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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픽셀프 2018. 10. 25.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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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태어났네 금산이라 인산밭이 많은 동네인가? 동네의 부호로 태어나 지주의 아들이었네! 막내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네...

1905년 대한제국 말기로 일본이 우리의 경제권을 강제로 착취하고 이미 자본으로 수족을 붙들어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었던 때이네 그래서 1910년 정도돼면 한일병합이 아니더라도 이미 경제적으로 모든 활동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네! 집요한 놈들 싸그리 쓸어버릴수도 없고

역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이미 대한민국을 무호흡 상태로 만들었고 거기에 외국자본으로 경인선 철도를 부설하여 경제적으로 완전히 종속되도록 하였다. 일본은 완전히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이미 무호흡 상태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1908년 처음으로 설립하여 조선의 경제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그 첫째로 토지조사사업을 하여 농촌을 붕괴하여 그 당시 농업은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되었던 터라 조선의 경제권을 일차로 식물경제로 만들려고 한 의도돌 40%의 토지가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고 한일병탈에 참여한 조선관리들 송병준, 이완용 고관 대작들에게 수십에서 수만평을 그 특혜로 보내주었다. 이러한 조선의 변화는 오직 일본인과 매국노들을 위한 잔치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아버지 이면배가 집안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동네 모든이들의 민원을 해결하는데 집중하였고 이러한 노고로 1921년 공적비까지 면민들이 세우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셋이 면장을 했고 재산이 많이 줄어든다. 다른사람이름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는데 지금 모 기업이 하는것처럼 이미 차명으로 관리를 했던 것인가? 하기야 이분도 전주이씨잖여!

15살이 되던해 1920년 2월 얼굴한번 못본 이와 결혼을 했고 무주군 무풍면 출신의 최문기였다. 덕유산주변의 토지를 소유했던 유복한 최씨일가의 딸이었던 것이다. 무풍이 어딘고 하니 덕유산 주변이네!

이현상이 가까운 대전을 두고 멀리 고창까지 간것은 고창고보가 전라도 수재인점과 사립학교였기 때문에 일본의 선생과 학생이 많은 공립학교와 차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군소국가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1919년에 우리도 삼일운동을 하여 전국적인 만세운동으로 번졌고 일본은 여기에 일제경찰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짓밟아 고초를 당한 많은 이들이 러시아로 건너가 사회주의가 되었다고 본다.

러시아혁명은 1917년 2월과 10월에 러시아에서 일어나 세계최초의 마르크수주의에 입각한 소련정권이 수립되던해이다. 러시아는 철저한 전제 군주체제 하였고 19세기 산업화가 진행하였고 전제정치가 지속되었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니콜라이2세는 개혁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게된다. 그러는 사이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국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고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주도로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민중들은 짜르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아버지로 믿고있었다. 1905년 1월22일 사제 가폰신부를 필두로 수많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평화와 빵을 요구했다. 짜르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였고 그 과정에 3000명이상의 학살이 발생하였다. 자본가으 착취와 노동자 온갖 파업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1905년 러시아 전함 공작 포튠킨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루마니아 정부에 항복하기도 했다. 1906년 한해 100만명이 파업을 일으켰고 농민 반란이 2600건이나 일어났다. 그사이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니콜라이2세는 많은 병력을 1500만 명을 지원하였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하여 노동력은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1915년 니콜라이2세는 직접전투에 참여하였고 국정은 황후가 라스푸틴(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은 제정 러시아 말기의 파계 수도자이자 예언자이다. 혈우병에 걸린 황태자를 치료해준 것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었고 이후 황제의 배후에서 내정간섭을 일삼다 암살당했다)을 중심으로 국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민중들의 삶이 피폐화되어 3월8일 페트로그라드 여성들이 빵과우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렸고 노동자 8만명이 가담하였다. 러시아 민중들의 시위는 전쟁에서 돌아온 일부 사병들도 참여하였고 1917년 3월2일 니콜라이2세가 동생 미하일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제정체제가 붕괴되었다. 이에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정권인 케렌스키임시정부가 탄생하였고 2월은 러시아 달력에 근거한 것이며 그레고리력으로 3월 혁명이 된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들로 주축이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민생이 어려워진 원인인 전쟁을 끝내길 바라는 민중들의 열망을 무시한채,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동시에 경제파탄을 겪자,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잃어갔었다.

9월로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시내에서는 볼셰비키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1917년 11월 7일 볼세비키 군사혁명위원회(위원장 트로츠키)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세비키 1000명의 적위대를 이끌고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타도하여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 혁명이 볼세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다.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지 6개월만의 일이다.

“ 친애하는 병사와 노동자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노동자, 병사들의 소비에트를 뜻함)을 러시아 혁명의 승리자, 세계 노동자 군대의 전위로 보고 경의합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약탈전쟁은 유럽 전역에 내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세계는 공산주의 혁명의 여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금명간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루어낸 러시아 혁명은 이미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공산주의 혁명 만세!

10월혁명이후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과 혁명을 지지하는 적군사이의 내전으로 치닫고 영국,프랑스,미국,일본의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922년 백군세력이 완전히 밀려나가 패망하엿고 1922년 12월30일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였다.

결국 러시아가 모든 공산주의의 중심이 될수 밖에 없는 것이고 러시아로 조선의 진보지식인이나 학자들이 러시아로 눈을 돌릴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었네 오히려 억측이긴 하지만 러시아 공산주의는 일부 여러가지 오류도 있고 문제도 있지만 조선에서 관심을 둘 수 밖에 없는 한가지 이유가 될수밖에 없었네... 1921년 1월 상하이에서 이동휘가 고려공산당을 결성한 것이 최초였다고 봐도 무방하고 이동휘에게 레닌이 막대한 자금까지 지원했다. 고창고보를 다니던 시절에 아마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을수 있다. 고창은 조선으 삼대재벌이라는 김성수 일가의 본토이기도 했다. 여론을 등에 업고 동아일보, 경성방직, 해동은행등 나날이 부자가 되었다. 친일과 민족주의는 이미 뗄레야 뗄수없는 사이를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김성수는 중앙고보를 설립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함으로서 자신의 민족주의를 현실화시켰다. 그러나, 실상은 중앙고보는 민족주의으 온상이 되었다.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이것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고창고보를 다니던 이현상은 돌연 상경하여 중앙고보에 편입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사망하였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하야 하면서 허수아비 황제로 무늬만 가지고 있었던 순종이 창덕궁에서 위장병과 신장염으로 투병했던 끝에 53세의 나이로 6월10일에 치르게 되었다.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조선공산당에서 전국집회를 주도하다가 체포가되면서 서울에서는 중앙고보가 앞장을 서게 되었다. 6월10일 순종의 상여가 나가는 종로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수 킬로미터 인도는 전국에서 올라온 삼십만여명의 추도 인파로 가득했고 이 살벌한 감시망을 둟고 만세를 부른것은 다름아닌 이현상이었다 한다. 6.10만세운동은 삼일운동보다는 규모가 작았으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졌고 처음부터 조선공산당과 학생들이 연계한 조직적 운동이었다. 권오상, 이현상, 이선호, 임종업 모두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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