한 여객용 케이블카다.

개통 당시 탑승 정원 31명!

회현동 승강장에서 남산 팔각정까지 605미터 거리를 이동하는 데 4분 정도 걸렸다.

남산케이블카는 낮에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관을, 밤에는 빌딩과 자동차, 가로등이 자아내는 야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어 등장하자마자 서울의 관광명물로 떠올랐다.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 등 관광객들이 케이블카를 타러 새벽부터 줄을 설 정도였다.

남산 케이블카는 개통 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운행한 국내 최장수 케이블카가 됐다. /YTN

1962 - 남산 케이블카 개통

1962년 5월 12일 서울남산에 우리나라 최초 여객삭도(索道ㆍa cable car)인 남산 케이블카 ‘은하수’와 ‘무지개’가 개통됐다. 남산 케이블카는 이날 개통된 후 하루도 쉬지 않고 운행돼 국내 최장수 케이블카로 서울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한국삭도공업주식회사가 1961년 9월에 착공해 당시 2억9천여만환을 들여 준공됐다. 남산 케이블카는 그 운행거리가 회현동 승강장에서 남산 꼭대기에 있는 예장동 승강장까지 약 600m 이며 평균 초속 3.2m로 운행, 편도 운행 시간은 약 3분 정도이다. 지상과의 고저차는 약 138m로 올라가는 것과 본관 승강장을 향해 내려오는 것 두 대가 동시에 운행되며 이 두 대의 케이블카는 중간지점에서 정확히 마주쳐 지나가도록 설계됐다. 케이블카의 수용 정원은 38명으로, 개통 후 이틀 후인 5월 14일 운행을 시작해 오전 10시에서 오후 11시까지 연중무휴로 운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삭도 산업의 선두주자로 제 몫을 해온 남산 케이블카이지만, 지난 2002년 7월 7일 상하행선 2대가 갑자기 멈춰서는 사고가 발생, 60여명의 탑승객들이 지상 40~50m 상공에 매달려 있다 1시간여 만에 구조되기도 했다. /조선

최우수극영화상을 수상한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한 장면. /조선

1962 - 제9회 아시아영화제 개막(1962)

제9회 아시아영화제가 1962년 오늘 서울에서 8박9일 동안의 일정으로 개막됐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국제영화제다.

신상옥 감독의 작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최우수작품상을 차지했다.

우리 나라는 다른 여러 부문의 상도 석권해 국산 영화를 해외로 수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시아영화제는 1954년 일본의 제창에 의해 처음

동남아시아영화제라는 이름으로 도쿄에서 발족했다.

1957년 제4회부터 아시아영화제로 개칭했는데

이 때부터 우리 한국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1982년 제27회부터는 아시아·태평양영화제로 명칭이 바뀌어 개최되고 있다. /YTN

1962 - 제9회 아시아영화제 개최

제9회 아시아영화제가 1962년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이번 영화제에는 한국을 비롯 일본, 대반, 홍콩, 싱가폴 등 6개국에서 극영화21편, 기록영화 15편을 출품했다. 극영화부문에서는 한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일본의 `위를 보고 걸어라` 대만의 `태풍` 등이 대상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모윤숙 영화제심사위원장은 3일부터 출품작을 심사해서 한나라에서 한작품씩 뽑아 5월 13일부터 15일까지 시민회관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16일 저녁 7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내외와 많은 영화인이 모여 폐회식을 열고 우수작품에 시상을 했다. 22개 부문 상 가운데서 한국은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차지한 최우수극영화상을 비롯해, 7개 부문 상을 받았다. 일본은 8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고 기록영화 최우수작은 싱가폴이 차지했다. /조선

1962 - 케네디 미국 대통령 라오스정세에 대응 7함대 출동명령

1961- 사모아,독립선포 /tgedu

1958 - 중국 첫 중국산 승용차 제조 성공

중국 제1자동차제조공장에서 동풍표 국산 승용차를 성공적으로 제조. 무게가 1.23톤, 최대공율이 70마력, 최대시속이 128킬로미터임. /중국국제방송

1957- 세종대왕기념사업회발족 /tgedu

1956 - 한국 첫 텔레비전방송 개국(1956)

1956년 오늘!

우리 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인 HLKZ-TV가 발족했다.

