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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慶州市, Gyeongju-si 1

토픽셀프 2018. 12. 3. 02:40

경주시慶州市, Gyeongju-si 1

유물의 수적인 면에서는 뒤지지만 규모나 예술적인 면에서는 단연 독보적인 동편기슭에는 남산에서 가장 큰 절로 비구니들의 수도처인 보리사와 8세기 말 신라불상의 걸작으로 보물로 지정된 석가여래좌상, 비스듬히 기울어진 바위 위에 조금은 거칠게 조각된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지역축제로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정부지정 문화관광 축제인 한국의 술과 떡잔치, 매년 4월 초 보문관광단지일원에서 펼쳐지는 경주벚꽃마라톤대회, 경주버섯축제, 문무대왕해맞이대축제와 새해맞이토함산기원대축제 등이 있다.

농촌전통테마마을인 안강옥산세심마을은 69호에 155명의 마을주민이 살고 있는 전통적인 한국의 농촌마을로 농촌진흥청에서 2002년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선정, 자립적으로 농촌체험관광을 운영하고 있는 마을이다.

읍·면

1). 감포읍(甘浦邑)

시의 동단에 위치한 읍. 면적 44.83㎢, 인구 6,013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감포리이다. 본래 경주부 동해면이었으나 1895년(고종 32)장기군(長鬐郡)에 편입되어 내남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군에 편입되어 양북면이 되었으며, 1937년양북면의 오류·감포 등 9개 이가 분리되어 감포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대산계의 동부지역으로 바다 가까이까지 200m 내외의 산지가 해안에 급박하여 평야가 거의 없으며,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동해로 흘러드는 오류천(五柳川)·전촌천(典村川)·팔조천(八助川) 등은 기울기가 급하고 길이도 짧아 유역면적도 협소하다.

총경지면적은 8.39㎢로 18.7%, 임야면적은 32.34㎢로 72.1%, 기타는 9.2%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00㎢로 47.7%를, 논이 4.39㎢로 52.3%를 차지하며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행해진다. 농산물은 주로 파·양파·당근·감·천궁 등의 작물이 재배되며 돼지가 많이 사육되고 있다. 매년 인구가 감소하고 있으며, 산업은 경지율이 낮아 주민의 약 3할 정도가 어업에 종사하며 가구수로는 4할을 차지한다.

수산업은 주로 시내 유일의 어항인 감포항에서 주로 행해지며, 2008년 현재 어선도 총 444척 중 동력 427척, 무동력 17척으로 10톤 미만의 소형어선이 대부분이다. 주어종은 꽁치·멸치·가오리 등이며, 약간의 전복과 미역의 양식이 행해진다. 특산물로는 멸치젓갈, 미역, 전복, 오징어, 꿀곶감 등이 있다.

교통은 울산∼신고산간의 국도가 전촌리에서 군산∼감포간의 국도와 만나 경주 도심지와 연결되며, 지방도가 북쪽의 구룡포(九龍浦)와 포항, 남쪽의 울산을 해안을 따라 연결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대본리에 이견대, 전동리에 삼락당·삼우정·삼인재, 오류리에 감포영성(甘浦營城)이 있고, 남쪽 끝의 대보리일대는 경주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감포(甘浦)·오류(五柳)·전동(典洞)·전촌(典村)·호동(虎洞)·노동(魯洞)·팔조(八助)·나정(羅井)·대본(坮本) 등 9개 리가 있다.

2). 건천읍(乾川邑)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92.40㎢, 인구 1만 663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건천리이다. 본래 경주군 서면 지역으로 1973년서면에서 건천·천포 등 11개 리가 분리되어 건천읍으로 되었다.

