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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롤모델 미국 경제 역사에 대해서

미국 경제의 역사.

미국 경제의 뿌리는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의 경제적 안정을 찾아 유럽에서 건너온 정착민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대륙은 처음엔 가까스로 수지가 맞는 식민지경제에서 소규모의 독립적인 농업경제로, 나중에는 매우 복잡한 산업경제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경제적 진화에 발맞추어 미국은 복잡하고 다양한 기구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면서도 정부의 개입 정도는 점점 더 커졌다.

북아메리카의 첫번째 주민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베링 해협이 있는 아시아에서 육로를 통해 2만 년 전에 아메리카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유럽 탐험가들은 미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곳이 인도인 줄로만 알고 그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이 토착 종족들은 소수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어떤 경우엔 다른 부족과 연합하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물물교환을 했고 다른 대륙의 사람들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럽 이민자들이 정착하기 전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도 말이다. 원주민들이 발달시켰던 경제 시스템은 그곳에 정착한 유럽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북아메리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유럽인은 바이킹이었다. 그러나 1,000년경에 일어난 그 사건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유럽 사회는 대부분 농업과 지주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아직 상업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터라 바이킹들은 북아메리카를 탐험하거나 정착할 만한 동기를 갖지 못했다.

1492년 이탈리아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깃발을 배에 꽂고 아시아로 가기 위해 남서쪽 항로를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그후 100년 동안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의 탐험가들이 신대륙의 황금과 부, 명예와 영광을 찾아 유럽 대륙에서 건너왔다.

그러나 초기 개척자들은 북아메리카의 황무지에서 영광도 금도 찾지 못했으며, 대부분 정착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북미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은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1607년에 한 무리의 영국인들이 훗날 미국의 모태가 된 최초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제임스타운이라고 부르는 정착촌은 오늘날의 버지니아에 위치한다.

1) 식민지 건설.

초기의 정착민들은 다양한 이유로 신대륙에 건너왔다. 매사추세츠의 최초 이주자들은 신앙심이 두텁고 자기절제가 강한 영국인들로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버지니아를 비롯해 다른 이주민촌의 사람들은 주로 사업적인 모험을 위해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자유와 부, 이 모두를 얻으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영국인들이 정착에 성공하여 나중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은 특허회사(charter company)를 이용한 덕분이었다. 특허회사는 개인의 경제적 이익과 영국의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주주들(보통 상인과 부유한 지주들이었다)이 세운 회사였다. 왕은 그들이 회사를 세우기 위해 자금을 조달할 때 경제적 권리뿐만 아니라 정치적·사법적 권위도 허가하거나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생각만큼 수익을 거두지 못하자 영국 투자가들은 식민지개발 허가증을 정착민들한테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비록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도 한몫했다. 어쨌든 식민주의자들은 그곳에 남았고 자신들의 삶과, 자신들의 마을과, 자신들의 경제를 일궈나갔다. 더 나아가 새로운 나라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다.

초기 식민지의 번영은 모피 가공 무역 덕분이었다. 수산업도 매사추세츠가 부를 축적하게 된 일차적인 원천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전체로 보면 주로 소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생활했고,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해했다. 몇몇 소도시나 북캘리포니아, 남캘리포니아, 버지니아의 대규모 농장에서는 담배나 쌀, 인디고1)를 수출하고 생필품이나 사치품을 수입하기도 했다.

식민지가 성장하면서 보조적인 산업도 발달했다. 전문적인 제재소와 제분소도 여럿 등장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고기잡이 배, 그리고 나중엔 교역용 배도 만들기 위해 조선소를 세웠다. 또한 소규모 제련소도 설립했다. 18세기까지 지역마다 발전의 패턴을 달리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뉴잉글랜드의 식민지는 조선을 주업으로 하고 항해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메릴랜드나 버지니아, 캘리포니아의 대규모 농장(많은 농장이 노예를 이용했다)에서는 담배와 쌀, 인디고 농사를 했다. 뉴욕과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델라웨어 같은 중부의 식민지는 곡물과 모피를 배로 수출했다. 노예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점차로 나아졌다. 사실은 영국에 사는 사람들보다도 생활수준이 높았다. 영국인 투자가들이 철수했기 때문에 식민지는 이주민들 중에서 기업가들에게 개방되었다.