한국의 첫 상업방송이기도 한 HLKZ는 아시아에서 네 번째, 세계에서는 열다섯 번째로 TV전파를 발사했다.

카메라 2대로 출발한 HLKZ는 출력 0.1kW에 9번 채널로 하루 2시간씩 방송했다.

이때 시중에 설치된 TV수상기는 250여 대!

서울 시내 주요 상점 앞에 설치돼 행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이 방송은 적자운영으로 운영권이

한국일보에 넘어가면서 개국 이듬해인 1957년 5월 6일 이름이 대한방송으로 바뀌었다.

1959년 2월에 불이 나 모든 방송시설이 불타고 1961년 문을 닫았다.

그 뒤를 이어 1961년 12월 31일 서울텔레비전방송국이 개국했다. /YTN

1956 - 국내 최초 TV방송국 HLKZ-TV 개국. 시험방송

1956년 5월 12일 한국최초로 HLKZ-TV가 개국했다. 호출부호는 HLKZ-TV이지만 미국 RCA사와 RCA한국 배급사가 합작으로 방송국을 설립했기 때문에 정식명칭은 KORCAD-TV이다.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선 필리핀, 일본, 태국에 이어 4번째였다. 방송 당시에는 출력이 겨우 0.1kW에 불과해 수신지역이 좁고 텔레비전 수상기값도 엄청나 전국을 통틀어 수상기 보급이 겨우 3백대에 불과했다. 첫 프로그램은 만파정식지곡과 수제천의 아악연주, 이어서 민속무용단의 승무와 백설희 현인 장세정 등 인기가수가 대거 출연한 쇼무대를 2시간동안 내보냈다. 세종로 네거리와 서울역 등에 설치된 40여대의 대형수상기를 통해 이날 TV를 처음 접한 시민들은 한결같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시험방송을 거친후 6월 1일부터 격일로 밤8시부터 2시간씩 방송하다가 11월부터 금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저녁 2시간씩 방송했다. /KBS

1956 - 우리나라 최초의 TV광고 시작

1956년 5월12일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방송이자 텔레비전 방송인 HLKZ-TV가 개국했다. 개국 당일 방송에는 이기붕 당시 민의원 의장이 축사를 한 개국식이 있었고 이어 제2부로 영창산업(영창악기의 전신)의 유니버설 레코오드 아워라는 버라이어티쇼가 이어졌다. 이 쇼 프로그램에서 최고의 전통,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유니버어설의 깨지지 않는 레코드가 나왔습니다라는 광고(제작은 당시 영창산업의 광고 담당인 최덕수)가 방송됐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TV광고이다. 이 광고의 특징은 당시 유행하던 춤바람을 반영, 남녀가 레코드 위에서 춤을 춰도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현했다. / 조선

1956 - 한국 최초 TV 방송국 개국

1956년 5월12일 한국 최초의 상업 텔레비전 방송국(HLKZ)이 개국했다. HLKZ는 미국의 아메리카라디오방송(RCA)과 제휴해 세운 출력 0.1kW의 소규모 방송국이었다. 이후 1961년 한국방송공사의 텔레비전 방송국이 개국되면서 텔레비전 방송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어 동양방송주식회사(TBC)와 문화방송(MBC)이 텔레비전 방송국을 설치함으로써 3대 텔레비전 네트워크 시대가 시작되었다. 1980년에는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었다. 미국(1951)과 일본(1960)에 비해 상당히 늦었지만, 컬러 방송을 시작한 지 불과 7년 만에 컬러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대수가 1,000만 대를 넘어서는 등 빠르게 자리잡으면서 방송 발전에 기여했다. /브리태니커

1956 - 19시 30분 황태영 이 설립한 KORCAD ( 코캐드 )방송국이 대한민국 최초, 세계15번째, 아시아 4번째로 TV 를 방영하다 /위키백과

HLKZ-TV(KORCAD-TV)

HLKZ-TV는 대한민국 최초의 TV 방송국으로써, 한국 RCA (KORCAD)가 1956년 10월에 설립하었으며,KORCAD-TV라고도 불렸다. 한국 TV방송의 최초라는 명예만 지닌 채 1961년 10월 15일 에 방송을 중단하고 권리를 KBS 로 넘겼다. 사옥 은 서울 종로구 관철동 동일빌딩에 있었다.