동대산계의 동부지방과 단석산계의 서부지방 사이에 놓여 있으며, 경주에서 영일만쪽으로 빠지는 길이 54㎞의 형산강을 배경으로 넓은 건천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19.06㎢로 20.6%, 임야면적은 61.72㎢로 66.8%, 기타는 12.5%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67㎢로 24.5%를, 논이 14.39㎢로 75.5%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농산물은 보리와 벼농사를 주로 하며, 지역특산물인 양송이버섯은 도내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고, 당도 높은 포도재배집산지로 유명한 곳이며, 이 밖에 보리·무·배추·수박·고추·마늘·파·상추와 사과가 생산되고, 가축으로는 한우가 사육되고 있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와 중앙선, 국도가 평행으로 읍의 중앙을 관통하여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송선리에 부산성지, 방내리에 단석사지·척판대, 금척리에 고분군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건천(乾川)·천포(泉浦)·송선(松仙)·신평(薪坪)·용명(龍明)·대곡(大谷)·화천(花川)·모량(毛良)·방내(芳內)·금척(金尺)·조전(棗田) 등 11개 리가 있다.

3). 안강읍(安康邑)

시의 북서단에 위치한 읍. 면적 138.87㎢, 인구 2만 8866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안강리이다. 본래 안강현의 소재지로서 형산강 서쪽이 되므로 강서면이라 하여 갑산·산전·강교 등 19개 이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동면의 양동 등 일부 지역이 병합되었고, 1949년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천북면 청령리가 안강읍에 편입되었다.

북부에 어래산·자옥산이 있고, 동부의 동대산계와 서부의 단석산계 사이를 흐르는 형산강이 읍내를 가로질러 흐르기 때문에 주변에는 넓은 농경지가 분포하는데, 특히 안강평야는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경상북도내의 유수한 곡창지대를 이룬다.

이 평야를 중심으로 벼농사지대가 이루어진다. 총경지면적은 28.97㎢로 20.9%, 임야면적은 92.52㎢로 66.7%, 기타는 12.4%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8.71㎢로 30.1%를, 차지하고 논이 20.26㎢로 69.9%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안강읍은 경주시 제일의 쌀 주산지이며, 토마토, 단감, 포도 등의 특산물과 젖소, 한우, 돼지 등의 가축사육을 겸하고 있는 복합영농이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풍산 안강공장과 70여개의 중소기업이 산재해 있다. 또한 이 읍과 이웃한 산간지방 일대의 생활권이 안강쪽에 속하여 고추·마늘과 같은 밭작물이 모여들기 때문에 안강읍은 농간물 집산지로서의 상업기능도 대단히 높다.

교통은 동해남부선 철도가 경주와 포항을 연결하고 대구와 포항을 잇는 국도가 통과하고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강교리에 관수정, 하곡리에 수재정·성산서당, 양월리에 구강서원·익재영정, 대동리에 이의정·매호정, 산대리에 덕산서원·삼우정·서림정, 옥산리에는 독락당과 독락당 뒷편 정혜사지에 13층석탑이 있다. 또한 옥산서원과 서원내의 중국주엽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안강(安康)·양월(楊月)·육통(六通)·노당(老堂)·산대(山垈)·옥산(玉山)·하곡(霞谷)·강교(江橋)·두류(斗流)·근계(根溪)·갑산(甲山)·대동(大洞)·검단(檢丹)·사방(士方)·청령(靑令) 등 15개 이가 있다.

4). 외동읍(外東邑)

시의 남단에 위치한 읍. 면적 109.67㎢, 인구 1만 6647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입실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경주읍내의 동쪽 바깥쪽이 되므로 외동면이라 하여 상신·하신·영지 등 3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동면의 일부가 병합되어 신계·활성·말방 등 1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75년이동면 신계리의 일부가 경주시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외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부에 삼태봉, 서부에 마석산이 있다. 총경지면적은 28.89㎢로 26.3%, 임야면적은 63.82㎢로 58.1%, 기타는 15.5%를 차지하고 있으며 경지 중 밭은 6.79㎢로 23.5%를, 논은 22.10㎢로 76.5%를 차지한다.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토양은 제3기의 화강암인 사질양토로 토지가 비옥하다.

