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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987"

토픽셀프 2018. 8. 25. 03:08

영화"1987"

전두환정부는 쿠데타·학살·고문·폭행·은폐조작·타락·독직·용공조작 등으로 점철된 전형적인 비민주적 군사정권이었다. 이는 전두환정부가 국제수지 흑자 등 경제성장의 치적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살이라는 태생적 원죄와 연루된 정당성 결여와 부도덕성으로 인해 광범한 민심이반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1987년 4월 13일 대통령간선제를 고수하겠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4·13 선언은 단임 헌법에 따라 7년을 기다려왔던 한국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에 찬물을 끼얹은 것으로서 국민들로 하여금 배신감·박탈감·분노를 한꺼번에 분출시키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두환정부의 연장이냐 아니면 전면 거부냐의 양극화된 대결의 초기 국면에서는 남북한 긴장구도 상황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고 또 현대화된 막강한 물리력을 독점하고 있는 전두환정부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1987년 5월 특정 국면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인 동시에 군부독재의 부산물이기도 한 박종철 사건은 예기치 않게 노신영 총리와 장세동 안기부장을 사퇴시키게 된다. 이로써 전두환정부 내부의 권력관계에서 전두환 사후보장파가 퇴조하고 민정당의 정권재창출에 우선권을 두는 분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동시에 1987년 5월 18일 7년 전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추도하는 모임에서 국민들로부터 도덕성과 신뢰를 받고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정부에 의해 은폐·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일약 박종철 개인의 고문치사라는 단순한 죽음을 넘어서서 전두환정부의 부도덕성과 기만적 행태를 다시 전면에 드러내 보여주는 정치적 쟁점이 되는 사건으로 변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되고 조작되었음이 폭로·확인되면서 고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어 범국민적 연대기구로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박종철 사건 규탄과 4·13 호헌조치의 철회 및 민주개헌 쟁취를 목표로 1987년 6월 10일 대대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해나간다. 6월 10일 이후 10~16일 간의 명동성당 내 농성투쟁, 18일의 최루탄 추방대회 그리고 26일 전국에서 130여만 명이 참여하는 국민평화대행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전두환정부의 집권연장을 막는 6월민주항쟁이 전개된다.

6월항쟁은 투쟁의 규모를 볼 때 전국적으로 20~30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고 연인원 4~5백만 이상의 국민대중이 참여하였다. 투쟁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는 19일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투쟁방식의 다양성에서는 일반 국민들의 정치적 진출이라는 측면 외에도 대학생들의 헌신적인 투쟁, 가두시위의 다양한 전술의 개발, 지역별 시위에서의 '상징적 중심지'의 형성, 민주화 대연합으로서의 국민운동본부의 결성과 지도력 창출, 가톨릭과 개신교의 지도부 역할이라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6월항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역동적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광주학살의 경험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군부 내 장성들의 소극적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이 처한 국제정치경제적 맥락과 한미관계의 특수성으로부터 연원하는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전두환정부는 새로운 위기타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특히 1987년의 시점에서 전두환정부에 대한 국제적 압력과 관련해서는 한국 경제·사회의 개방적이고 대외의존적인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구조적인 압력 이외에도 1988년 서울올림픽의 순조로운 개최·진행을 위해서도 정치의 민주적 안정이 요구되었다.

또한 1987년 6월의 한국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미국 의회가 '한국민주주의법안'을 제출하고 레이건 대통령의 경고친서가 전달되는가 하면 개스틴 시거 미국무성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이 한국 군부의 정치개입을 반대한다는 명확하고도 반복된 입장을 표명하는 등 미국의 직·간접적인 압력은 6월항쟁의 활력을 뒷받침해주는 데 손색이 없었다.