화재로 사옥 내의 모든 방송 장비가 소실된 까닭에 1961년 10월 15일을 기하여 방송을 중단 또한 그 당시에 수상기 보급률의 저조, 주 수익인 TV 광고에 대한 인식 부족, 협소한 광고시장등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약력

- 1956년 5월 12일 개국식과 동시에, 시험방송을 하였으며, 호출부호 HLKZ-TV, 영상 출력 100W, 채널 9로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는 세계에서 15번째의 TV 방송국이었으며 아시아 에서는 일본 , 태국 , 필리핀 에 이어 4번째였다.

- 1957년 5월 12일 운영난으로 5월 한미 합작으로 설립된 대한방송주식회사(DBC)가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 1959년 2월 2일 새벽에 원인을 모를 화재로 사옥 내의 모든 방송 장비가 소실되었다. 이로 인해 방송이 중단되었다.

- 1959년 3월 1일 미군방송인 AFKN-TV 와 USIS 의 지원으로, 매일밤 30분씩 AFKN-TV의 채널을 통해 방송이 송출되었다.

- 1961년 10월 15일 한국 TV방송의 최초라는 명예만 지닌 채 1961년 10월 15일 에 방송을 중단하였다.

/위키백과

1951 - 국민방위군 해체

1951- 국민방위군설치법폐지법률공포

1951 - 첫 수소탄 폭발실험 성공 /중국국제방송

서베를린 공항에 착륙하는 미국 물

자 수송기 /조선

1949 - 소비에트 연방 이 베를린 봉쇄 를 풀다. /위키백과

1949 - 소련, `베를린 봉쇄` 322일 만에 해제

소련이 베를린과 서방측을 연결하는 모든 교통로를 봉쇄했던 이른바 ‘베를린 봉쇄’가 1949년 5월 12일 해제됐다. 1948년 6월 24일 봉쇄 이후 322일 만이었다.

2차대전 후 독일은 미·영·불·소 4개국에 의해 분할점령됐으나 소련 점령지역 내에 있는 베를린만이 공동관리하에 있었다. 베를린 봉쇄는 미·영·불 서방 3개국이 자신의 점령지역을 통합해 단일 경제공동체로 하고 베를린을 포함한 통합 전 지역에 새로운 통화인 마르크화(貨)를 유통시키기로 한 것이 빌미가 됐다.

소련은 보복에 나서 육로·철로·수로를 봉쇄하고 식량수송까지 금지했다. 연합국은 250만 베를린 시민들을 돕기 위해 항공기를 이용한 식량·연료·의약품 공수작전으로 맞대응했다. 소련이 베를린 4개국 공동관리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베를린의 독점적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긴장도 더욱 고조됐다. 그러나 미국의 방침은 정면대응이었다. 공수는 예정대로 진행됐고 항공기가 3분마다 떴다. 수송 횟수만 약 20여만회, 공수물자도 약 232만t에 달했다. 봉쇄가 장기화하면서 식량은 배급제로 됐다. 전력소비도 제한됐으며 공장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어느덧 동독 주둔 소련군은 40개 사단으로 증가했고, 미군은 원폭 탑재기를 영국에 배치했다. 다행히 양측의 자제로 무력충돌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독일의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다. /조선

베를린봉쇄[ Berlin Blockade]

동서간의 긴장격화의 과정에서 1948년 6월 24일부터 49년 5월 12일까지, 동독(당시 소련 점령지구) 영내에 있는 서베를린과 서독(당시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구) 사이의 교통에 대하여 소련당국이 실시한 교통봉쇄조치. 그 계기가 된 것은 서독지역에서의 통화개혁(1948년 6월 30일 실시)이었다. 서방측 3개국이 통화개혁을 서베를린에도 확대하자, 소련은 이에 대항하여 48년 6월 24일 소련 점령지구 내에서 독자적인 통화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육상의 교통·수송을 전면적으로 봉쇄하였다. 이에 서방 3개국은 즉각 서베를린에 대한 물자공급을 위해 대규모의 공수를 개시하였다. 그 연비행회수는 27만 7728회, 공수한 물자는 총량 234만 3300t에 달하였다. 한편 서방 3개국은 <역봉쇄>, 즉 서베를린과 동독 사이 및 동독과 서독 사이의 통상·교통의 제한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48년 7월 말부터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서방3개국과 소련의 교섭이 진전되지 않아, 9월 이후 문제 해결의 무대는 국제연합으로 옮겨졌다. 난항을 거듭하였으나, 49년 2월 미·소 대표회담이 열렸고 5월 4일 베를린봉쇄해제에 관한 미국·영국·소련·프랑스 4개국협정이 성립하여 베를린봉쇄문제는 11개월 만에 해결되었다. okchon-girl.ms.kr /Google