주요 농산물은 배·배추·마늘·고추 등이 생산되어 남쪽의 울산공업단지에 농산물을 공급해주는 구실을 한다. 가축은 주로 한우·돼지가 사육되고 있다. 특히 대규모의 채소단지와 문산리 비육우단지는 이곳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고 있으며, 공업도시 울산과 인접하여 대규모 공단이 입지하고 있다.

도로는 동해남부선과 부산∼온성간의 국도가 읍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 경주와 울산을 연결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 모화리의 관문성은 지금도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선이 되고 있다. 이 밖에 모화리에 원원사터, 괘릉리에 괘릉, 방어리에 감화정·영지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입실(入室)·구어(九於)·모화(毛火)·문산(汶山)·석계(石溪)·녹동(鹿洞)·냉천(冷川)·제내(堤內)·북토(北吐)·방어(方於)·개곡(開谷)·신계(薪溪)·괘릉(掛陵)·활성(活城)·말방(末方)·죽동(竹洞)·연안(淵安)등 17개 리가 있다.

5). 강동면(江東面)

시의 북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81.48㎢, 인구 5,03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인동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형산강의 동쪽이 되므로 강동면이라 하여 모서·호명·인좌 등 2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모서·호명 등 11개 리로 개편되었다.

동쪽으로는 동대산맥이 남북으로 주행하여 면의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형산강이 구조곡을 따라 북류하고 북쪽에서 남류하는 기계천(杞溪川)과 인동리에서 합류하여 유로를 동쪽으로 바꾸어 동해로 흘러든다. 서쪽은 안강평야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19.56㎢로 24.0%, 임야면적은 46.58㎢로 57.2%, 기타는 18.8%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은 6.17㎢로 31.5%를, 논은 13.39㎢로 68.5%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벼농사를 주로 하며 사과·배추·오이·고추·시금치·참외·복숭아·포도·감·천궁 등이 생산된다. 대표적인 농산물인 딸기, 부추 등의은 해외 수출도 하고 있다.

도로는 형산강구조곡을 따라 동해남부선이 포항과 경주를 연결하며, 인동리에서는 부산∼온성간의 국도와 영주∼포항간의 국도가 교차된다. 또 울산∼신고산간의 국도가 북부를 횡단하며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양동리에 관가정·두곡영당·설천정·수운정·심수정, 다산리에 귀래정·단계사·삼괴정, 왕신리에 수연정, 유금리에 동강서원 등이 있으며, 국당리에 옥련사(玉連寺)도 있다. 양동리는 여주이씨(驪州李氏)·월성손씨(月城孫氏)의 동족마을인 양동민속마을이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분교 2개교)가 있다. 인동(仁洞)·모서(毛西)·호명(虎鳴)·오금(吾琴)·왕신(旺信)·국당(菊堂)·유금(有琴)·양동(良洞)·안계(安溪)·다산(多山)·단구(丹邱) 등 11개 리가 있다.

6). 내남면(內南面)

시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122.03㎢, 인구 5,13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이조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경주 남쪽이 되므로 내남면이라 하여 상명·하명·백운 등 3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노곡·월산 등 16개 리를 관할하였고, 1975년율동(栗洞)과 배리(拜里)가 다시 경주시로 편입되었다.

금오산맥과 주사산맥이 남북으로 주행하여 각각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이루고, 이들 산맥 사이를 형산강의 상류인 기린내가 북쪽으로 흐른다. 기린내와 그 지류를 따라 충적평야가 전개될 뿐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이다. 또한 형산강 상류지역의 청정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총경지면적은 19.63㎢로 16.1%, 임야면적은 90.73㎢로 74.4%, 기타는 9.5%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은 5.96㎢로 30.4%를, 논은 13.67㎢로 69.6%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보리·녹두 등과 이외에도 오이·호박·수박·토마토·천궁·사과·배·고추·무·잎담배 등이 재배되며, 가축은 한우·닭 등도 사육된다. 박달리의 도진마을에서는 한지, 고사리 마을에서는 인삼·약초가 재배되며, 비지리에서는 닥나무가 생산된다. 토마토, 딸기 등 시설 채소단지 및 농공단지 조성되어 있다. 특산물로는 남산송이, 양봉, 사과, 배, 토마토, 딸기 등이 있다.