1770년경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는, 제임스 1세(1603~1625) 이후 영국의 정가를 뒤흔들었던 자치정부 운동에 동조할 만큼 정치적·경제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세금과 여타 문제를 두고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영국이 정한 세율과 법규를 자신들의 뜻대로 고쳐줄 것을 요구했다. 영국 정부와의 분쟁이 격화되자 어떤 사람들은 영국과 전쟁을 벌이면 식민지가 독립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영국의 정치적 혼란과 마찬가지로 미국혁명(1775~1783)은 ‘생명과 자유와 부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르짖는 중산층이 등장함으로써 가능했다. 이 구호는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의 〈시민정부에 대한 제2논고(Second Treatise on Civil Government)〉(1690)에서 인용한 것이다. 전쟁은 1775년 4월에 벌어진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다. 영국 군인들이 매사추세츠 콩코드의 한 식민지군 무기보급소를 공격하여 식민지 민병대와 충돌했다. 그때 누군가가(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총을 쏘았고, 그것을 기화로 8년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미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이 전쟁의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2) 새로운 국가의 경제.

1787년에 제정되어 지금도 효력을 발휘하는 미국 헌법은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천재의 작품이었다. 메인주부터 조지아, 애틀랜틱 해에서 미시시피밸리까지 전국에 설치되었던 경제특별허가지역은 이를테면 단일화된 ‘공동’ 시장이었다. 이곳에서는 관세도 없었고 주 간의 거래에 붙는 세금도 없었다. 그 외에도 헌법은 연방정부가 해외교역이나 주 간의 교역을 중재하고, 단일화된 파산법을 만들고 화폐를 발행하여 그 가치를 통제하고, 표준화된 도량형을 정비하고, 우체국과 철도를 건설하고, 특허권과 저작권을 관리하는 규정을 세우도록 명시해놓았다. 특히 20세기 말에야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지적 재산권’의 가치도 당시 사람들은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이자 초대 재무부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연방정부가 공개적인 보조금을 제공하고 수입품에 대한 보호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걸음마 단계의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경제발전 계획을 옹호했다. 또한 그는 연방정부가 국립은행을 세우고 혁명전쟁시에 식민지가 떠안았던 공적 부채를 부담하라고 촉구했다. 새로운 정부는 해밀턴의 제안 중 몇 가지에 대해선 주저하기도 했지만, 관세 조항은 미국의 중요한 대외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처음에 농부들은 국립은행이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부자들의 뒤를 봐주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최초의 국립은행은 1791년에 허가를 받아 1811년까지 영업을 계속했고, 그후에는 후발 은행이 허가를 받아 영업을 시작했다.

해밀턴은 미국이 운송·제조·금융 등 다양한 산업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밀턴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일반 국민들을 정치적·경제적 독재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기본 철학을 갖고 있었다. 특히 소농을 ‘가장 귀한 시민’으로 칭송하였다. 1801년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1801~1809 재임) 그는 더욱더 지방분권의 중농민주주의를 장려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3) 가자, 서남부로.

면화는 남부에서 가장 먼저 소규모로 생산했는데, 1793년 엘리 휘트니(Eli Whitney)가 원면에서 씨앗과 불순물을 분리하는 조면(繰綿) 기계를 개발한 후로 면화 재배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남부의 농장주들은 당시 서쪽으로 이주해가던 농민들에게 땅을 사들였다. 그런 다음 노예들을 이용해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을 했고 몇몇 가문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그 당시 서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모두 남부 출신들은 아니었다. 동부에서는 마을 전체가 이주하여 중서부의 비옥한 농토에 새롭게 정착하기도 했다. 흔히 서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거칠고 독립적인 성격에다 정부의 지배나 간섭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의 도움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받았다. 정부가 건설한 컴벌랜드 파이크(Cumberland Pike, 1818년)나 이리 운하(Erie Canal, 1825년) 같은 국립 도로와 수로는 새로운 정착민들이 서쪽으로 이주하고 훗날 서부의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많은 미국인들은 1829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류 잭슨을 영웅으로 여겼다. 그가 변두리 지역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잭슨 대통령(1829~1837 재임)은 해밀턴이 세운 국립은행의 후발 은행을 설립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농민들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을 때 잭슨은 은행의 허가권을 부활시키는 데 반대했으며 의회의 지지도 얻어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국가의 금융제도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었고 1834년과 1837년에는 산업계에 공황이 일어났다.

19세기 들어 미국 경제는 주기적인 경제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속히 성장했다. 새로운 발명품과 금전적 투자가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키고 경제성장을 일구어냈다. 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운 시장이 끊임없이 개방되었다. 증기선 덕분에 강을 이용한 운송이 더 저렴하고 빨라졌지만 철도의 발달만큼 파급효과가 크지는 못했다. 전국으로 뻗어나는 철로 덕분에 새로운 영토가 계속 개발되었다. 운하나 도로와 마찬가지로 철도 역시 초기에 건설될 때에는 정부에서 토지를 무상불하해주는 식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더욱이 철도는 다른 교통수단과 달리 국내는 물론이고 유럽의 개인 투자가들의 구미를 당겼다.