베를린 봉쇄와 공수

1948-06-24 소련, 서베를린 육로 봉쇄

1948-06-26 미국-영국 베를린 공수 시작

1949-05-04 소련, 베를린 봉쇄 해제에 동의

1949-05-12 베를린 봉쇄 해제

1949-09-30(10-31?) 베를린 공수 종료

1949 - 중국 해방군 상해전역을 발동

1949년5월12일 해방군은 탕은백주력을 소멸하고 상해를 해방하기 위하여 상해전역을 벌림. 4월하순 해방군이 도강전역을 벌린 후 탕은백의 대부분 유생역량을 소멸. 나머지 25개사의 약 20만명은 오송지구에 퇴각하여 완고하게 저항. 해방군 제3야전군은 포동, 포서 두갈래로 나뉘어 오송지역에 접근하고 적의 퇴로를 막음. 해방군은 충분한 준비를 마치고 상해전역을 개시. 22일 해방군은 상해 외곽의 적들을 소멸하고 시내구역에 접근. 이날 저녁 총공격을 개시하고 부대는 신속히 시내구역과 다리, 오송구를 점령. 장개석은 형세가 불리함을 느끼고 탕은백의 엄호로 잔여병사 5만명을 이끌고 상해를 철거. 5월27일 소주하이북의 최후 장개석군대를 소멸. 상해전역 전부 결속. /중국국제방송

1945 - 최초의 스트렙토마이신 인체 실험 성공 /동아사이언스

1943 - 북아프리카 주둔 독일군, 이탈리아군에 항복 /조선 ???

1943 - 북아프리카 전선 독일군 항복(1943)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오늘, 독일군이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연합군에게 항복한다.

독일군은 몽고메리가 이끄는 영국군과 미국,호주 등 연합군의 협공에 밀려 퇴각하다 마침내 최종 교두보인 튀니지에서 무릎을 꿇게 됐다. 독일군은 1942년 10월 궁지에 몰린 이탈리아군을 구하기 위해 롬멜 장군의 지휘 아래 이집트의 알-알라메인으로 진격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다국적 연합군의 반격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했다.

’사막의 여우’로 이름난 롬멜 장군마저 히틀러의 명령으로 본국 독일로 복귀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독일군은 결국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YTN

1940 - 일본군 101호작전 실시, 중경을 공습

1940년5월12일부터 30일까지 일본군은 608대의 비행기를 출동하여 13차나 중경을 폭격, 도합 419톤의 폭탄을 던짐. 월초 일본대본영은 중국파견군에게 금일부터 공중진공작전을 실시한다고 지시. 지시를 받은 중국파견군은 즉시로 해군과 협력하여 중경을 폭격하도록 제3비행대에 명령. 집중적으로 중경을 폭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은 연합공습부대를 전문 편성. 5월13일 제3비행대와 연합공습부대는 육해군101호작전협정을 체결하고 각각 육군이 81대, 해군이 212대 비행기를 파견하여 적들의 항전의지를 여지없이 타격할 것을 결정. 5월19일 일본군은 화남에서 제14, 제15항공대를 이동시켜 연합공습부대에 편입시킴. 같은 날, 일본연합공습부대는 중국공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중경부근의 백시역비행장과 양산비행장을 습격하고 이어 성도, 온강, 남충, 의빈 등 지를 폭격. 5월20일 일본군 비행기는 폭격의 중점을 중경으로 돌리고 매일 2~3차 윤번으로 연일 폭격. 중경시는 포연이 자욱하고 시체가 널리며 사처가 폐허로 됨. /중국국제방송 kr1.chinabroadcast.cn

1939 - 영국 터어키 상호원조조약 조인

1936- 이탈리아,에티오피아합병 /tgedu

1936- 미국의화가스텔라출생

스텔라는각사각형을가느다란백색선으로뚜렷하게경계를그어분리시키는회화기법인하드엣쥐(예리한모서리)를작품그린카이로에적용하였다.그린카이로는유카탄반도에위치한 인디언거주지역의이름으로16세기에스페인정복자들이사각형피라미드건물을처음발견했던곳이다.