교통은 도로가 면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경부고속도로와 부산∼강릉간의 국도가 통과하여 경주시와 연결된다. 또한, 동서로 서면∼양남간의 군도가 지나고 있어 인근의 동부지역과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용장리에 용장사지 삼층석탑·석불좌상·천룡사지, 이조리에 봉암정·용산서원, 화곡리에 어연정·화계서당 등이 등이 있다. 이조리는 월성최씨(月城崔氏)의 동족마을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용장(茸長)·노곡(蘆谷)·명계(椧溪)·월산(月山)·이조(伊助)·부지(鳧池)·덕천(德泉)·안심(安心)·상신(上辛)·박달(朴達)·비지(飛只)·화곡(花谷)·망성(望星) 등 13개 리가 있다.

7). 산내면(山內面)

시의 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142.55㎢, 인구 3,32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의곡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운문산의 안쪽이 되므로 산내면이라 하여 어두·원동·장사 등 1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남면(內南面)·박달리(朴達里)의 일부와 울산군 두서면(斗西面) 소호동의 일부가 병합되어 9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단석산(斷石山, 827m)·사룡산(社龍山, 685m)·옹강산(翁江山, 832m)·문복산(文福山, 1,014m)·고헌산(高獻山, 1,033m) 등의 높은 산이 면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창천(東倉川)과 그 지류를 따라 좁은 곡저평야가 형성되어 있을 뿐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되어 있다.

총경지면적은 14.85㎢로 10.4%, 임야면적은 117.82㎢로 82.7%, 기타는 6.9%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은 6.93㎢로 46.7%를, 논은 7.92㎢로 53.3%를 차지하며 밭농사와 논농사의 비율이 비교적 비슷하다. 또한 경지율이 매우 낮은 전형적인 산지지역으로 약초의 재배·채취가 활발하다.

참깨·천궁·마늘·고추·배추가 많이 나며, 양봉·한우사육 등도 행해진다. 감산리의 장사마을에서는 고랭지채소가 재배되며, 내일리의 상목마을은 양잠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북동부의 일부지역은 경주국립공원 단석산지구에 포함된다.

지형상 교통은 극히 불편하나 시천∼경주간의 국도가 당고개를 넘어 건천읍과 통하고, 서쪽으로 청도읍과 연결되며 면의 남부에는 언양∼영천간의 지방도가 남북으로 나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의곡(義谷)·내일(乃日)·대현(大賢)·일부(日富)·신원(新院)·외칠(外七)·내칠(內七)·우라(牛羅)·감산(甘山) 등 9개 리가 있다.

8). 서면(西面)

시의 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52.13㎢, 인구 3,66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아화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경주읍내의 서쪽이 되므로 서면이라 하여 고천·고백·모량 등 3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모량·방내 등 17개 리로 개편되었다.

면의 중앙을 영천∼경주간구조곡이 동남으로 관통하고 남쪽과 북쪽은 산지를 이룬다. 남쪽에는 주사산이, 북쪽에는 인내산·관산(冠山, 394m) 등이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낙동강 상류인 동창천이 면 중심을 관통하고 있으며, 산천어, 꺽지, 피라미, 빙어 등 민물고기가 많다.

총경지면적은 10.06㎢로 19.3%, 임야면적은 36.13㎢로 69.3%, 기타는 11.4%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은 2.80㎢로 27.8%를, 논은 7.26㎢로 72.2%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호박·마늘·파·양파·상추 등의 채소류와 사과·포도·복숭아 등의 과실류가 재배되고, 가축은 돼지의 사육도 활발하다. 도리에서는 고랭지작물·특수밭작물의 재배와 양계·양돈 등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산물로는 곤달비, 더덕 등이 있다.

