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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인과 한국사회 강의] 3. 4.19 혁명과 중앙대학교

1. 4.19 혁명의 전사(前史)

-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등교 지시에 대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의 항거

- '2.28 대구학생시위', 경북고등학교 영화관람, 대구고등학교 '토끼사냥', 경북사대부고 '임시시험', 대구상고와 대구여고 '졸업새 송별회' 2월 28일 거행. 각 고등학교 등교 지시.

- 정치적 의도. 2.28에 열리는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 참여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

- 2.27 각 학교 학도호국단 학생위원들은 27일 밤 긴급 모임을 갖고 학생 시위 갖기로 사전 협의

- 경북고 8백명을 시작으로 대구고, 경북여고, 경북사대부고로 확산

- 3.8 대전고등학교 1천여명 시위

- 3.10 대전상고 3백여명, 수원농고 3백여명, 충주고 3백여명 시위

- 3.12 부산 해동고 동래고 혜화여고 시위

- 3.13 경기도 오산고등학교 시위

- 3.14 서울 중동고 균명고 대동상업고 학생 시위

2. 3.15 부정선거

- 3.15 부정선거 자유당 정권 주도로 기획

- 내무부를 주심으로 외무부 재무부 법무부 교통부 체신부 장관으로 구성된 '6인위원회' 만들어 장관들이 나서서 '선거대책' 논의

- 3.15 선거에서 이승만과 이기봉 당선이 목표, 내무부 장관 최인규 초법적 활동

- 최인규 내무부 장관, "공무원은 누구나 국가원수인 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차기 선거에서는 이박사 이의장을 정,부통령으로 꼭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라"고 공개적으로 발언

- 3.15 마산 항쟁,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 이미 '4할 사전투표' 실시 확인. 부정선거 반대 시위, 최초로 마산중학교 3학년 김영호 군 희생. 10명의 사망자와 80여명의 중상자 발생

- 4.11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 위로 떠오르며 제 2차 마산항쟁 촉발 (최루탄에 의해 눈에서 뒤통수까지 관통 당한 형상)

- 4.12 마산공고 학생 5백여명 '민주주의 바로잡자' 현수막 앞세우고 가두시위. 청신고 3백여명, 마산여고 4백여명 ,마산고 5백여명, 마산상고 1천여명 합류

3. 중앙대학교와 4.19 혁명

- 4.18 고대시위 이후 지방 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 서울 대학생들의 시위로 전환

- 4.19 셋째 시간이 채 끝나기 전에 중앙대 학생들 운동장 집결

- 이셩신 총장과 학생회 간부의 만류에도 볼구하고 일제히 스크럼 짜고 교문 나섬

"우리 중대생이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규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유산을 물려 받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의 정당한 저항이며 총칼의 탄압에는 굴하지 않고 감행되어야 할 이 항쟁은 우리의 후손에게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장기집권이 가져다 준 부정과 부패의 무서운 해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 함에 있다." (선언문 일부)

- 중앙대 시위대는 애국가, 교가, 전우가, 학도호국단가 부르며 행진

- '의에 죽고 참에 살자' 현수막 앞세움

- "마산학생 석방하라"

- "불법포정 바로잡아 민주구국 선봉되자"

- 구호 외치며 행진

- 흑석동 고개와 한강대교 전면 2차에 걸친 약 40여명의 경찰대와 소방차 4대의 살수세례 뚫고 전진

- 한강대교를 건너 삼각, 서울역, 시청으로 행진

- 저녁 6시경 내무부 앞에서 연좌농성

- 4.19 혁명으로 6명의 청춘이 민주의 제단에 산화

4. 4.19 혁명과 6인 희생자

- 고병래 (당시 22세, 상학과 3) : 충남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출생, 대전중고교 졸업, 4.19때 내무부 앞에서 희생됨

- 김태년 (당시 24세, 약학 3) : 충북 음서군 출생, 청주고교 졸업, 평소 문학에 취미가 있었음. 4.19 당일 녹음기로 치안국 무기고 앞의 시위상황을 녹음하다가 희생되었음

- 서현무 (당시 24세, 법학 3) : 경기고 용인고 고사면 월향이 출생으로 신광여고 졸업. 4.19 시위 당시 플래카드를 들고 선봉에 섰으며, 학생시위대의 협상대표로 내무부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음. 경찰에 연행되어 이틀 동안 심한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7월 2일 수도의대부속병원에서 영면함. 그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사월혁명 부상학생동지회 부회장과 사업부장을 역임함. <동아일보> 1960년 7월 3일자 신문에 '쓸쓸히 진 혁명의 꽃' 기사 게재됨

- 지영헌 (당시 21세, 신문 3) : 충북 단양군 매포면 하시리 출생. 외아들로 태어나 단양고교 졸업. 4.19 당일 내무부 앞에서 희생당했음.

- 송규석 (당시 24세, 정외 3) : 전남 고흥군 과역명 석봉리 출생, 순천고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 중 1958년 본교 진학. 내무부 앞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총탄을 맞고 택시에 실려갔는데 정릉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음.

- 전무영 (당시 21세, 신문 1) : 경남 진해군 이북면 장방리 출생, 진해고교 졸업하고 본교 입학한 신입생으로 재학한지 불과 18일만에 내무부 앞에서 희생당했음

5. 4.19 혁명과 한국민주주의

- '피의 화요일'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186명이 사망하고 ,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

- 서울대 7명, 중앙대 6명으로 두 번째로 많은 희생자, 중앙대는 4.19 당시 대학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최후의 대학'이었으

-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약 300명은 계엄령 하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돌입

중앙대 법학과 이종극, 사학과 조규동, 국문과 김동욱 교수가 대표로 참석

- 이종극 교수는 시국선언기초위원으로 선언문 기초하여 민주학원 재건을 논의하는등 주도적 역할을 함

- 4.25 교수단 시위에 따르는 시민 만 여명 이르렀고, 오후 7시경 국회의사당 앞에서 선언문 낭독, 만세삼창과 애국가 부르고 해산.

- 4.26 10만 시민 세종로 메우며 경무대로 육박,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 1960.5.3 어용적인 학도호국단 해체하고 대의워회에서 학생자치위원회를 구성

- 1960.5.10 운동장에서 4.19 희생자에 대한 합통 추모식 거행

- 1960.9.10 중앙대학교 학우 일동의 이름으로 의혈탑 제막식 거행

- 1960.11.13. 조계사에서 김태년 서현무 영혼 결혼식

- 1992년 12월 2캠퍼스 총학생회장으로 의문사한 이내창 포함 '7인 열사추모비' 건립

- 1995년 11월 19일 김태년 서현무 '합장식' 수유리 국립묘지에서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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