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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스파즘

토픽셀프 2018. 8. 19. 13:12

에코스파즘

에코스파즘

돈과 광기는 서구문학의 2대 테마다. 오늘날 스트라이크, 도산, 물자부족, 물가앙등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고, 한탕주의와 실업률의 증대가 앞을 다투어 신문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한편 주가는 미쳐 날뛰듯이 하고 인플레이션과 불황이 서러 경쟁을 함에 따라 세계의 통화제도 그 자체가 광기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다.

어디서나 질문은 마찬가지다. ‘또다시 그것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것이란 물론 1930년대를 뒤흔든 대공황을 말한다. 그것은 빵의 배급을 기다리는 실업자의 대열에서 시작되어 나치의 강제 수용소로 종말을 고했다. ‘1929년’-여기서는 그 이후이 10년간을 총칭하여 이 숫자를 사용하기로 한다-그것은 한 세대를 엉망으로 만들고 그 시대의 정치를 형성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인 지금, 우리는 그 재현을 기다리고 있다. [18]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것은 공업화 사회의 전반적인 위기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소비에트형 공산주의와의 차이를 넘은 위기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경제제도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에너지 기반, 가치체계, 가족구성, 사회제도, 의사전달 방식, 시공감각, 인식론을 한꺼번에 뒤엎어버리는 위기다. 사태는 바로 지구상의 공업화 문명이 붕괴될 지경에 이르러, 지금가지와는 전혀 다른 사회질서, 즉 과학기술에 의하기는 하지만 이미 공업화에는 의존하지 않는 초공업화 문명이 출현할 징조인 것이다.

이와 거의 같을 정도로 급격히 변화한 것은, 전통적인 공업사회 제도의 붕괴와 함께 생겨난 새로운 가치체계였다. 1920년대의 은행가와 함께 생겨난 새로운 가치체계였다. 1920년대의 은행가와 투자 카운슬러를 근엄하고 단정하며 격식을 차리는 보수주의자로 여기고 있던 당시라면, 과연 누가 플레이보이 클럽의 버니걸 같은 자들이 우글거리는 본사에서, 거듭 카메라 앞에 나서는 장발의 가짜 사회주의자가 경영하는 회사에 단 1달러라도 맡길 것인가? 질문을 한 이상 답변도 나와야 하는 것이지만, 바로 이것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육성된 이사와 이코노미스트가 익살스러울 정도로 아무 대책도 준비하지 않았던 사회인 것이다.

낡은 메커니즘의 실패와 통제를 받지 않는 새로운 힘의 대두로 외국환 시장은 하려한 도박장으로 변모했다. 그 도박장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도박사와 아랍의 수장, 다국적 기업의 임원과 갱, 매춘부와 고급 뚜쟁이 들이다. 무감시하의 외국환 업자가 통화변동에 따라 의도적으로 투기를 하여 은행의 돈을 몇백 몇천만이나 축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인터내셔널 커런시 리뷰’지가 ‘그야말로 거액’이라고 부르는 돈을 은행에서 훔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잡지는 그들이 자동차에서 콜걸에 이르는 ‘참을수 없는 유혹’에 굴복했다고 단언한다. 중앙은행은 불과 5년 동안에 이미 약 1백억달러에 이르는 돈을 빌리라는 요구를 받았고, 바로 그 1백억 달러는 조용히 그러나 사정없이 소비자와 납세자에게 빚으로 돌려진 것이다.

오늘날 1조8천억 달러로 추산되는 이 유러달러가, 어떤 국가의 관리기구도 손을 대지 못하는 곳에서 세계의 통화제도 속에서 활보하고 있다. 팽창해버린 이 전체 유러크레디트 시스템. 어느 논설 기고가가 ‘차용증서의 꽃다발’이라 부른 이 시스템은, 어떤 인간의 이해력이나 통제력 또는 관리능역도 초월한 스피드로 성장해버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국제적 규모의 경제 게임에 관한 낡은 조직과 루트의 모든 것이 어떻게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가를 목격하고 있다. 이 게임에는 모든 나라의 국내경제가 도저히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말려들고 있다. 지구적 규모의 새로운 도박장이, 새로우면서도 보다 많은 판돈을 제시하면서 출현한 것이다.