도로는 면 중앙의 구조곡을 따라 경부고속도로와 중앙선, 군산∼감포간의 국도가 나란히 달려 대구·경주 등과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도계리에 계은정, 도리에 벽송정, 천촌리에 주사암이 있다. 천촌리의 샘촌마을에는 겨울에 얼지 않고 여름에 물이 아주 차가운 웅굴담, 여름철 땀띠를 없애준다는 월청샘, 들판 한가운데서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솟아 농사에 이용되는 갈모샘 등 30여 개의 우물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아화(阿火)·도계(道溪)·천촌(泉村)·서오(棲梧)·심곡(深谷)·도(道)·사라(舍羅)·운대(雲坮) 등 8개 리가 있다.

9). 양남면(陽南面)

시의 남동단 동해안에 위치한 면. 면적 84.95㎢, 인구 6,582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하서리이다. 본래 경주부 지역으로 동해가에 있으므로 동해면이라 하였는데, 1895년장기군에 편입되면서 양남면이라 하여 석촌·효동·나산 등 1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경주부에 귀속되었다.

동대산맥의 동쪽사면을 이루는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태봉(三台峰, 629m)이 서쪽 경계의 최고봉이고, 북쪽 경계를 따라 조항산(鳥項山, 596m)·우산(牛山, 334m)이 있다. 나아천(羅兒川)·하서천(下西川)·관성천(觀星川)의 세 줄기 작은 하천이 남동류하여 동해로 흘러들며, 그 하류에 소규모의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총경지면적은 11.93㎢로 14.0%, 임야면적은 64.55㎢로 75.9%, 기타는 10.1%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3.13㎢로 26.2%를, 논이 8.80㎢로 73.8%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고구·감자·파·당근·감 등이 주로 생산된다. 신서리 범실마을에서는 포도, 다골마을에서는 감, 억수밑마을에서는 백도 등도 재배된다. 신대리의 건댓골에서는 한우사육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해안에서는 영세어업이 행해지며 미역채취, 바다뱀장어·복어·가자미 등이 많이 잡힌다. 특히, 수렴리의 구무바위 주민들은 미역·전복·멍게 등의 양식업으로 소득을 높이고 있다. 나아리에 원자력발전소와 수렴리에 코오롱그룹 사원휴양소가 설치되어 있다.

교통은 도로가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울산∼신고산간의 국도가 감포와 울산을 연결하며, 서면∼양남간의 군도와 석굴∼관성간의 군도가 면의 중앙부를 지나면서 이 면과 경주를 연결하고 있으나 불편하다.

수렴리 관성마을에서는 3년마다 풍어제를 지내며, 하서리 올골마을에는 마을어귀의 큰 당수나무 아래에서 정월 대보름날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풍속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하서(下西)·환서(環西)·수렴(水念)·신서(新西)·서동(瑞洞)·상계(上溪)·신대(新垈)·기구(基邱)·석촌(石村)·석읍(石邑)·효동(孝洞)·상라(上羅)·나산(羅山)·나아(羅兒)·읍천(邑川) 등 15개 리가 있다.

10). 양북면(陽北面)

시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0.06㎢, 인구 4,47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어일리이다. 본래 경주부 지역으로 동해가에 있으므로 동해면(東海面)이었는데, 1895년장기군에 편입되어 내남면이라 하여 연동·오류·창사 등 33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동면의 일부가 병합되어 양북면으로 개칭되면서 경주군에 편입되었다. 1937년 9개 리가 감포읍으로 분리되었다.

추령(楸嶺)·토함산을 잇는 동대산맥의 동쪽사면에 자리잡아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이며, 중앙을 남동류하는 대종천(大鐘川)의 유역에만 소규모의 평야가 분포한다.

총경지면적은 14.88㎢로 12.4%, 임야면적은 95.15㎢로 79.3%, 기타는 8.3%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93㎢로 33.1%를, 논이 9.95㎢로 66.9%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곡위주의 논농사를 주로 하고 있으나 최근 양북토마토로 잘 알려진 토마토와 부추 등 채소재배와 한우사육을 중심으로 한 축산업이 발달하였고, 넓은 산지를 이용한 산나물채취 및 엄나무 등 소득작목으로 소득을 높여가고 있으며 해안지역은 회식당과 미역 등 해산물 판매와 양식어업을 주로 하고 있다.

