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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12>

1992년 4월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ETR) 인사가 단행됐다.

ETRI는 4월 28일 체신부에서 임시이사회를 열고 새 소장에 양승택 박사를 선임했다. 경상현 소장은 그해 7월1일 한국전산원장(현 한국정보화진흥원)에 선임됐다.

양 소장은 1961년 서울공대 졸업한 후 미국 브루클린 공과대하교 대학원 전기공학 박사로 ETRI TDX사업단장을 거쳐 한국통신진흥 사장, 한국통신기술 사장으로 일했다. 그는 CDMA상용화를 한 후 ICU초대총장과 정통부장관, 동명대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ETRI초빙연구원과 KAIST초빙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양 소장은 6월말 직제를 개정해 후속 인사를 단행했다. 그해 7월1일 이동통신개발본부를 이동통신기술연구단으로 확대하고 단장에 안병성 검퓨터 연구단장(작고)을 발령했다. CDMA개발업무를 맡고 있던 이원웅 부소장은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부소장으로 재직하다 1998년 인천대학교 정보통신공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영규 본부장도 부장급으로 발령이 나 CDMA시스템 개발업무만 맡게 됐다.

체신부는 그해 7월 24일 퀄컴과 ETRI의 2단계 공동개발을 승인했다.

양승택 소장은 그해 7월30일 미국 퀄컴사를 방문해 어윈 제이곱스 사장과 2단계 공동개발 계약서에 서명(사진)했다.

양 소장의 회고.

“그 때 제이콥스 사장을 처음 만났다. 시험중인 CDMA기지국을 보여 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CDMA는 대학원 과정에서나 배우는 과목인데 우리 연구원중에서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은 일신)”

그러나 2단계 계약을 앞두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미 스탠포드 대학의 루시넌 교수가 체신부에 보낸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그는 이편지에서 퀄컴사의 CDMA방식의 이동통신기술은 문제가 많아 실패할 것이라고 적었다.

루시넌 교수는 위성통신분야를 연구한 학자였다. 그는 ETRI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가 1,000만달러를 주고 2단계 공동개발 계약을 앞둔 시점에서 그런 주장을 하자 체신부는 발칵 뒤집혔다. 그게 사실이라면 1,000만 달러를 날린 일이었다. 시급히 사실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퀄컴측이 “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말라”며 자료를 제시했다. 루시넌 교수가 다른 업체 지원을 받아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의혹이 규명되자 계약은 예정보다 하루 늦게 체결됐다.

2단계 계약에 따라 그해 9월 ETRI는 공동연구를 위한 연구원을 퀄컴측에 파견했다. 이영규 부장을 팀장으로 14명이 퀄컴으로 갔다. 2단계 파견 연구원은 임명섭, 정인명, 이상천, 나종래, 전용태, 김명진, 이동욱,노경호, 이남준, 권동승, 강창순, 정종태, 정용주 씨 등이었다. 이가운데 임명섭, 이상천, 이남준 나종래, 이동욱, 전용태, 김명진 씨 등은 93년 10월31일까지 퀄컴에서 공동개발 연구에 참여했다.

이 부장은 9월5일부터 그해 12월 귀국전까지 한국측 연구개발 책임자로 일했다. 제이콥스 사장은 이 부장에게 집무실 옆 방을 내주며 각별한 친밀감을 표시했다.

그는 ETRI와 퀄컴사간 교량 역할을 했다. 그날 진행한 업무는 ETRI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이 부장의 말.

“퀄컴사 인근에 아파트를 얻어 생활했습니다. 5-10분 거리였어요. 기혼자는 가족을 데리고 왔어요. 아침9시부터 업무를 시작하고 오후에 세미나를 했어요.”

그해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월간조선 11월호에 ‘세계시장의 제패를 꿈꾸는 14명의 한국인’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부장의 큰형님이 당시 이남규 스포츠조선 편집위원(조선일보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역임)이었다. 위싱턴특파원을 지낸 그는 미 샌디에고 퀄컴사를 방문해 현장을 취재해 18쪽에 걸쳐 생생한 로프기사를 월간조선에 실었다. 이 기사가 논란이 됐다.

이 부장의 회고.

“연구소는 다소 폐쇄적입니다. 형님이 공동기술개발과 관련해 퀄컴 현지의 공동기술 실태를 취재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기사가 나가자 많은 오해를 샀지요. 억울한 점이 많았지만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제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해 12월 31일 귀국한 그는 CDMA업무에서 배제됐다. 그리고 이동통신연구단 기술역으로 근무하다 1994년 1월 ETRI를 떠났다. ETRI와 인연의 끈이 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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