1936 - 사진미학의 이론을 정립한 영국의 사진가 에머슨 사망

1936 - 영국의 사진가 에머슨 사망

1935 - 폴란드 초대 대통령 피우수트스키 사망

1933 - 소련의 시인 보즈네센스키 출생

1929 -독립 나미비아의 초대 대통령 누조마 출생

1929 - 독립 나미비아의 초대 대통령 누조마(Nujoma,Sam) 출생

누조마 [Nujoma,Sam, 1929.5.12~]

1926- 조선박람회,서울서열림 /tgedu

1926- 영국의노동자총파업실패 /tgedu

1925 - 일제 한국서 치안유지법 공포 /조선

1925- 일제,치안유지법실시

1925 - 일본 제국 이 치안유지법 을 시행하다. 이 법은 해방 뒤 국가보안법 으로 이어진다. /위키백과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일본어 : 治安維持法(ちあんいじほう), 1925년 (다이쇼 14년) 법률 제46호)은 천황제 나 사유재산제 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제정된 일본의 법률이다.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의 혼란을 막기 위해 공포된 긴급칙령이 전신이다.

1925년 4월 12일 공포되어 동년 5월 12일 시행했다. 칙령에 의해 조선 , 타이완 , 사할린 에서도 시행되었다. 보통선거법 과 거의 동시에 제정되어 당근과 채찍의 관계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보통선거 실시에 의한 정치 운동의 활성화를 막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의 영향을 받아서 활발해진 일본내 공산주의운동을 억압하려고 했던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금지의 목적 외에도 사회주의 나 노동운동 역시 경계의 대상으로 여겨져 많은 활동가들과 운동가들이 치안유지법에 의한 탄압을 받았다.

이 법률의 첫 적용을 받은 건 조선 공산당 이었으며, 1930년대초,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일본공산당원 들이 우익(국가사회주의)으로 전향하는등 일본내 좌파 운동이 거의 궤멸당한 후로는 신흥 종교의 단속에 이용되기도 했으며,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는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에 악용되었다. 1925년 제정되었을 때는 최고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의 처벌이던 조항이, 1928년 개정되면서 최고 사형 까지 가능하도록 크게 강화되었다.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1년 3월 10일 , 그때까지 7조에 불과했던 법률 조항이 전면적으로 개정되면서 전 65조의 새로운 치안유지법(쇼와 16년 법률 제 54호)이 공포되어 동년 5월 15일 부터 시행되었다. 이에 의해 처벌은 더욱 강해졌으며 더불어 예방구금제도도 도입되었다.

종전 후 1945년 10월 4일 , 연합군 총사령부 의 인권지령 정치적, 공민적, 종교적 자유에 대한 제한의 제거에 대한 사령부 각서에 의해 폐지를 명령받아, 동년 10월 15일 쇼와20년 칙령 제 575호로 폐지되었다.

덧붙여서,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은 이 치안유지법을 모델로 했는데, 국가보안법과 치안유지법 모두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사상의 자유 와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데 악용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위키백과

1922 - 장작림 동삼성 독립선언

1921 - 독일의 전위 조각가, 행위미술가 보이스 출생

1919- 임정,파리강화회의에조선독립청원서제출

1919 - 임시정부의 김규식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조선

1919 - 임시정부의 김규식,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김규식은 5월 12일 탄원서 등을 윌슨 미국대통령, 로이드 조지 영국수상, 클레망소 강화회의 의장 등에게 파송, 호소력있는 내용으로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열강 고위층에 인식시켰다 . 이어 그는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만들어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과 주권국가로서의 한국의 상황을 호소력 있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해 8월 6일 외신기자 클럽에서 80여 명의 각국 각계 유력인사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뒤 강화회의를 취재하러 온 각국 신문 기자들과 각국 대표들을 대상으로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인식시키기 위한 외교를 벌였다. 이 연회에서는 프랑스 하원 부의장 샤알즈 르북(Charels Leboucq)이 사회를 맡았고, 프랑스 재건국장 빠예(General Payeur)장군, 러시아 참사관 군즈버그(Baron de Gunzburg)경, 프렌당(M. Frandin) 전권대사, 국회의원 마린(Louis Marin), 전 모스크바 시민의회의장 미노(Joseph Minor), 북경대학 교수 이유영, 파리주재 중국총여사 라오 등 8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규식은 한국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한국에 평화가 없으며 한국인은 독립을 원한다고 역설함으로 한국독립의 타당성과 일제침략의 흉계를 폭로, 각국 인사들로 하여금 일제의 악정과 잔인성을 인식케 하였다.