봉길리 일원에는 한국수력원자력(주) 월성원자력 본부가 위치해 있으며, 봉길리 신월성 1,2호기 인접부지에는 64만평 규모의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시설(방폐장)이 건설될 예정이다.

교통은 도로가 면의 북부를 동서로 군산∼감포간의 국도가 통과하며, 남북으로 나 있는 양북∼오천간의 지방도는 해안에까지 이르러 울산∼신고산간의 국도와 만난다.

문화유적은 용당리에 감은사지·감은사지삼층석탑, 장항리에 장항사지오층석탑, 봉길리에 문무왕해중릉, 범곡리에 석굴암 등이 있으며, 장항리에는 장항사터와 토함산 기슭의 울창한 삼림속에 들어선 토함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그리고 호암리에는 지림사도 있다. 봉길해수욕장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어일(魚日)·와읍(臥邑)·용동(龍洞)·권이(權伊)·호암(虎巖)·안동(安洞)·장항(獐項)·범곡(凡谷)·입천(卄川)·송전(松田)·죽전(竹田)·두산(斗山)·용당(龍堂)·구길(九吉)·봉길(奉吉) 등 15개 리가 있다.

11). 천북면(川北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8.21㎢, 인구 5,24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산리이다. 본래 경주군 지역으로 동천의 북쪽이 되므로 천북면이라 하여 지북·고성·용강 등 22개 이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부내면의 북정리와 내동면의 사리 일부, 강서면의 검단리 일부가 병합되어, 황성·용강 등 15개 리로 개편되었다. 1955년경주가 시로 승격되면서 3개 리가 경주시로 편입되었고 1975년 다시 2개 리가 경주시로 편입되었다.

동쪽으로는 태백산맥의 지맥이 동대산맥, 서쪽으로는 형산강이 경계를 이루며, 그 양안에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중앙부에는 소항천(小項川)의 지류 및 왕신천(旺信川)의 상류가 넓은 산간분지를 이루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13.99㎢로 24.1%, 임야면적은 33.66㎢로 57.9%, 기타는 18.0%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41㎢로 31.5%를, 논이 9.58㎢로 68.5%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상북도 동남부에 자리한 경주는 인구 약 27만 명 정도(2011년 기준)인 소도시이지만,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56명의 왕이 다스리며 천 년 동안 왕조를 이루어온 ‘신라’의 수도이자, 한국 문화의 원형이 되는 신라시대 역사와 문화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아주 특별한 도시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사로국(斯盧國, 서라벌)’이라는 작은 부족국가로 출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여 통일 왕국을 이루어냈으며, 안정된 국가 기반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매우 화려하고 찬란한 과학·문화·예술을 꽃피웠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일본은 물론 서아시아의 이슬람권과도 활발히 교류하였으며 세계를 향해 문호를 활짝 열어 이미 천 년 전에 국제도시의 명성을 만방에 떨쳤다.

전성기 때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무려 ‘17만 8936호’(약 90만 명)가 살았는데, 8세기 무렵인 당시 경주의 도시 규모와 번영의 정도는 비잔틴(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터키의 이스탄불), 이슬람제국의 수도 바그다드(현 이라크), 당나라의 수도 장안(현 중국의 시안)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번영했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문화재와 박물관일 만큼 숱한 명소들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다. 개국 이래 천 년 동안 도읍을 옮긴 적이 한 번도 없다 보니 천 년 왕국 신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한 곳에 집중된 것이다. 도시화되어 도로가 넓어지고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긴 했지만, 21세기 경주는 여전히 천 년 전 신라의 유적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경주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부처의 그 자체 남산지구"