변화무쌍한 시대답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계획들이 난무했다. 금융에 통달한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큰돈을 벌었지만, 동시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저축했던 돈을 날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비전과 외국인 투자가 결합되고 금의 발견과 미국의 공적·사적 부가 투입되어 국가는 대규모로 철도를 건설하고 국가 산업화를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4) 산업의 성장.

유럽의 경우 산업혁명은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에 시작되었으며, 이는 아주 빠른 속도로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미국 인구의 16퍼센트는 도시 지역에 살았으며, 국가 수입의 3분의 1은 제조업에서 나왔다. 도시화된 산업은 주로 북동부에 몰려 있었다. 신발제조업, 모직과 면직물 산업이 주도적이었고 기계류 산업도 활발하게 발달했다. 노동력의 상당수는 이민자 출신들이었다. 1845년과 1855년 사이에 30만 명의 유럽 이민자들이 해마다 이주해왔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했으며, 배를 타고 처음 도착한 항구 근처에 있는 동부의 도시에서 살았다.

한편 남부는 농업지대로, 자본과 공산품 등을 북부에 의존했다. 노예제도를 비롯해 남부의 경제적 수익은 남부가 연방정부를 장악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정치 권력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856년에는 산업화된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공화당이 창당되었다. 1860년, 공화주의자들과 그들의 대통령 후보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경제정책에 관해선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1861년 그들은 보호관세의 채택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1862년에는 최초의 퍼시픽 레일로드를 건설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1863년과 1864년에는 국립은행 규약의 초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1861~1865)에서 북부가 승리하자 국가의 운명과 경제적 시스템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자 남부의 대규모 목화 플랜테이션은 과거만큼 많은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반면에 북부의 산업은 전쟁 수요로 급격히 팽창하였다. 산업주의자들은 사회나 정치 문제를 비롯해 국가의 여러 분야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또 남부의 농업귀족들은, 그로부터 70년 후에 만들어진 고전적인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감상적으로 묘사되었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5) 발명과 발전, 그리고 실업계의 거물.

남북전쟁 이후 급속히 이루어진 경제적 발전은 현대 미국 산업경제의 초석이 되었다. 새로운 발견과 발명품이 급증하면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제2의 산업혁명’이라고 불렀다. 서부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석유가 발견되었다. 타자기도 발명되었다. 철도에서는 냉동차가 생겨났다. 전화와 사진, 전구도 발명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마차를 대신하는 자동차가 발명되었고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다.

이런 빛나는 위업과 함께 국가의 산업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펜실베이니아 남부에서 켄터키에 이르는 애팔래치아 산맥에는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드웨스트 위쪽의 레이크 슈피리어 지역에서는 대규모 철광석 광산이 개발되었다. 이 두 가지 원료를 한군데로 모아 철강을 생산해내는 제철소도 번성했다. 대규모 동과 은 광산도 개발되었고, 뒤이어 납과 시멘트 공장들도 생겨났다.

산업이 번성함에 따라 대량생산 방식도 개발되었다. 19세기 말, 과학적 경영의 개척자인 프레드릭 W. 테일러(Frederick W. Taylor)는 근로자들에게 다양한 업무를 배분한 다음 좀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진정한 대량생산 방식은 1913년 헨리 포드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그는 자동차를 생산할 때 종업원들이 한 가지의 간단한 작업만 담당하는 작업 라인을 설치하였다. 게다가 헨리 포드는 종업원들에게 일당 5달러라는 비교적 후한 임금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사도록 함으로써 사업을 확장하였다. 당시로서는 선견지명이 있는 경영방식이었다).

