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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아닌 ‘예수 따르미’이기를 상상하다

이 글은 [기독교사상] (2013.3)에 게재된 서평 원고이다.

서평_(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 by 로빈 마이어스 - ‘신자’가 아닌 ‘예수 따르미’이기를 상상하다_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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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신자’가 아닌 ‘예수 따르미’이기를 상상하다

로빈 마이어스, 김준우 옮김,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

―어떻게 그리스도 예배를 중단하고 예수를 따르기 시작할 것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1984년 말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아시아 그리스도론 워크숍’에서 발표한 “Jesus and People"에서 안병무 선생은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였다. 가톨릭교회당 앞 금관을 쓴, 시멘트로 된 예수상 밑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눈물 흘리는 예수, 그 눈물방울이 머리에 떨어진 거지, 하여 예수와 거지들이 대화한다. 예수는 자신이 시멘트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하면서 머리에 쓰인 금관을 벗겨달라고 한 뒤 이렇게 말한다.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시켰다. ...... 내겐 금이 필요 없고, 금은 네게 필요하다. 금을 가져다 네 벗들과 함께 나누어라.”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대해 서양의 진보적 신학자들조차 당혹스러워 했던 ‘민중 메시아론’을 이야기하기 위한 서론이다. 1979년에 쓴 「예수와 오클로스」에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안병무 특유의 민중론인 오클로스론은 1984년 발표된 「예수사건의 전승모체」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이 오클로스론은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선생의 해석학적 시각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복음서의 어느 것이 예수가 진짜 한 말인지, 어느 행적이 예수의 진짜 행적인지를 가려내는 데 몰두했던 이제까지의 연구와는 달리, 주변의 대중을 보지 않으면 예수를 읽어낼 수 없다는 선생의 주장은 개체로서의 인물 연구에서 사건 연구로 관점을 옮긴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이때 사건연구를 위한 텍스트가 「마가복음」인데 거기에서 예수 주변의 대중으로 묘사된 이들이 바로 ‘오클로스’다. 즉 「마가복음」은 오클로스가 기억한 예수를 잘 보전하고 있는 텍스트라는 얘기다. 하여 「마가복음」에서 오클로스의 사회학적 함의를 읽어내면 기억연구의 관점에서 예수의 역사성을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 선생의 오클로스론의 골자다.

그리고 이 논의를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선생의 에세이가 바로 “Jesus and People"이며, 그 핵심 테마는 ‘민중 메시아’이다. 그 논지를 펴기 위해 선생은 김지하가 1971년에 쓴 <금관의 예수>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김지하가 독재정권에 의해 수배되어 도피중일 때 썼고 그가 투옥된 1973년 반독재 저항운동의 기조로 펼쳐진 가톨릭문화운동의 단골메뉴로 전국을 돌며 공연된 희곡이었다. 저 유명한 노래 ‘금관의 예수’는 이 공연에 참여했던 김민기가 이 희곡에 담긴 대사를 노래말 삼아 만든 것이다. 노래와 함께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꽤나 유명했던 희곡이었고, 그 속에 담긴 강렬한 신학적 문제제기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신학자가 받기엔 너무 과격한 논점이었기에 신학은 오랫동안 침묵만 했을 뿐이다. 안병무가 이 문제제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클로스론을 발전시킨 5년여의 집중적인 탐구가 전제되어야 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신학적 의제로서의 민중 메시아론이 탄생하였다.

로빈 마이어스가 쓴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를 받았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바로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이었다. 몰트만(Jürgen Moltmann) 같은 서양의 가장 진보적인 학자로부터 신학적으로 참조할 수 없다는 코멘트를 받았고, 한국의 여러 신학자와 목회자들로부터 ‘민중 우상주의’라고 맹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여러 민중신학자들로부터도 민중신학의 치명적 실수로 간주되기까지 했던 것이 놀랍게도 이름도 몰랐던 미국의 한 목회자가 쓴 저작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교회로부터 예수를 구원하기’(Saving Jesus from the Church)라는 책의 제목은 그 논점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안병무는 이런 문제의식을 한국에서 벌어지는 민중의 저항들에서 보았다. 특히 1980년 광주사건은 선생에게 가장 결정적인 민중 메시아적 사건이었다. 모든 언론 매체들이 철저히 은폐, 왜곡하고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그 진상을 선생에게 가장 먼저 증언한 것은 ‘유언비어’(rumor)였다. 그것의 전달자는 학자도 기자도 목사도 아닌 바로 민중이었다. 이러한 이야기 전승 과정을 목도하면서 예수가 죽은 후 그 이야기를 가장 먼저 전달한 전승추체가 그 사건을 목격한 민중이었고 그 전달 방식이 유언비어였다는 선생의 「마가복음」 해석이 바로 오클로스론이었다. 이 텍스트는 전달자인 민중을 오클로스라는 그리스어로 표현했던 것이다. 요컨대 선생은 동시대 한국의 역사적 현상에서 민중 메시아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로빈 마이어스도 그 점에서 비슷하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오클라호마 주의 작은 시골 교회를 25년간 사역하면서 열 배 이상 성장시켰다. 한데 그의 성장전략은, 다른 대부분의 교회들처럼 규모 확대를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하는 성장주의적 전략을 취한 것이 아니다. 그가 담임하는 교회는 노숙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청각장애아동을 위한 고아원과 자폐아동을 위한 기관을 운영하며, 노인들의 집을 무료로 고쳐주고 공립학교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사업을 하고 있으며, 니카라과의 산악지역에서 연중무휴의 진료실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또한 미국이 일으킨 전쟁과 환경파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기독교가 주도하는 인종차별과 인권유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가장 보수적인 지역(오클라호마 주)에서 가장 극우적인 기독교가 활개 치는 가운데 이 교회의 이러한 활동과 주장은 무모하리만큼 도발적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그 교회 교인들의 신앙과 사고능력을 성장시켰다. 그런 광경을 25년간 이끌면서 그 자신이 배운 것이 바로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인식이었다.