6월항쟁은 1987년을 전후한 시기의 한국 경제가 3저호황이라는 세계경제적 요인에 편승하여 급속한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던 경제적 호황으로부터 많은 덕을 보았다. 경제호황에서 터져 나온 6월항쟁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제기되는 계급갈등 등의 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4·13 호헌의 철회와 대통령직선제의 실시 등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제도권정치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6월항쟁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선두 주자였던 김대중–김영삼 두 야당정치인의 합심과 제휴를 통한 정치적 대안의 존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실제로 통일민주당은 6월항쟁의 정점이었던 일련의 국민대회와 공청회, 평화대행진이 개최될 때마다 1985년 2·12총선에서 돌풍을 몰고 왔던 양김의 주도 하에 정치적 대안으로서의 수권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부결속과 전열정비에 박차를 가해나갔다. 또한 통일민주당은 재야운동권 세력들과의 공동보조 하에 전두환정부에 대한 민주항쟁의 공세에 있어서도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함으로써 6월항쟁에 있어서의 제도권 야당의 몫을 지켜나가는 데 성공을 거둔다.

6월항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어 나감에 따라 일각에서는 군부의 전격적 퇴진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6월항쟁에서 폭력이나 강제로 군부정권을 퇴진시키는 것이 아닌 보다 온건하고 안정적인 형태의 민주주의 이행으로 타협과 조율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현실적인 물리적 저항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6월항쟁의 주도세력은 군부의 즉각적인 퇴진을 강제할 만큼의 물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여전히 타협과 조율이라는 합법적 투쟁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간주되는 한 군부정권과의 전면적인 물리적 대결을 벌일 어떤 구실도 정당화하기가 어려웠다. 셋째, 남북한 분단의 냉전적 대결구도가 상존하고 있는 안보적 상황은 어떤 형태의 전면대결도 부당하고 자기파멸적인 것으로 화하도록 하고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열기가 극에 달하고 있는 역동적 상황에서 군부의 즉각 퇴진이라는 화끈함과 조급성에 휘몰리지 않고 6월항쟁이 대통령 직선제 실시라는 온건한 형태의 합법적인 요구로 자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민주화운동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크게 일조를 하였다. 6월항쟁의 목표는 군부정권의 즉각적인 퇴진이라든가 급격한 체제변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대통령직선제의 실시라는 보다 온건한 형태를 띠었다.

이에 따라 대통령직선의 승산 여부와 관련하여 '양김동시출마 필승론'으로 재집권이 가능하다는 전략적 계산이 권위주의 지배연합 내부에서도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헌법에 의해 7년 단임의 임기가 끝나는 것을 무리하게 연장하려 하기보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기획과 김용갑, 이종률, 허삼수 등이 제시한 이른바 대통령직선제의 적극 수용이라는 반전이 제시되는데, 1987년 노태우에 의한 6·29선언이 그것이었다.

정치엘리트 간 정치협약의 시동을 가져온 1987년의 6·29선언은 상징조작의 차원에서 보면 민주화운동에 굴복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집권세력의 주도면밀한 계산과 시나리오에 따라 보다 적극적으로 위기를 타개해나가려는 역공세의 정치책략이었다.

6·29선언은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대통령직선을 둘러싸고 정치세력들 간의 협약에 의한 민주화를 가져오도록 한 정치적 전환의 계기였다. 결국 6·29선언의 정치조작에 의한 집권세력의 통제와 이해관계의 조정 하에서 진행된 1노 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간의 4파전 대통령선거는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으로 귀결되고 6월민주항쟁의 요구와 열기는 마무리된다.

6월항쟁은 1979년의 부마항쟁이나 1980년의 광주항쟁과는 달리 한국의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권위주의 지배연합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체제전환을 이루어 나가는, 이른바 엘리트 간 협상에 의한 정치협약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궤적을 남겼다. 정치엘리트 간 협약에 의한 1987년 민주화는 노태우 정부를 경유하여 김영삼·김대중 정부로의 순조로운 흐름 속에서 높은 생존가능성과 정치안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행의 안정에 대한 대가로 독점재벌이 주도하는 경제질서와 권위주의 지배연합이 계속 건재함에 따라 보다 광범위하고 민중지향적인 자기변혁의 가능성은 그만큼 제약을 받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1987년 6월항쟁 (사건으로 보는 한국의 정치변동, 2004. 4. 15.,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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