아랍 제국과 기타 산유국이 몇 년 동안에 걸쳐 시도한 끝에 1973년 마침내 카르텔의 결성에 성공하여 15개월 사이에 원유가격을 4배나 인상했을 때, 중동은 밀물처럼 돈의 물결에 휘말릴 것으로 보였다. 1974년 7월 세계은행은 1980년에 이르면 석유수출국이 6530억 달러의 돈더미 위에 올라앉게 되리라고 추론했다. 이 은행은 또 1985년까지에는 그 액수가 1조2천억 달러에 다다를 것이라고도 했다.

1920년에는 아직도 세계가 식민지 시대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새로운 정치질서가 생겨나 싼 자원과 고분고분 말을 듣던 ‘원주민’시대는 막을 내렸다. 여러 국가사이에 힘의 라인업이 전체에 걸쳐 대폭적으로 수정될 것이 틀림없다. 세계적인 힘의 구조를 그렇게 변화시키려면 힘의 재분배 전쟁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유혈을 동반하거나 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공업국에 축적된 거대한 힘은 당연히 감소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가난하고 뒤늦고 약속한 나라라 생각되고 있는 나라들의 힘이 무서운 기세로 상승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좌익 급진주의자나 몽상가의 힘이 무섭다는 견해가 아니다. 재계의 중심부에서도 차차 인정되어 가고 있는 의견인 것이다. 미국 상공회의소의 치프 이코노미스트인 칼 마딘 박사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공업국과 원료산출국 사이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그 특징으로 하는 큰 과도기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이미 무거운 짐을 지나치게 짊어져, 순수한 경제적인 원인과는 별도인 주기적, 정보적 원인에 이해 붕괴 직전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사회제도와 함께, 우리는 새로운 경제위기에 접어들고 있다. 고령의 공업화 사회가 정보와 에너지와 통화의, 매우 빠르고도 특수화된 격렬한 고동에 말려들고 있는데, 그 낡은 조직은 요구되고 있는 순서와 필요한 스피드로 이 고동을 소화시킬 수는 없다. 여기에서 생기는 것은 진동이다.

갈브레이스와 마르크제 등 현대의 자본주의 비판자는, 이것은 소비자 조작의 결과이고 그릇된 뉴스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정도는 그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급속한 상품과 서비스의 다양성 증대는 또한, 이 제도의 가장 높은 레벨의 사회적, 문화적 다양성에의 방향전환, 즉 등질적인 산업집단의 붕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플레이션은 어느 사회의 달러 양이 판매에 쓰이는 제품이나 서비스보다도 빨리 늘어나고, 따라서 보다 많은 달러가 각 생산물이나 서비스에 따라붙어 가격을 인상할 때 생기게 된다(그러기에 정부는 통화의 공급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들은 오랫동안, 사회에서 화폐가 소유주를 바꾸는 속도가 가격수준에 영향을 주는 결정적인 변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달러가 이 포켓에서 저 포켓으로 움직이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소비수준은 높아진다. 그리고 이 때문에 화폐가 유통되는 스피드(이코노미스트는 이것을 화폐의 속도라고 부르고 있다)의 증대는 화폐공급의 증대처럼 작용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이 우리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는 새로운 힘을 이해하고 제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경제학이 그 편협하고 전통적인 경계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다국간에 걸친 단순한 화폐의 흐름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사상의 흐름, 나아가서 심리적, 문화적 무드의 흐름을 더욱 중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제도는 이미 과거와는 다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것을 간파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더구나 이 제도는 적잖이 통제를 벗어나 있다. 이러할 때 가까운 장래에 대한 우리의 예상은 대관절 어떤 것일까. 어떠한 위기가 당장에 들이닥치려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우리들의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의 하나는 있음직한 미래상을 그려보는 것, 즉 시나리오를 써보는 일이다.