19세기 후반부의 ‘부호의 시대’에는 재계 거물의 신기원을 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거대한 재정왕국을 건설한 재계 거물을 이상적인 인물로 영웅시했다. 그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잠재력 있는 새로운 서비스나 제품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석유를 그렇게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경제적 성공과 권력 추구라는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경쟁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록펠러나 포드 외에도 제이 굴드(Jay Gould)는 철도로 많은 돈을 벌었고 J. 피어폰트 모건(J. Pierpont Morgan)은 금융업으로,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철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어떤 거물은 그 시대의 사업상 도의를 따르는 정직한 사람이었는가 하면 어떤 거물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힘과 뇌물과 배신을 이용하기도 했다. 좋든 나쁘든 사업상의 이권은 정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모건은 가장 화려한 명성을 누렸던 기업가로, 개인으로도 사업가로도 대단한 번영을 구가했다. 그와 동료들은 도박을 하고 요트를 타고 사치스런 파티를 열고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으며 유럽의 예술작품들을 사들였다. 반대로, 록펠러나 포드 같은 사람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들은 소박한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고수했으며, 독실한 신도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꼈다. 인간적인 덕을 쌓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근면과 절약을 신조로 삼았다. 훗날 그들이 남긴 유산은 미국에서 가장 큰 자선 재단을 설립하는 기금으로 쓰였다.

유럽의 상류층 지식인들은 대체로 사업을 경멸하는 편이었지만, 비교적 유동적인 조직사회에서 살고 있었던 미국인들은 돈 버는 방법이라면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그들은 사업적인 모험과 흥미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생활수준의 향상 또는 안락한 삶 같은 잠재적 대가를 즐겼고 성공이 가져다줄 갈채를 마음껏 누릴 줄 알았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미국 경제가 성숙 단계로 접어들자 자유분방하던 재계 거물들은 미국인의 우상으로서 그 빛을 잃었다. 주식회사의 등장과 함께 재계 판도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가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철도 사업이었으며, 이후 여러 분야에서 생겨났다. 경제계의 귀족들은 월급을 많이 받는 관리자이자 나중에는 회사의 대표가 되는 ‘전문가 출신 관리자’들로 대체되었다. 한편 주식회사가 부상하면서 조직화된 노동운동은 비즈니스의 권력과 영향력에 반작용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기술혁명은 새로운 기업가문화를 낳았으며, 또 한차례 부호의 시대를 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판매하여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게이츠가 얼마나 많이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야말로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1990년대 말 그의 회사는 미국 법무부의 반독점규제국에 의해 경쟁사를 협박하고 독점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제소되었다. 하지만 게이츠는 자선단체를 설립하여 자선기금 기부자 명단에서도 최고가 되었다.

게이츠처럼 오늘날의 미국 사업가들은 대부분 고자세로 살지 않는다. 그들은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지만 학교나 자선단체의 이사로 봉사하기도 한다. 또한 국가 경제나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정부 관료와 의논하기 위해 기꺼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날아간다. 틀림없이 그들은 정부에 영향을 주지만 부호 시대의 몇몇 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부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6) 정부의 개입.

미국 역사상 초기에는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이 교통을 제외한 민간 부문의 사업에 연방정부가 깊숙이 관여하는 것을 꺼렸다. 그들은 정부와 법을 제정하고 질서 유지에 필요한 일이 아닌 한 경제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는 레세페르(laissez-faire, 무간섭주의)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후반 소규모 자영업자나 농민, 노동단체가 정부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중재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중산층이 생겨났다. 그들은 비즈니스 엘리트와 급진적인 정치운동을 벌이는 중서부 및 서부의 농부, 노동자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진보당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람들은 경쟁과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정부가 경제 문제에 개입하길 원했다. 한편 그들은 공공 분야에서 벌어지는 부패와도 맞서 싸웠다.

1887년 의회는 철도회사의 관행을 규제하는 주간통상법(the Interstate Commerce Act)을 제정했고, 1890년에는 한 개의 대기업이 하나의 사업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셔먼 반독점법, Sher-man Antitrust Act)을 발효시켰다. 그러나 이런 법은 1900년과 1920년 사이에 공화당 대통령 테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901~1909 재임), 민주당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913~1921 재임)과 기타 진보당의 이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기 전에는 강력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의 규제 기관인 주간통상위원회(the 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 식품의약국,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와 같은 기관들은 모두 그 시기에 창설되었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일은 특히 1930년대 뉴딜 정책이 시행되던 기간에 많이 증가하였다. 1929년의 증권시장 붕괴는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적 혼란기인 대공황(1929~1940)을 초래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비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펼쳤다.

오늘날 미국 경제를 특징짓는 주요 법안이나 기관들이 탄생한 것은 대부분 뉴딜 시대였다. 뉴딜 법안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금융, 농업, 공공복지 분야까지 확대시켰다. 그리고 시간당 수당에 대한 최소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철강이나 자동차, 고무산업으로 노동운동이 확대되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오늘날 국가가 경제를 움직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이나 기관들은 거의 그 시기에 창설되었다. 여기에는 주식시장을 감독하는 증권거래위원회, 은행 예금을 보증하는 연방예금보험공사, 그리고 노인들이 젊었을 때 납부한 기금을 가지고 연금 형태로 지급하는 사회보장 시스템 등이 있다.