고위봉(494m)과 금오봉(468m) 두 봉우리가 중심이 된 남산은 남북(10km)으로 길게 누운 모습으로 경주의 남쪽에 솟아 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골짜기가 깊고 능선이 변화무쌍하여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불상과 탑, 석등, 연화대좌 등 수많은 불교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적들은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두드러지기보다는 남산의 자연경관을 크게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가며 집단적으로 어우러진다. 산 전체를 기단부로 삼은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대표적인 예이고, 바윗면을 그대로 이용한 마애불이 특히 눈에 많이 띈다. 이 밖에도 남산 기슭에는 신라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을 비롯하여 신라의 천 년 역사를 마감하는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鮑石亭)’까지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역사적 장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불교가 신라에 전해진 이후 7세기 전반 경부터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몇 군데의 석축만 남아 있는 용장사지는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절을 감싸고 뻗은 동쪽 바위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데, 자연암석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기단과 탑신을 올렸다. 곧, 자연암석이 하층기단일 수도 있고, 그 아래 바위산 전체가 또한 하층기단일 수도 있는 셈이다.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스케일과 상상력으로 보면 세계 그 어느 석탑이 이에 견줄 수 있을까.

용장사지 삼층석탑의 스케일에 준하는 불상이 있다. 칠불암 위에 곧바로 선 남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신선암 마애보살상(높이 1.4m)이다. 불상은 마치 구름 위 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를 아래로 내려뜨린 채 유희하는 듯 편안한 자세(유희좌)이다. 풍만한 얼굴이지만 표정은 무심한 듯,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인간을 구제할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고 할까. 옷자락 역시 구름에 날려 흩어지는 듯 서서히 사라진다. 경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입지도 교묘하지만, 조각수법 하늘을 나는 듯 표현되어 있다.

천 년 왕조의 월성"

동서고금을 통해 천 년 동안 왕조를 이어온 나라는 매우 드물다. 더구나 경주가 한 왕조의 수도로서 천 년을 이어왔다면, 그 입지와 규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왕경(王京, 왕이 거처하는 왕궁을 중심으로 그 나라 수도의 근간을 이루는 공간을 이름)을 지방과 구분하였으며, 도시 구조도 정비하고, 정비된 왕경을 둘러싼 산성도 축조하였다.

신라 왕경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도시 전체가 네모 반듯한 바둑판 모양으로 정리되어 있었으며, 왕복 4차선에 해당하는 폭 15미터의 넓은 도로와 배수로가 나란히 건설되고 배수로 안쪽에 주택가가 들어섰을 만큼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도로는 인도와 마차가 다니는 차도로 나뉘었고, 주택가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을 피워 난방을 했을 정도로 쾌적했다. 숯을 피우면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이 없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절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섰을 정도였고, ‘금입택(金入宅)’의 고급 주택도 35채가 있었다고 한다. 귀족이나 일반인의 생활환경과 수준이 이러할진대, 왕이 살았던 궁궐은 어떠했을까?

신라 초기의 왕궁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정확치 않다. 다만, [삼국유사]의 기록 등에 근거하여 나정이나 오릉이 있는 서남산(西南山) 일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7월에 왕이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후 이 월성이 왕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월성은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이라고도 한다. 월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임해전(임해전은 신라 왕궁의 별궁으로,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딸린 인공 연못이 안압지이다)·첨성대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垓字)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 있다.

근래에는 계림(鷄林)과 첨성대 사이의 건물터와 성동동 전랑지(殿廊址)의 대규모 건물터 등이 발굴되어 그 동안 석연치 않았던 천 년 왕조 신라의 궁궐 규모와 위치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천 년을 한 터전에서 살아왔으니, 그 흔적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 왕경에 대한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신비감, 대능원"

경주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들만 보더라도 역사 문화 도시 경주의 정체성은 범상치가 않다. 처음부터 계획된 수도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넓어졌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뒤섞이게 된 것이다. 현재 경주 도심에는 높이가 23미터(황남대총)에 이르는 것부터 지상에서는 식별이 어려운 것까지 신라 고분 150여 기가 남아 있다.