에코스파즘, 즉 발작적 경제위기란 파국의 직전까지 다다른 경제를 말하면,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동시에 일어난 일이 없는 어떤 종류의 위기적인 사건이 집중된다. 이러한 경제하에서는 강력한 상방지향력과 하방지향력이 치열하게 전투하고 있는 군대처럼 충돌한다. 한 나라의 경제 위기가 세계에 대해서 충격파를 내보낸다. 또 예전의 제국주의 여러 나라와 식민지가 역할을 바꾸기 시작한다. 조직적 붕괴가 경제적 혼란을 악화시키고, 경제적 혼란이 조직적 붕괴를 격화 가속시킨다. 또한 의도되지 않은 생태계적, 군사적 폭발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경제에 타격을 준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변화위에 변화가 쌓이고 고도 기술사회에서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긴장이 야기된다.

분명히 에코스파즘의 시나리오는 정리된 미래상을 그려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익하고도 우리의 목적에 도움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복잡성, 즉 단순히 1923년이나 1929년이 재현으로서의 전통적인 붐이나 파국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드라마화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에코스파즘의 사고방식은 경제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친 문제에 대한 종래의 견해에까지 확대되어 그것은 1923년 및 1929년과의 비교를 통용되지 않게 하는 새로운 생태학적, 사회적, 군사적 여러 요소를 포함하게 된다.

진실은 우리가 무력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으로 올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가 행할 결의의 결과인 것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폭주하는 운명에 대해 굴레를 씌우는 현명한 조치를 취해 왔다. 그리고 에코스파즘의 시나리오는 그것이 극히 비관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생기게 될 변화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길을 용이하게 하는 과도기적 전략을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제1의 원리는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즉 경제학만으로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은 경제제도 이외의 부분을 배려함이 없이, 어떤 고정된 성장률이라거나 완전고용 등과 같은 경제목표를 달성하려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만일에 우리가 미리 에너지 위기의 가능성을 고려했더라면, 또 어떤 종류의 기술이 환경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하기 위한 노력을 했더라면, 나아가서 후생 경제학이 얼마나 가정생활과 공동체 조직을 저해하는지 생각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상태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건강과 안전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것은 터무니 없는 착각인 것이다.

에코스파즘은 단순히 경제의 영역을 벗어난 문제에 지나지 않으므로, 부차적 문제를 무시하고 오직 경제적 수단에만 치우친 대책은 모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통화의 공급, 임금, 물가, 국제수지뿐만 아니라, 자원이용과 환경교육 및 문화생활, 나아가서 수송과 커뮤니케이션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의 관계 변화에까지 모순없이 처리할 수 있는 총체적인 정책일 것이다.