뉴딜 법안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기업과 정부가 서로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고심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 중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폐기되기도 했다. 뉴딜 법안 가운데 생명력이 가장 짧았던 것은 국가산업부흥법(the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으로, 국가의 감독하에 기업의 관리자와 근로자들이 갈등을 해소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법안이었다. 미국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기업과 노동자와 정부가 타협했던 것처럼 전체주의로 기울었던 적은 없지만, 뉴딜 정책의 제안자들은 기업과 노동자와 정부라는 경제 주체들 사이에 새로운 권력을 분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미국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일은 전쟁이 일어나면서 더욱 심해졌다. 당시에 전시생산국(the War Production Board)은 군수품 조달이 최우선으로 이루어지도록 국가의 생산능력을 조절하였다. 따라서 소비자들 위주로 생필품을 생산하던 공장에서 군사용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 공장에서는 탱크와 비행기를 만들었고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의 무기고’가 되었다. 국가의 수입이 증가하자 정부는 생필품 부족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는 것을 막으려고 물가관리국(Office of Price Administration)을 신설하여 주택임대료를 억제하고 설탕에서 석유까지 모든 생필품을 배급제로 바꾸었으며 다른 경우에도 물가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7) 전후 경제 : 1945~1960년.

많은 미국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군사비 지출이 삭감되면서 곧장 대공황 때의 시련기로 되돌아가는 게 아닐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억눌려왔던 소비욕구가 분출하면서 전후 경제성장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자동차산업은 성공적으로 원래의 자동차를 만드는 일로 다시 돌아갔고, 항공기 제작이나 전자제품 생산과 같은 새로운 산업이 성큼성큼 성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군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주택을 구입할 수 있도록 주택자금을 쉽게 대출해주자 주택건설 붐이 일어났다. 국가의 총생산량이 1940년의 2천억 달러에서 1950년이 되자 3천억 달러로, 그리고 1960년에는 5천억 달러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와 함께 ‘베이비 붐’이라고 하는 전후 출산율이 크게 증가하면서 소비자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그리고 더 많은 미국인이 중산층 대열에 합류했다.

군수품 생산의 필요성은 군수산업을 거대하고 복잡하게 발전시켰다(군수산업이라는 용어는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만들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위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미국은 소련과 냉전체제에 돌입함으로써 실질적인 전투능력을 유지해야 했다.

또 수소폭탄 같은 정교한 무기를 연구하기 위해 군사비 지출을 줄이지 않았다. 더욱이 마샬 플랜(Marshall Plan)에 따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 국가에 경제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미국 물자의 시장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또한 정부는 경제적인 문제에서 정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1946년에 제정된 고용법은 ‘고용과 생산과 구매력을 최대한 장려하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미국은 전후에 국제적인 통화관리를 재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선두에 서서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l Monetary Fund)과 세계은행(World Bank)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이 기구들은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개방경제를 보장하기 위한 취지로 세워졌다.

그러는 사이 기업은 합병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기업들은 거대하고 다양한 복합기업으로 합병되었다. 예를 들어 국제 전신전화회사(International Telephone and Telegraph)는 쉐라톤 호텔과 콘티넨탈 은행, 하트포드 화재보험, 아비스 렌터카 등의 여러 기업을 사들였다.

노동력의 성격도 크게 변화하였다. 1950년대 들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제조업에 종사는 근로자들의 숫자에 육박하더니 얼마 안 있어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더 많아졌다. 1956년경 미국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생산직보다 화이트칼라 위주였다. 동시에 노동조합은 장기고용 계약을 맺고 직원들에게 다양한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농민들에게는 어려운 시기가 닥쳐왔다. 농업이 대규모로 기업화됨에 따라 곡물이 필요 이상으로 과잉생산되었다. 소규모 가족 영농은 점점 더 경쟁력을 잃었고, 결국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났다. 그 결과, 1947년에는 790만 명이던 농업인구가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더니 1998년에는 겨우 340만 명이 농업 관련 일에 종사했다.

농민이 아닌 사람들도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 핵가족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도심을 떠나 교외로 이주했다. 에어컨이 발명되자 남부와 남서부의 휴스턴, 애틀랜타, 마이애미, 피닉스와 같은 이른바 ‘선 벨트(Sun Belt)’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정부의 주도하에 고속도로가 건설되자 교외 지역으로 나가는 일이 한결 쉬워졌으며 산업 형태도 변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에는 8개밖에 없던 쇼핑센터가 1960년에는 3,840개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사람들이 교외로 이주하고 많은 산업들도 이를 뒤따라가자 자연스럽게 도시공동화가 진행되었다.