하지만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1월 28일 개막되어 5개월 만인 6월 28일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조인함으로써 폐막되는 동안 일제의 방해와 열강의 무관심으로 한국독립에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회를 마친 뒤 약 5개월 동안 파리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자유우방의 외국 유력인사에게 한국독립문제의 세계적인 인식제고와 한국독립의 타당성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장외의 성과를 얻었다. 이에 김규식은 한국공보국의 일을 이관용과 황기환에게 맡기고 8월 8일 여운홍, 김탕과 함께 미국으로 향하였다. (문명연지 제3권 제1호 2002년 1월 www.heejo.com/zerobd ) /Google

1918 - 간첩죄로 처형된 줄리어스 로젠버그(Rosenberg, Julius, 1918~1953)출생

1910 - 수리남의 초대 대통령(1975-1980) 페리에르 출생

1910 - X-선 회절로 비타민 B 12 결정 구조 규명해 1964년 노벨상을 수상한 도로시 호지킨 출생 /동아사이언스

1910 -영국의 화학자 호지킨 출생

1907 - 미국의 여배우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 출생 헵번 [Katharine Hepburn, 1907.5.12~2003.6.29]

미국의 여배우. 1909년 11월 8일 미국 코네티컷주 (州) 하트퍼드 에서 출생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여성운동가였다. 펜셀베니아 브린마워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녀는 19세부터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이혼청구서 A bill of porcement》로 영화에 데뷔하였다. 데뷔 초기에는 비극을 맡았으나, 《휴일 Holiday》(1938)이라는 희극영화에 성공한 이후 비극과 희극, 영화와 무대의 양쪽에서 독특한 허스키와 세련되고 유동적인 움직임으로 불가사의한 매력을 과시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도 중년과 노년의 연기자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그녀는 1928년 루드로우 오그덴 스미스(Ludlow Ogden Smith)와 결혼하였으나 6년뒤에 이혼하였고 이후에는 독신으로 살았다.

《 아침의 영광 Morning Glory》(1933) 《 초대받지 않은 손님 Guess whos coming dinner》(1967) 《겨울의 라이온 The Lion in Winter》(1968) 《 황금연못 On Golden Pond》(1981) 등으로 4번이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12번 아카데미상에노미네이트되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스토리 The Philadelphia Story》(1940)가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는다. 2003년 6월 29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naver

1905 - 한인이민자 1031명 멕시코의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

1905.4.04 - 멕시코 한인이민자 1033명 인천항 출발 1905.5.12 - 1031명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 1905.5.14 - 메리다 북쪽 35km 지점 프로그레소 항구에 도착

이한응 /브리태니커

1905 - 주 영국공사서리 이한응 런던서 자결(구한말 첫 순국)

1905 - 이한응 자결

1905년 5월 12일 런던 주재 외교관 이한응이 일본의 국권박탈에 죽음으로 항쟁하기 위해 음독 자결했다. 그의 자결은 국권박탈에 대한 최초의 자결로, 일제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에 불을 당겼다. 이한응은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런던에 부임했으며 다음해 서리공사가 되었다. 1904년 8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1905년 제2차 영일동맹을 맺으려는 영국과 일본 간의 비밀외교가 진행되자, 이한응은 침략적인 영일동맹 개정조약에 죽음으로써 항쟁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자결은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언론기관에 보도되었으며, 고종의 특명으로 시체를 국내로 옮겨 용인에 안장했다. /브리태니커

1905 - 문학평론가 이헌구 출생

1896 - 독립신문에언더우드의한영자전과일본인상회등최초의신문광고 /tgedu

1895 - 소설가 성해 이익상 출생

1895 - 열역학으로 1949년 노벨상을 수상한 윌리암 지오크 출생 /동아사이언스

연작교향곡 `나의 조국`

을 작곡한 스메타나./조선

1884 - 교향시 나의 조국 작곡가 스메타나 사망

1884 - 체코 작곡가 스메타나 사망

`체코 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가 1884년 5월 12일 사망했다. 이전 해 그는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프라하의 정신병원에 수용됐었다. 리스트는 스메타나는 진정한 천재였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스메타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억압 아래 있던 체코인들의 민족운동을 격려하면서 체코 민족 특유의 근대음악을 수립한 체코의 국민음악가였다.

