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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꽃처럼 사라진 두 청춘 이한열, 박종철 열사

혹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는 말을 들어보신적 있으신가요?

박.종.철 열사

아마 70~80년대에만 가능했던(?) 너무나도 어이없는 말이죠.

사람이 죽은 이유를 저렇게 설명을 한다는 것은.

1987년 6월 ,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그 날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로, 1987년 6월 민주항쟁

1980년대 상황

박정희가 1979년까지 거의 18년간 독재를 하다가

바로 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사살 당하죠.

이로써 독재시대가 저무는 듯 했지만,

1980년, 전두환은 군내 사조직(하나회)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죠

이 때, 명분을 얻으려 이용한 것이 5.18 민주화 운동이죠.

북한군이 대거 침입한 것 마냥 위급한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군대로 장악한 것 마냥.

그렇게 다시 1980년부터는 다시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이 집권하게 됩니다.

그 당시 대통령 선거는 다들 아시다시피 국민들이 직접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닌

체육관 선거라고도 하고 대통령 간선제라고도 하죠?

자기한테 유리한 사람들로 선거 대표인단을 꾸려놓고 투표같지 않은 투표를 하는 것이죠.

당시는 계속되는 독재화와 비민주적인 행태에

전국적으로 민주화의 열망도 커지는 때였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활발하던 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6월항쟁의 불씨를 당기는 여러 사건이 발생합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첫째.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박종철 열사를 죽이고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어서 했던 말이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 군을 사회운동,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학생이었습니다.

경찰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당하고 있던 박종원을 잡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했습니다

당연히 박종철 열사는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순순히 밝히지 않았죠 . 경찰은 박종철 열사에게 폭행, 전기고문, 물고문 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수배학생을 체포하면 일 계급 특진에 현상금까지 붙어 있는지라, 이에 눈이 먼 수사관들은 수사실 안의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박종철의 양손과 양발을 묶은 채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로 머리를 욕조 속으로 반복해서 넣었다가 올리는 물고문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박종철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죠... 그러자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 올려 상체를 물 속에 더 깊이 처박았다 꺼내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런 고문이 10여 시간 이상 지속되었고 그 강도는 점점 더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박종철이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그들은 황급히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 의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박종철은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그들은 당황했고, 증거인멸을 위해

우선 시신을 감쪽같이 없애버리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서울지검에 시신 화장을 신청해보았으나 거절당합니다.

이렇게 1월 13일 자정쯤 체포되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조사받다 15일 사망한 채로 나오게 됩니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재를 뿌리며 남긴 말입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동네 개도 비웃을 치안본부장의 말은 사람들을 더 분노케 했죠

대학생을 고문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고 진실을 축소, 은폐하려 한 정권에 국민들은 더욱 분노했고,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식', '박종철 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위한 철야 농성' 등이 이어졌지만,

전두환은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발 빠르게 뛰고 있었고 이런 일들은 뒷전 이었죠.

결국,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둘째.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전국적으로 민주화의 열망이 커지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커져가고 있었고, 대통령 직선제에 관한 개헌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정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4.13 호헌조치]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전두환-

이것은 당시 현행법인 간선제를 통해 다음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이야기이며,

그 말은, 자신이 간선제로 또 집권하여 권력을 갖겠다는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한 것이었죠/

많은 국민들은 장기집권이라 생각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셋째. 이한열 열사의 죽음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생 이한열 열사는 6월 10일에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여했습니다. 이 시위 도중 전투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22살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 이종창이 의식을 잃은 그를 부축해 일으키는 한 장의 사진이 외신을 타고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린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더불어 6월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1986년까지만 해도 서울, 수도권에서만 활발했던 학생운동이 전두환 덕분에 1987년 전국학생운동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아스팔트에 누워 시위를 하는 학생들에게 시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이어졌고, 경찰은 전국의 110개 대학가를 수색하여 플래카드와 확성기 등

시위용품을 압수해갔으며 검문검색을 강화하여 젊은이들의 가방을 수시로 열어 탐문하기도 하였으며, 인쇄소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6월 10일 관공서는 시민들이 동요할까 국기도 올리지 않았으며 지하철도 시청, 종로, 광화문을 지나치고 갔습니다.

정각 6시. 서울 도심은 온통 애국가 소리에 파묻혔고, 사방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나왔습니다

학생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며 차도로 뛰쳐나왔고, 이것을 지켜보던 사무직들이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가게 상인들은 쫓기는 학생들을 위해 셔터를 내리고 숨겨주고 물을 제공했고, 퇴계로, 충무로 파출소가 시위대에 점거되고

남대문 상인들은 무장해제당한 전경들과 함께 "민주주의 만세!"를 합창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서울과 비슷한 상황이 전국22개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6월 내내 이어질거라고는 아무도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명동에는 최루가스가 가득했고 명동성당으로 모여들며 그곳은 승리의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연세대 의대와 간호대는 매일 쏟아지는 최루탄, 최루액 부상자를 돌보기 위해 자원하였고 미군은 외출금지를 통보받았으며,

세계굴지의 언론사들이 한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부산은 서울보다 치열했고, 전국 도시곳곳에 계엄령이 발표될거라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전혀 공포에 떨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던 23일, 시위본부는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합니다.

"침묵하고 있던 다수가 독재의 편이 아니라 민주 국민임을 확인했습니다.

지금 시기는 독재 권력에게는 위기이지만, 국민에게는 민주화의 희망이자 기회입니다......."

이와 함께 6월 26일 6시 전국에서 '국민평화대행진'을 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6월 26일, 전국의 대학이 있는 모든 도시, 제주까지 독재타도를 함께 외쳤고, 6.26 평화대행진은 한국인들의 민주화 열기를 세계만방에 알렸습니다.

전국 500만명, 학생, 시민, 농민, 넥타이부대 너나 할 것 없이 함께했던 6월.

정부의 진압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던 6월 한 달간의 치열한 항쟁끝에,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6.29 선언이 발표됩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포스럽던 시절.

박종철과 이한열 같은 열사가 없었더라면, 그토록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이 나라는 아직도 독재자에 의해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황폐한 나라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는 말이 있지만

4.19 , 5.18 , 6.10 항쟁이라는 뼈아픈 역사의 학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난 박근혜 정권의 부패함을 또 경험하고 당했죠.

이제 더는 권력자들의 눈 먼 욕심과 광기로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다시는 이한열, 박종철 열사와 같은 희생으로 눈물 흘려서도 안 될 것입니다.

늘 항상 우리가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6월 민주항쟁 30년이 지난 지금, 더 엄청난 권력자들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365일 관심갖고 감시하고 참여하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힘겹게 싸워 얻은 우리들의 투표권을 소중히 해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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