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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 교수 북한 가족 아버지

KBS2 ‘대화의 희열’에서는 인요한 교수와 강원국 前 청와대 연설비서관, 소설가 김중혁,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 MC 유희열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눈길을 끄는 건 단연 인요한 교수였는데요. 외국인인데 왜 한국 이름을 쓸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인요한 교수는 대한민국 최초의 특별귀화자이자 의사 국가고시에 최초로 합격한 외국인이신데요.

4대에 걸쳐 교육, 복지, 의료 분야 발전에 공헌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인물이며, 지금의 앰뷸런스를 있게 한 주역이기도 합니다.

인요한은 특별 귀화에 대해 “미국 국적인데 제한적으로 이중국적을 허용했다. 제가 순천 인씨 시조”라고 밝혔다. 그는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자랐다. 스코틀랜드 켈트족 피가 섞이고 엄마는 인디언 혼혈이다. 켈트족이 인디언과 결혼해서 전라도에서 큰 거다. 복잡하다”고 말하기도 하셨는데요.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한 인 교수는 “아버지가 구급차가 없어 택시로 큰 병원으로 이송되다가 차 안에서 숨을 거뒀다”라며 “한국에는 구급차가 없어 길가에서 죽는 사람이 많았다. 미국 지인들이 아버지를 위해 모금한 돈으로 구급차를 만들기로 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는데요.

이어 “처음엔 미국에서 구급차를 수입하려고 했다. 그런데 가격이 최소 8000만 원에서 1억 원 정도였다. 그래서 마당에서 목수와 철공업자 등을 불러 15인승 승합차를 개조하기로 했다”라며 “1993년 3월 완성된 한국형 구급차를 순천소방서에 기증했다. 6주 동안 미국의 응급 의료팀을 초청해 교육도 실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인 교수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과 외신기자들 사이에서 통역을 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당선 되기 전 만난 바 있기도 한데요.

1997년 북한에 첫 방문했던 일화로 시작된 인요한의 북한 이야기는 묵직한 생각거리를 던졌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간 북한에서 또 하나의 한국을 본 인요한은 그 이후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총 29번 북한을 방문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생명이 꺼져가는 현실을 마주했던 인요한. 그는 보수 정권에 이념 그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꼭 전하고 싶었다고 밝히며, 그런 마음이 실패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 북한에서는 CIA로, 광주 항쟁 이후는 빨갱이로 오해 받았다. 내 일생은 오해 덩어리"라고 밝혔는데요. 또한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고 결과를 내고 싶었지만 인도적 지원에 대해 실패했다. 북핵 문제가 불거지고 대북 지원 정책은 인기가 없어지더라. 오만하고 교만한 생각이었다. 계산 착오다. 이제 현 정권이 가까워서 교류가 직접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from http://chagunworld.tistory.com/57 by cc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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