8) 변화의 계절 : 1960~1970년대.

미국인들에게 1950년대는 만족스러웠던 시기인 반면,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대격변의 시대였다. 세계적으로 신생국가가 탄생했으며 기존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란이 일어났고, 미국에 맞먹을 만큼 경제적인 강국으로 성장한 나라도 생겨났다. 또한 경제력 있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군사력만이 성장과 확대의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인식이 점점 커져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1961~1963 재임)은 강력한 통치력을 지니기 위해 행동주의자적인 접근방법을 활용했던 선도적인 인물이다. 그는 1960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프런티어’의 도전에 대응하라고 외쳤다. 대통령이 된 그는 정부 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삭감함으로써 강력한 경제성장책을 썼으며, 노령자를 위한 의료 지원을 강력히 지시하고 대도시 빈민촌을 구제하며 교육 기금을 확충했다.

미국인을 개발도상국으로 파견하여 지원하려는 케네디의 비전은 평화봉사단의 설립으로 현실화되긴 했지만 그가 제안한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실행으로 옮겨지진 못했다. 또 케네디는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에 착수했다. 그가 죽은 후에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은 소련을 뛰어넘었고 1969년에는 미국인 우주비행사가 달에 착륙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63년 케네디의 암살로 국회는 그의 입법안을 대부분 법률화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후임인 린든 베인즈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63~1969 재임)은 더 많은 시민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나누어주는 ‘그레이트 소사이어티(Great Society)’ 정책을 펼쳤다. 정부가 메디케어1), 푸드 스탬프2), 수많은 교육사업3)과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실시하다보니 연방정부의 지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면서 군사비 지출도 늘어났다. 케네디가 재임할 당시엔 소규모 국지전으로 시작했던 것이 존슨 재임 기간에는 군사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비 지출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난과의 전쟁과 베트남전쟁 모두 단기간에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정부가 인플레이션 억제책으로 세금을 인상하는 데 실패하면서 성장률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1973년과 1974년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회원들 간에 석유생산량을 줄이기로 결정함에 따라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고 에너지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심지어 생산량 감축이 끝난 후에도 에너지 가격은 계속해서 오르고, 거기다 인플레이션까지 겹쳐서 실업률도 높아졌다. 연방정부 예산은 적자였고 외국과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주식시장은 침제되었다.

베트남전쟁은 지지부진하게 1975년까지 계속되었고 탄핵 위기에 처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Richard Nixon, 1969~1974 재임)은 사임했고, 미국인들이 1년 넘게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인질로 잡혀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가는 경제문제를 비롯해 어떠한 사건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동차에서부터 강철,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값도 싸고 품질도 좋은 수입품들이 늘어나자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서 기업활동이 침체되고 실업률이 계속해서 높아지는 경제 상황을 가리켜 ‘스테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고 한다. 사실 인플레이션은 그 자체로 장점도 있지만 단점이 더 많다. 사람들은 물건 가격이 계속해서 오를 것이라 생각하고 더 많이 사들인다. 이렇게 수요가 증가하면 가격도 상승하고, 임금 인상에 대한 요구도 생겨나며 물가는 더욱 오르고 다시 수요와 가격 등이 따라서 올라가게 된다.

근로계약서에는 생계비에 관한 항목이 자동으로 들어가게 되고, 정부는 대표적인 인플레이션 척도인 소비자 물가지수에 따라 사회보장 따위의 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은 근로자나 퇴직자들이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도록 도와주긴 했지만 끝없는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방치한 꼴이었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기금은 자꾸만 늘어나서 적자 예산이 되었고, 정부는 차관을 사용하는 바람에 이자 압박을 받으며, 기업과 국민들의 부담은 더욱 증가했다. 에너지 가격과 이자율이 높아지면서 기업의 투자는 감소하고 실업률은 위험수위까지 올라갔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취임한 지미 카터(Jimmy Carter, 1977~ 1981 재임) 대통령은 경제의 악순환을 타파하고 정부 지출을 늘려 실업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했으며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근로자들이 스스로 임금을 내리고 생산자가 가격을 낮추도록 정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대신 항공, 화물트럭, 철도를 비롯해 여러 산업의 ‘규제를 철폐함으로써’ 완만하게 인플레이션을 잡았던 것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 산업은 그동안 요금이나 노선 등에서 정부의 철저한 보호와 규제를 받아왔다. 이러한 규제 철폐는 카터 행정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80년대에는 정부가 은행 이율이나 장거리통신 요금에 대한 통제를 완화시켰으며 1990년대에는 지역전화 요금에 대한 규제마저 풀어주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1979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통화 공급을 단속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통화량의 공급을 억제함으로써 이율을 올렸다. 그 결과, 소비자 지출과 기업 대출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경제는 곧 깊은 침체 속으로 빠져들었다.