특히 시내의 평지에 자리한 황남리고분군(대능원), 노동리고분군, 노서리고 분군은 신라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나가는 5~6세기 무렵에 축조된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규모와 출토 유물의 화려함에서 신라 고분을 대표한다. 이들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제 장신구, 유리잔, 토기, 천마도 등은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들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대능원이라 불리는 황남리고분군은 신라시대의 왕·왕비·귀족들의 능이 모여 있는 곳으로,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따온 이름이다. 천마총, 황남대총, 전 미추왕릉을 비롯한 능 20여 기가 있지만,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천마총은 발굴 당시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의 그림이 나와 붙은 이름이다. 발굴 조사된 고분 가운데 ‘대능원’ 안에 있는 ‘천마총’이 유일하게 그 내부가 공개되어 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지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땅을 파고 시신을 묻은 것이 아니라 그냥 평지 위에 시신을 놓고 그 위에 봉분을 얹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유물 가운데 금관도 출토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황남대총은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동서 길이 80m, 남북 길이 120m, 봉분 높이 23m). 두 개의 봉분이 잇닿아 있어 마치 표주박을 엎어 놓은 듯 한 모양이다. 발굴 결과 남쪽이 남자, 북쪽의 무덤이 여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남자의 묘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순장을 금한 지증왕 이전에 조성된 능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명성"

신라의 유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황룡사이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1238년)으로 불에 타, 지금은 건물과 불상의 주춧돌들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폐사지이지만, 지금의 경주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면적은 대단하다. 현재까지 조사된 황룡사지는 380,087제곱미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진흥왕 14년(553)부터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을 거쳐 경덕왕 13년(754)에 대종을 주조한 데 이르기까지 창건과 관련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황룡사의 창건이 삼국 통일의 국가로써 신라의 저력과 위상이 집약된 국가 사업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경내에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대종이 있었으며, 현대식 건물로 따져 20층은 족히 넘는 높이의 80여 미터짜리 구층목탑, 인도에서는 만들지 못하고 비로소 신라 황룡사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는 약 5미터 높이의 장륙존상(인도의 아육왕이 철 5만 5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서 불상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계속 실패하기에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이것이 신라 앞바다에 당도하여 비로소 황룡사 장륙존상을 조성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등이 있었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황룡사의 위용은 폐사지인 지금도 그 장엄함과 웅혼함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웃한 아홉 나라에게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성격으로 세운 구층목탑은 경주 도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라 최고의 상징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황룡사와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분황사역시 신라의 대표적인 승려인 원효와 자장이 머물렀던 신라의 대표적인 명찰이다.

수도 외곽을 방어"

경주는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산성이 많은데, 산성 가운데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경주의 동쪽에 자리 잡은 명활산(266m)에 쌓은 명활산성이다. 경주 서쪽의 선도산성, 남쪽의 남산성과 더불어 당시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으며, 475년 자비왕이 거주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규모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성벽을 쌓았는데, 이는 신라 초기의 축조방식이다.

경주는 한 나라의 수도로서 천 년을 유지해온 흔치 않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와 중세를 거쳐온 역사 도시로서 오늘날의 현대 도시로 이어진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물다. 2천 년을 이어온 경주의 이와 같은 역사성, 문화성은 도저히 복제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한국 문화의 원형이 탄생된 공간이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경주에 감탄하며 열광하는 이유 또한 경주를 고대와 현대가 행복한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는 명품 도시로 가꾸어 나가야 하는 근거가 된다.

유네스코는 신라 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경주에 ‘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을 붙여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크게 불교 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 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고분군 분포 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 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 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나뉘다. 도시 전체에 걸쳐 많은 수의 유적이 산재하니 하나하나 등록하지 않고 지역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역별로 등재하다 보니, 지구로 묶이지 못해 빠지거나 현장을 떠나 있는 이유로 세계유산 목록에 오르지 못한 유물도 상당수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여러 유물들이 그러한 예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등재된 문화재의 수는 52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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