제2의 원리도 또한 간단하다. 즉 과거는 재현되지 않는(또 재현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에코스파즘 분석이 대체적으로 정확하고, 현재의 긴급사태를, 공업화 사회가 새롭고 보다 진보된 발전단계로 약진하는 프로세스의 일부라고 한다면, 우리의 정책이 낡은 공업화사회의 질서를 단순히 옛날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태를 옛날로 되돌리려는 정책, 즉 고용을 부활시키거나 도로에 좀 더 많은 차를 달리게 하는 것, 교외개발을 계속하거나 사회적 획일화를 촉진하는 것, 또한 핵가족을 다시 옛날의 형태로 굳히거나 하는 정책은 모두 낡아빠진 좌익이나 우익 또는 중도세력의 지지를 받는다 해도 결국은 반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에코스파즘으로부터의 탈출로는 과거의 터널을 파는 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큰 위기도 좋은 기회라는 인식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바람직한 초공업적 미래에 스스로를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경제적인 이사결정이 점점 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게 됨에 따라, 그것은 동시에 민주주의적 책임도 면하게 된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바로 한 나라의 국민이 스스로의 경제생활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것을 사실상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러한 나라는 식민지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에 좀더 새롭고 안정된 경제질서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면, 그리고 이 질서가 세계기업 자체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큰 발작적 작용에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다국적 기업은 규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억제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다국적 기업의 생성으로 말미암은 화폐제도의 변동만이 아니다. 값싼 에너지 자원이 가난한 나라로부터 부유한 나라로 신속하고도 확실하게 흘러들어가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석유에 관한 현재의 경제적 투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건, 우리는 앞으로 최소한 5년 동안은 증대하는 혼란과 격동과 가격변동이 올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되다. 全美 과학 아카데미의 최신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는 ‘어느 자원, 그리고 다음에는 또 다른 자원이라는 자원부족이 잇따라 발생함에 따라 심각할 정도의 쇼크’에 직면할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개인주의적인, 때로는 반사회적인 대응, 예컨대 설탕에서부터 통조림 식품 내지 화장지에 이르는 상품을 사두라고 장려하는 대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민중의 새로운 신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비관주의자에게 비국민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의 과도기적 전략에 의해서만, 즉 위협당하고 있는 우리 사회와 경제 시스템에 이것을 보충할 보험과 페일세이프의 안전장치를 제공함으로써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공장을 멀리하는 이 변화는 초공업 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의 일부며, 어느 한도 안에서는 크게 장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이 마다하고 떠난 일과 똑같은 일에 사람들을 다시 되돌리려고 하는 고용정책을 연구하기 보다는, 서비스 지향 사회로의 전환을 계속하는 선택적 재고용 정책을 계획하는 편이 휠씬 더 현명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최소한 2가지가 있다. 첫째 서비스 사회는, 과거 20년 동안의 무분별한 경제성장 정책에 의해 우리들에게 남겨진 산적한 사회문제, 커뮤니티문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둘째로 서비스 지향사회는 과거의 공업사회처럼 에너지와 자원의 대량 인풋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비스 고용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전환은 차치하고라도, 다른 중요한 사회변화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된다. 그 하나는 가족제도와 관계가 있다. 공업화 시대에는 핵가족(즉 부모와 자식뿐이고, 조부모, 숙부, 숙모, 기타 친척 등의, 보살필 가족을 수반하지 않는)이 표준적이고 또 사회적으로 인정된 가족형태였다. 이혼은 비교적 드물고, 가족은 가부장제이며 영속적이었다. 실질적으로 우리의 경제사회 계획은 지금도 모두 이 모델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다음 발전단계로 보다 스무스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는 고전적인 형태의 핵가족이, 흐리멍텅한 도덕이나 방종 때문이 아니라 핵가족이 이미 주민 대부분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급속하게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핵가족이 없어진다거나 그것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대신하는 새로운 체제가 급속히 발생하여, 경제와 사회의 두 정책면에서 고려에 넣지 않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흔히 알려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인구의 많은 부분이 이미 핵가족의 테두리 안에 살고 있지 않다. 지금 도시에서는 전체 아동의 25% 이상이 결손가정의 집에서ㅣ 그것도 대부분이 이혼한 어머니라거나 미혼모의 손에 양육되고 있다. 이 사실은 사회생활 일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 시장 상품계획 주택 및 교육에 대해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새로운 양식이 너무나 일반적이기 때문에, 모마라는 조직까지 생겨 독신모에게 어드바이스나 원조, 그룹의 정치의식 주입 등을 행하고 있다.

가족구성이 급격한 변화를 계속함에 따라, 새롭고도 좀더 유연한 노동제도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마지막으로 고용된 자가 ‘제일 먼저 해고되는’ 관습적인 선임자 우선의 룰을 바꿀 방법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룰 때문에 여성뿐만 아니라 소수민족, 젊은이 등 보호바다지 못하고 있는 그룹이 실업의 과녁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선임자 우선의 룰은, 공장에 공정성을 도입하기 위해 겨우 쟁취된 시도다 그것은 가혹한 경제생활로부터 노동자를 지키기 위한 보호제도의 하나다. 어떠한 조합의 간부도 이원칙을 그리 간단하게 방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을 대신할 적당한 수단이 없는 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최소한 과도기에 있어서만은 정부도, 노동자가 스스로 선임자로서의 신분을 방기하도록 특별한 인센티브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초공업사회는 지나치게 복잡하기 때문에, 낡은 공업사회의 스타일에 따라 중앙집권적으로는 운영할 수 없다. 공업적 모노컬처가 초공업적 멀티컬처에 길을 양보함에 따라, 획일적인 국가정책의 파탄이 어느 때보다도 더 확실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에코스파즘은 경제정책을 지방으로 분산화시키라는 주장을 크게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거듭 강조했듯이, 공업사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국가적인 기반에서 해결할 수는 없다. 국가의 여하한 해결능력까지도 초월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에너지나 유러달러나 다국적 기업뿐만이 아니다. 인플레이션, 노동자의 이동 패턴, 공해 및 그 밖의 무수한 문제가 다국간적 차원의 양상을 띠고 있다.