4세에 4중주곡의 제1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에는 프라하로 와서 음악에의 열정을 불태웠다. 당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프로크슈의 지도를 받아 19세에 페라디난도 황제의 궁전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행동하는 음악가 스메타나는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통치하던 오스트리아의 압정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혁명군을 위한 `국민의용군 행진곡`과 `자유의 노래`를 만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74년 11월 청력을 잃어 보청기를 사용하면서 작곡한 연작교향곡 `나의 조국`은 그를 상징하는 곡이 됐다. 체코 전설속의 공주 리부셰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리부셰`도 1881년 체코 국립극장 개관기념으로 올려져 그를 국민음악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의 50세가 넘은 노쇠한 몸은 심한 인후두통으로 점차 시들어갔고 대화조차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마침내 1884년 5월 12일 죽음을 맞았다. /조선

1880 - 미국의 탐험가, 공학자, 과학자 엘즈워스 출생

1878 - 이탈리아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 본템펠리 출생

1872 - 영국의 여성 인권운동가 래스본(Rathbone, Eleanor) 출생 래스본 [Rathbone, Eleanor Florence, 1872.5.12~1946.1.2]

Eleanor Florence Rathbone (12 May 1872 ? 2 January 1946) was an Independent British Member of Parliament and long-term campaigner for womens rights. She was a member of the noted Rathbone family of Liverpool . Life http://en.wikipedia.org/wiki/Eleanor_Rathbone

1871 - 비스마르크 독일수상에 취임

1871- 비스마르크,독일총리에취임

1859 - 러시아의 소설가 악사코프 사망

1856 - 독일의 식물학자 심퍼 출생

1845 - 프랑스의 작곡가 포레 출생

1842 -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마스네 출생

1842 - 폴란드의 시인 코노프니츠카 출생

1828 - 영국의 화가, 시인 로제티 출생

1820 - 나이팅게일 출생

1820 - 첫 간호학교 설립자 나이팅게일 출생

1820 - 영국의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이 태어나다. /위키백과

1820- 영국의간호사나이팅게일(Nightingale, Florence)출생

나이팅게일 [Nightingale, Florence, 1820.5.12~1910.8.13]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12일 ~ 1910년 8월 13일)은 영국 의 간호사 , 작가 , 통계학자 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에서 윌리엄 에드워드와 프랜시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플로렌스라는 이름은 피렌체의 영어 지명이다. 플로렌스의 위에 언니 파시노프가 있었는데, 이 이름도 나폴리(파시노프의 출생지)의 그리스식 지명이다. 플로렌스는 잉글랜드 햄프셔 주 의 엠블리와 더비셔 주 의 리 허스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진보 지식인인 아버지와 가정교사에게 영어 , 프랑스어 , 라틴어 , 지리학등의 다양한 학문을 어릴때부터 익힐 수 있었다. 인도주의자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나이팅게일은 전쟁 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런던 타임스 신문 에서 읽은 뒤 자극받아, 집안의 명예실추를 우려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 에서 간호사 수업을 받았다. 크림 전쟁 ( 1854년 - 1856년 ) 당시 38명의 영국 성공회 수녀 들의 도움을 받으며 간호사 로 활동하였다. 1860년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현재 킹스 칼리지 런던 의 일부)를 설립하고 간호전문서적을 씀으로서 조선의 의녀 처럼 천대받던 직업인 간호사를 전문직업으로 성숙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이스트웰로에 매장되었고, 묘비에는 F.N. 1820년에서 1910년까지 생존이라고 간략히 기재되었다.이는 화려한 장례식 을 치르지말라는 나이팅게일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위키백과

