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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천주교 성지순례 황사평성지, 관덕정순교터 (그리고 신축교안)

https://youtu.be/vY8OilAUnJQ

안녕하세요. 성지순례하는 남자 이 베드로입니다.

오늘은 제주도 황사평성지와 관덕정순교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일단 관덕정순교터와 황사평 성지를 소개시켜 드리기에 앞서

성지들의 배경이 되는 신축교안(辛丑敎案)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1886년 한불조약(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조선에서는 종교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부패한 관리와 지역유생들 그리고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새로운 박해를 낳고있었는데요.

그중 하나가 1901년 발생한 제주 신축교안 입니다.

봉기를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서 제주 신축교안(辛丑敎案), 신축교난(辛丑敎難), 신축의거, 신축 제주항쟁

신축민란(辛丑民亂), 이재수의 난 등으로 불리어집니다.

사람들에게는 영화 제목이기도 했던 이재수의 난으로 많이 알려져있습니다.

민란(항쟁)의 원인은 복합적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선교사들이 앞장서고 함대가 그 뒤를 따르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탈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천주교 초기의 교인들에 의한 순수한 선교활동을 넘어서는

과한 선교로 제주도 토착신앙과 지역풍습을 믿는 주민들과 충돌이 잦았습니다.

한불조약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여아대(與我待-"나와 같이 대접하라"라는 문구와 고종의 직인이 찍힌 신분증)라는 여권을 가지고 다니며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리며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신앙심과 무관하게 천주교 세력을 등에 업으려고 입교하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프랑스 신부들은 제주도민을 미개인으로 여기고 양반은 물론 지방수령까지 협박을 가하거나 무기를 지니고 다니다가 사형(私刑)을 가하는것도 예사였습니다.

프랑스 신부들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인 우월의식은 뮈텔 주교 일기를 보면 알 수있습니다.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지방관리는 세수확보를 위해 가혹한 세금징수가 이어졌고

이에 중간관리자로 천주교인들이 이용되었습니다.

또한 제주도민의 반감을 천주교측으로 돌리려 한 일본인 수산업자의 농간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는 아라카와荒川留十郞를 비롯한 일본인 수산업자들이 대거 진출하여 활동했는데,

대정군수였던 채구석(蔡龜錫)과 유림 오대현(吳大鉉), 관노 출신인 이재수 등은 상무사(商務社)를 설립하고, 일본인 업자들과 결탁하여 어로독점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파견된 제주도 봉세관 강봉헌이 프랑스 선교사와 결탁하여 상무사에 대규모 잡세를 부과하였고

어로독점에 제동을 걸면서 대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시작을 제주도 지역유지의 기득권을 위한 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축교안은 세폐(稅弊)와 교폐(敎弊)로 인한 민란(항쟁)이었으나

같은 사건에 대해 여러가지 시각과 배경이 존재하는 복잡하고 가슴아픈 과거라고 할수있겠습니다.

처음에는 지방정부 관리와 주변 세력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으나

민란이 진행되면서 민란군은 공격대상을 천주교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민란을 통해 3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처형당했습니다. (700명이라는 주장도 있음)

이곳 관덕정은 본래 군사들을 훈련하는 연무장에 세운 정자였는데

신축교안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 관덕정에서 민란군에게 처형당했습니다.

관덕정앞에서 살해당한 천주교인 시신들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와 함께 별도봉과

화북천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 되었는데요

사태가 진정된 후 천주교회에서는 별도봉 밑에 묻혀있던 교우들 가운데

무연고 시신 31기를 황사평에 이장하였습니다.

현재 황사평성지는 공원묘지로 단장되어 있고 중앙에는 무명순교자 합장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추사적거지가 있는 동문터 밖에는 제주대정 삼의사비 (濟州大靜三義士碑)

이재수 · 오대현 · 강우백을 기리기 위한 비가 세워져있습니다.

이 비의 시작은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생겨나는 폐단에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으로 시작됩니다.

천주교는 이 사건을 외세에 반감을 가진 민중들이 봉세관을 습격하면서

천주교인들을 탄압 박해한 사건으로 보았고

제주도 민중들은 제국주의와 외세에 맞선 민중항쟁으로 평가해왔습니다.

2001년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천주교 제주교구'는 ‘진실과 화해’라는 주제를 내걸고 학술대회를 열었고,

2003년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통해 100여년만에 교인과

도민들간의 공식 화해가 이뤄졌습니다.

<다음은 화해 선언 전문>

'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

1901년 변방의 섬 제주에서는 제주도민과 천주교인 사이에 커다란 갈등이 빚어졌다.

‘신축년항쟁’ ‘이재수란’ ‘신축교안’ 등으로 불리는 이 역사적 사건은 20세기 벽두에 한국 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외래문화와 토착전통문화, 외세와 대한제국, 국가와 지방 사이의 충돌로 일어났다.

지난 2001년 12월 1일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천주교 제주교구'는 ‘진실과 화해’라는 주제를 내걸고 공동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100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밝히고 올바른 해결의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 학술대회 자리에서 ‘화해를 위한 올바른 방향 모색’의 취지로 다양한 논의를 거친 끝에 기념사업회와 천주교 측 양자가 합의하여 제주도민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약속을 근거로 대화를 지속시켜 왔다.

이제 사건이 일어난 지 102주년이 되는 때를 맞이하여 다음과 같이 ‘화해와 기념의 미래 선언’을 채택하여 대외적으로 선포한다.

우리는 100년 전 이 땅 제주에서 일어난 일을 제주 공동체 모두의 경험과 해결 과제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지나온 시기에 각자 다른 입장에서 평행선을 그려왔던 사건의 역사적 학문적 평가를 향후 과제로 남기면서, 서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관용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고자 한다.

천주교 측은 과거 교회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동양 강점을 위한 치열한 각축의 시기에 선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주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과거의 잘못을 사과한다.

제주도민을 대표한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는 봉건왕조의 압제와 외세의 침탈에 맞서 분연히 항쟁하는 과정에서 많은 천주교인과 무고한 인명 살상의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사과한다.

이에 우리는 제주의 후손들로서 지난날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서로 용서하며 화해를 구하고자 한다.

우리는 향후 상호 존중의 기조 위에서 과거사의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힐 것이며 또한 이를 바탕으로 제주 공동체의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적극 노력한다.

우리는 향후 제주 공동체의 미래 발전을 위한 사업을 공동으로 구상하고 추진하며, 각자의 기념사업에 대해서는 서로의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을 충분히 존중해 시행하도록 한다.

2003년 11월 7일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 (대표 김영훈ㆍ김창선)

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장 강우일)

여러 시각이 존재하고 정확한 명칭도 통일되지 못한 가슴아픈 사건에 대해

제가 천주교인이지만 최대한 다양한 시각에서 전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여기까지 신축교안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관덕정순교터 : 제주도 제주시 관덕로 19

스탬프는 제주중앙주교좌성당(제주 제주시 관덕로8길 14)

황사평성지 : 제주도 제주시 기와5길 1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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