나는 에서 공업국가의 계획에 관한 3가지의 기본적 특징에 대해서 주의를 촉구했다. 즉 첫째는 다른 관계를 배제시키고 경제만을 중시하는 집념, 둘째는 5년을 장기로 보는 시간적 편견, 셋째는 일반시민으로부터 결정권을 빼앗아 전문가와 관료에게 맡기는 엘리트적 특성이 그것이다. 보다 많은 계획과 통찰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우리의 컨트롤을 개선하기 위해 현재 취하고 있는 수단의 대부분은, 낡은 공업사회의 사고방식에 기초해있다. 이들 수단이 다국간적인 힘에까지 강화되고 높여지면, 보다 더 집중된 테크노크래틱한 사회상을 그려낸다. 그것은 모든 일이 개인으로부터 훨씬 떨어진 곳에서 결정되고, 또 바로 그 때문에 현재보다도 훨씬 비효율적인 사회인 것이다.

왜냐하면, 에코스파즘이 가르치는 바는, 우리가 미래에 등을 돌릴수도 없고 미래를 피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통찰은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불가결한 것이다. 내일의 수단을 상상하거나 그것을 선택하거나 할 능력이 없다면 문명도 존재하기 않을 것이다. 진화를 위해서는 단지 2, 3명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걸쳐 이 능력이 대대적으로 높여지지 않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정치적 통찰이 민중의 컨트롤 밑에 놓이지 않을 경우, 그것은 우리를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스피드의 변화하에서는 예견할 능력이 없는 민주주의는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견적인 정부라 하더라도, 효과적인 시민의 참가와 나아가서 시민의 관리가 없는 경우에는 그에 못지않게 치명적이다. 미래는 엘리트에게 무시되어서고 안 되고 독점되어서도 안 된다. 예견적 민주주의만이 우리 스스로가 처해 있는 이 모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부여할 수 있다.

눈앞에 박두한 몇 년 동안은 의심할 나위 없이 고통에 찬 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자동적인 진보라는 사고방식이 유치하다면, 불가피한 퇴보라는 사고방식도 유치하다. 당면한 사태를 뛰어넘어 그 앞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단순히 새로울 뿐만 아니라 보다 올바르고 보다 좋은 것으로의 돌파구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레이먼드 프레처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를 그토록 위협한 모든 경고의 조짐-그것들은 죽음의 징후가 아니라 탄생의 징후가 될 것이다.’

● 내가 저자라면

‘에코스파즘(발작적 경제위기)’는 1975년에 발행되었다. 1970년에 발행된 ‘미래의 충격’과 1980년에 발행된 ‘제3의 물결’의 중간지점에 있는 책이다. 책의 발행 시기도 그러하지만 책의 성격도 그러하다. ‘미래의 충격’과 ‘제3의 물결’의 중간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대하여 앨빈 토플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미래의 충격’이 예언한 경제적 전망은 분명히 지나칠 정도로 장밋빛이었다.… 나는 우선 공업사회의 전반적 위기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위기는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세계적 공업사회의 경제체제를 흔들어 놓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 이르는 동안에 위기가 격화되고, 보다 많은 부문에서 경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까지도 변화의 속도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라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 다음에 쓴 저서를 통해 그 오류를 시정하려 했다. 그리하여 ‘에코스파즘’에서는 세계적 위기의 경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제3의 물결’에서는 더 깊이 이론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행하려고 했다.”

1972년, 공업국가로서의 기틀을 단단히 다진 선진 국가들은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1929년의 대공황이라는 공포를 잊지는 않았지만 다시 그런 공포가 현실화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는 경제적 번영에 안주하고 있었고 불황이라는 말은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해 1차 오일쇼크가 세계를 덮쳤다. 그것은 번영을 질주하던 세계경제에 큰 충격이었다.