9) 1980년대 경제.

1982년 내내 미국은 깊은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전년도에 기업은 50퍼센트나 도산했다. 특히 농민들이 타격을 많이 입었다. 농산물 수출이 줄어들고 곡물 가격이 떨어졌으며 이자는 올라갔다. 이에 정부는 급히 해결책을 모색했다. 경기 하락을 해결하기 위해 급히 처방한 치료약은 삼키기엔 힘이 들었지만, 경제가 처해 있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었다. 1983년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경제는 반등하기 시작했으며 경제성장도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내내, 그리고 1990년대 들어서도 인플레이션 비율은 5퍼센트 아래를 밑돌았다.

1970년대의 경제 격변은 중요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인들은 1980년에 카터를 낙선시키고, 헐리우드 배우이자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1981~1989 재임)을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연방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레이건 정부는 세율을 줄여서 수입을 늘리는 공급 측면 경제학 이론에 충실한 경제정책 기조로 나아갔다.

이 이론은 세율을 낮춤으로써 사람들이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하도록 하고, 이렇게 하면 결국 더 많은 저축과 투자가 이루어져 생산성이 높아지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레이건이 추진한 감세정책은 주로 미국의 부유층에게로 이익이 돌아갔지만, 감세정책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은 기업투자가 많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일자리도 많아지고 임금도 올라가기 때문에 저소득층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이건이 생각했던 국가적 아젠다의 중심주제는 연방정부가 그동안 너무 비대해졌고 경제에도 지나치게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 초에 그는 세금을 삭감하는 동시에 사회 프로그램을 수정하는 대수술에 들어갔다. 또 임기 내내 소비자나 근로현장, 그리고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 규제를 줄이거나 철폐하는 데 주력했다. 한편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의 전철을 밟아 군사력 증강에 소홀해질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국방비 예산을 크게 늘렸다.

감세에다 높은 국방비 지출은 국내 정책에 지출해야 할 예산을 더욱더 삭감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결국 연방 예산적자는 1980년대 초의 경기침체기 때보다 훨씬 불어나게 되었다. 연방정부의 적자는 1980년에 740억 달러에서 1986년에는 2,210억 달러에 이르렀다. 1987년에는 1,500억 달러로 떨어졌지만 이후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연방정부의 과다한 지출과 차입이 인플레이션을 다시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물가상승을 조절하기 위해 불침법을 서면서 위험신호가 보일 때마다 재빨리 이자율을 인상했다. 의장인 폴 볼커(Paul Volcker)와 그의 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의 지휘하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경제의 교통경찰 역할을 수행하면서 국가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데 의회나 대통령을 뛰어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1980년대에 비로소 경제회복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농민들, 특히 소규모 가족영농을 하는 농민들은 계속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특히 1986년과 1988년에 미국의 중부 지방에 심각한 가뭄이 닥쳤고 몇 년 후에는 홍수를 겪었다. 몇몇 은행은 금융 경색에 무분별한 대출 관행으로, 특히 저축대부조합이라고 하는 곳은 부분적인 규제완화 이후 흥청망청 대출을 남발하다가 휘청거리기도 했다. 연방정부는 이런 금융 기관들의 문을 닫게 하고, 납세자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치면서 예금자들에게 예금액을 지급해주었다.

레이건과 그의 후임자 조지 부시(1989~1993 재임) 대통령 임기중에는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했고, 1980년대에도 1970년대에 국가를 괴롭혔던 경제적 병폐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은 1970년대 들어서는 10년 중 7년 동안 무역적자를 기록했고, 1980년대를 거치면서 무역적자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게다가 빠르게 성장한 아시아는 경제의 발전소였던 아메리카 대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특히 장기적인 경제계획과 기업, 정부, 금융이 긴밀히 관계를 맺고 효율적으로 협력했던 일본은 미국을 대신해 경제성장의 대안적인 모델처럼 보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기업들의 주식 가격을 끌어내린 뒤 재가공하여 경영권을 되팔거나 분해하는 ‘기업사냥꾼’이 등장했다. 기업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자기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거나, 아예 기업사냥꾼에게 돈을 지불하기도 했다. 이런 다툼을 우려하며 비판하는 사람들은 기업사냥꾼이 좋은 기업을 망가뜨리고 근로자들에게 슬픔을 안겨주며 기업을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냥꾼이 경제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이 부실한 기업을 인수하여 조직을 슬림화한 후 다시 수익을 내는 회사로 변신시키거나, 투자자들에게 되팔아서 이익을 얻을 수도 있게 하고 그들이 재투자하여 생산성 있는 기업으로 거듭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10) 1990년대를 지나서.