나이팅게일은 간호를 여성의 전문직업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한 영국의 간호사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픈 이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1854년 크림 전쟁에 간호 책임자로 참전해 죽어가는 수많은 영국 군 부상병을 살려냈으며, 비위생적인 야전병원을 과감히 개선했다. 매일 밤 등불을 들고 직접 회진을 돌면서 환자들을 돌봐주는 등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나이팅게일을 병사들은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불렀다. 크림 전쟁 때의 활동은 훗날 뒤낭이 적십자사를 창설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전후 영국에 돌아와 간호학교를 세운 나이팅게일은 간호교육을 체계화하고, 새로운 형태의 간호사를 양성하는 등 현대 간호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영국 육군의 개혁을 비롯해 간호·공중위생 등을 내용으로 한 저서 약 200여 편을 남겼다. 박애 정신과 자기 개척의 의지로 오늘날까지 사랑의 천사, 백의의 천사로 불리고 있다. /브리태니커

나이팅게일 선서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등불을 든 여인이 서 있네

이땅의 위대한 역사 한가운데에

고귀한 미덕의 상징이며

영웅적인 여성이여.

- H. W. 롱펠로, 등불을 든 여인

보라,저기허술한집에어두운방에서방으로

램프를든젊은여인이천사와같이지나는것을.

고통에신음하는병사들은구원의꿈을보는것과같이

어스름한벽에비치는그그림자에입을맞춘다.

- 미국시인롱펠로우

1812 - 영국의 넌센스 시 작가, 풍경화가 리어 출생

1806 - 핀란드의 철학자, 정치가 스넬만 출생

1804 - 캐나다의 정치가 출생

1803 - 실용화학 창시자 유스투스 리비히 출생 1803 - 독일의 화학자 리비히(Liebig, Justus von)출생

1803 - 리비히 [Liebig, Justus von, 1803.5.12~1873.4.18]

1802 - 프랑스의 성직자 라코르데 출생

1670 - 폴란드의 왕이자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 출생

1496 -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1세 바사 출생

구스타프 1세 바사 [Gustav I Vasa, 1496.5.12~1560.9.29]

구스타브 1세 바사(Gustav I Vasa, 1496년 5월 12일 ~ 1560년 9월 29일 , 재위 1523년 6월 6일 ~ 1560년 9월 29일 ) 또는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Gustav I Eriksson Vasa)은 스웨덴 바사 왕조 의 시조이다.

우프살라(Uppsala) 대학에서 배우고, 1518년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2세 와의 전쟁에 참가, 덴마크의 포로가 되었으나, 1519년 도피하여 달레카를리아 (Dalecarlia)에 귀환했다. 1520년 11월 덴마크는 스웨덴 귀족들을 대규모로 학살하였다. 이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 으로 아버지를 잃은 구스타브는 저항운둥에 앞장섰고, 힘든 투쟁 끝에 1523년 6월 6일 , 구스타브는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로 스웨덴 왕이 됨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했고, 마침내 칼마르 동맹 이 해체되었다. 그는 국교를 루터교 로 정하고, 전체 교회 재산을 몰수(1527년)하여, 국가 재정을 늘렸다. 또한 그립스홀름 성 등을 짓고, 개혁을 잘 이끌어 훗날 스웨덴이 발트 해의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구스타브는 1560년 9월 29일 사망했고, 웁살라 대성당 에 묻혔다. /위키백과

b술집난동남/b “잠깐만 앉았다 가라” 부모 앞에서 노래방 도우미 취급 ‘경악’

[ 이른바 '술집난동남'으로 불리는, 술집에서 난동을 피운 모 연구소 남자직원들이 네티즌 사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경기도 모 연구소 난동남'이라는 제목으로 사진, 동영상이 공개됐다. 게시물...

b술집난동남/b, 노래방 도우미 취급에 다방이냐며 난동

‘술집난동남’ 사건. 경기도서 부모님과 술집을 운영 중이라 밝힌 20대 여자가 올린 게시물. [웰페어뉴스] '술집난동남'이 누리꾼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술집난동남'은 경기도 한 연구소의 직원들이 술집에서 난동을 부린 것을...

quot;노래 한 곡 해봐!quot; b술집 난동남/b에 네티즌 분노

'술집난동남' 영상을 본 네티즌들은 공분하며 난동을 부린 사람들의 직장을 추측하면서 기사화되고 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현실, 창피한 줄 알아야지, 너희 정신 상태나 연구하길 이라며 삭제 전 동영상을 퍼트리고...

from http://smartnetwork.tistory.com/1027 by ccl(A)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