누구도 석유자원의 금수禁輸와 에너지 위기에 대해 귀 기울이지 않을 때,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불황’이라고 자신이 이름 붙인 문제에 대한 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1974년 ‘에스콰이어’지의 청탁으로 게재되었던 글은 처음으로 ‘에코스파즘’이라는 용어를 세상에 알렸다. 앨빈토플러의 말에 의하면 ‘세계는 한꺼번에 급격히 끝나버리는 것도 아니고 차차 사라져 가는 것도 아니라 발작으로 끝나게’될 것이다. 그러한 전망을 한 앨빈 토플러는 위기를 완화시키고, 더 확실하면서도 현명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전략을 이 책 ‘에코스파즘’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했다.

‘가격이 너무 빨리 등귀하기 때문에 물품의 정가가 얼마였는지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승수乘數’, 즉 공정가격에 몇을 곱하는지 나타내는 숫자인 것이다. 원래는 35센트였던 버스표가 1천이라는 승수를 가졌다고 하면, 그것의 실제 가격은 350달러라는 것이다. 석유 1갤런이 7백달러, 허쉬 막대초콜릿이 1백달러가 된다. 계란 1개가 70달러, 혹은 30분 후에 1백달러가 될지도 모른다.‘

‘이 시나리오는 먹을 것이 없는 어린이, 갈퀴로 낙엽을 긁는 신세가 된 대학생, 그리고 좀처럼 구할 수 없는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니는 수백만의 불안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생생하게 가르쳐 준다. 그것은 또한 부富가 하룻밤 사이에 재로 변하고 비참과 격분이 전국에 만연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앨빈 토플러가 제시하는 불황의 시나리오는 섬뜩하고 처참하다. 초인플레이션의 시나리오와 전반적 불황의 시나리오를 거쳐 발작적 경제위기라는 에코스파즘의 시나리오까지 이끌어가며 미래의 현상을 보여주는 토플러의 시각은 충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담담하면서 사실적이다.

온갖 시나리오를 풀어 놓은 이후 토플러는 위기에 대한 대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시한다. 토플러가 제시하는 그 첫 번째 원리는 경제학만으로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통화의 공급 임금, 물가, 국제수지뿐만 아니라, 자원이용과 환경교육, 문화생활, 나아가서 수송과 커뮤니케이션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의 관계변화까지 모순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총체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두 번째 원리는 낡은 공업화사회의 질서를 단순히 옛날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용을 부활시키거나, 도로에 더 많은 차를 달리게 하거나, 교외개발을 가속하는 것은 결국은 반동적인 것이라고 토플러는 말한다.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원리에 이어 토플러는 과도기의 전략 다섯 가지를 내놓는다. ‘현재 통제하에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주요한 견제적 힘들을 통제함으로써 세계경제의 안정을 회복한다.’ ‘초공업사회의 안전장치를 만든다.’ 등 다섯 가지의 전략은 경제위기를 예견하는 토플러가 충심으로 내어놓은 의견들이다. 물론 30년이나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경제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되돌려 보며 허물을 짚어내기보다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경제의 현실적 흐름과 예측을 따라가 보는 것도 안목을 기르는데 도움을 준다.

책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읽기의 난해함이다. 유러달러에서 외환시장, 공업화사회의 현상과 패착, 다국적 기업의 힘, 에너지 문제, 인플레이션의 공포 등 경제 상황과 시대의 조류를 엮어 풀어내는 내용은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책을 쓰던 당시의 경제상황을 정확히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책은 그렇게 매끈하고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친절하고 많이 거칠다. 경제적 지식이 없는 독자를 위한 배려는 없는 셈이다.

번역의 문제도 난해함의 큰 요인으로 생각된다. 거의 직독직해가 아닐까 싶을 만큼 번역문장은 원문을 그대로 풀어내는데 그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일부에서는 맥락의 단절도 보인다. 책을 따라가다가 때로는 독자가 해석을 하고 분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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