1990년대에는 새로운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 1993~2001 재임)이 있었다. 신중하고 온건한 민주당원이었던 클린턴은 전임 대통령들과 몇몇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목소리를 냈다. 의료보험 수혜자를 확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의회에 의해 좌절된 후 클린턴은 미국에서 ‘큰 정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몇몇 부문에서 시장세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의회와 함께 지역 통신 서비스를 경쟁체제로 개방하였다.

또한 복지혜택을 줄이기 위해 공화당과 손을 잡기도 했다. 클린턴은 지속적으로 연방정부의 업무 영역은 줄여나갔지만 국가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뉴딜 정책의 중요한 혁신 과제 대부분과 그레이트 소사이어티 정책의 장점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계속해서 경제활성화의 전반적인 속도를 조절하고 인플레이션이 재발되는 징후가 보이는지 감시하게 했다.

그러는 사이 경제는 1990년대를 통과하면서 급속히 튼튼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정권이 몰락하면서 그들과 교역할 기회가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다. 기술 발전은 복잡하고 새로운 전자제품의 영역을 넓혀주었다. 원격통신과 컴퓨터 네트워킹 분야의 기술혁신은 방대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산업을 발전시켰고 기업들의 운영방식에 혁신을 가져왔다.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기업의 수익은 놀랄 만큼 증가했다. 낮은 인플레이션과 낮은 실업률, 거기에다 높은 수익성으로 주식시장이 폭등했다.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1970년대에 겨우 1000포인트였던 것이 1999년에는 11,000포인트를 기록했고,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미국인들이 부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반면에 1980년대 미국인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던 일본 경제는 장기 침체로 돌입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더 유연하고 덜 계획적이고 더 경쟁적인 미국 방식이 새로운 세계경제 통합 환경에는 더 나은 전략이라고 결론지었다.

미국의 노동력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특색 있게 변화했다. 장기적인 추세에 따라 농민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가게 점원에서 재정분석가까지 다양한 서비스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더이상 철강과 신발이 미국의 제조업을 이끌어가지 않았으며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1992년에 2,900억 달러로 최고를 기록한 후 연방예산은 경제 성장으로 세수는 늘어났지만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1998년 정부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비록 베이비 붐 세대에게 지급할 미래의 사회보장기금 형태로 많은 빚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빠른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낮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자 이에 놀란 경제학자들이 지난 40년 간의 경험을 근거로 들며 과연 미국의 ‘새로운 경제’가 언제까지 빠른 성장을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마지막으로 미국 경제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세계경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클린턴은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무역장벽을 없애는 정책을 추진했다. 북아메리카 자유무역협정(NAFTA)은 미국과 가장 큰 교역상대국인 캐나다와 멕시코 간의 경제적 유대를 한층 더 돈독히했다. 1980년대에 급속히 성장한 아시아는 유럽과 함께 완성품의 주요 공급자이자 미국 수출품의 중요한 시장이 되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세계 통신 시스템은 세계의 자본시장을 하나로 연결시켜주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세계경제 통합이 모든 나라에 이익이 되지만 상호의존도가 깊어지면 그만큼 혼란스러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첨단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근로자들(미국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다)은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지만 전통적인 제조업 부문에서는 더 낮은 임금을 받는 외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임금 수준이 내려가는 추세이다. 1990년대 말 일본과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이 휘청거리자 세계 금융시스템에 충격파가 밀려왔다. 미국의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국내 경제의 방향을 잡는 데 있어 세계경제의 상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여전히 미국인들은 자신감을 회복한 채 1990년대를 마감했다. 1991년 3월부터 1999년 말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미국 경제는 역사상 가장 긴 평화기를 누렸다. 1999년 11월 현재 실업률은 겨우 4.1퍼센트로 3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리고 소비자물가는 1998년에 겨우 1.6퍼센트 상승했고(1964년 이후 1년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조금씩 증가했다), 1999년에 다소 빠르게 상승했다(10월에 2.4퍼센트). 여전히 많은 도전들이 도사리고 있지만 미국은 20세기를 헤쳐오면서 더욱 튼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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