안병무처럼 그도 연구실 골방이 아니라 동시대 삶의 현장에서 성찰한 문제인식에서 1세기 팔레스티나의 예수에 대한 탐구를 새롭게 했고, 동시대의 교회가 그 예수를 얼마나 곡해시키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하여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해내지 않으면 예수는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박제된 예수, 무력한 신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병무에게서 삶의 현장은 독재정권의 폭압적 지배였고, 마이어스에게서 그것은 제국과 제국종교가 되어버린 미국과 미국교회의 야수적 폭력성이었다. 안병무에게서 성찰의 계기는 그 폭압적 지배에 의해 자행된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는 민중의 유언비어였고, 마이어스는 자신이 사역하는 평범한 교인들의 탈교회적인 신앙실천이었다. 그리고 안병무는 민중신학적 오클로스 해석에서 그러한 문제인식을 신학화할 수 있었고, 마이어스는 웨스터연구소(Westar Institute)의 주도로 진행된 예수세미나(Jesus Seminar)에 참여하면서 얻는 학문적 통찰을 통해 그 인식을 신학화했다.

물론 민중신학자인 안병무는 마이어스보다 더 민중적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25~37)를 선생은 강도에 의해 초죽음이 되어 쓰러진 이가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위를 낳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구원자라고 해석하였다. 그런 점에서 안병무라면 마이어스의 책을 보면서 그 교회 교인들의 선한 행동들이 가능했던 것은 노숙인이며 청각장애아동이고 니카라과의 빈민들 덕이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예수, 그 예수 신앙이 예수를 왜곡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교회에 의해 박제된 예수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혹은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해내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양자의 생각은 겹친다.

또한 그러한 예수 구출하기를 실행하는 방식을 마이어스가 ‘예수 따르기’(following Jesus)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표현 또한 안병무를 연상시킨다. 이 책의 부제는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어떻게 그리스도 예배를 멈추고 예수 따르기를 시작할 것인가?“(How to stop worshiping Christ and start following Jesus.) 그는 교회의 그리스도 신앙제도가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에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을 부여함으로써 신앙을 왜곡하며 나아가 그리스도를 왜곡하고 있다고 문제제기 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그러한 교회의 신앙 대신에 예수 따르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 따르기는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 약탈당하는 자, 불행한 자아 함께 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마이어스는 교회를 떠났거나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보수주의 신앙에 넌더리치고 마음으로 그 신앙제도에 귀속되기를 거절한 이들을 위해 진정한 예수 따르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권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곧 그가 의도한 독자는 신자(believers)가 아니라 그것에 의혹을 품는 자이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를 따르는 것(following Jesus)이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때 예수 따르기를 실행하는 사람들을 마이어스는 ‘본받는 자’(imitators)라고 이름 붙였다. 결국 예수 따기를 수행하는 것이란 교회가, 특히 4세기 이후 권력화된 교회가 제도화했던 그리스도 예배의 수행자가 아니라 예수가 했던 것을 본받아 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여 번역자는 이를 ‘예수 따르미’라는 탁월한 표현으로 옮겼다.

흥미롭게도 안병무 역시 교회의 신자가 되기보다는 예수를 따르는 것을 ‘이미타티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라는 라틴어 문구로 표현하곤 했다. 이 문구는 본래 15세기의 신비가이며 수도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가 「데살로니가전서」 1,6을 인용하여 저술한 책의 제목이었다. 그 책 역시 교회의 예배를 실행하기보다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주장했다. 안병무는 이것을 민중신학적으로 재활용했을 뿐이다. 토마스 아 캠피스와 안병무, 그리고 로빈 마이어스 사이의 연속성이 바로 “신자가 아닌 예수 따르미”(not believers but Jesus imitators)라고 말한 마이어스의 주장 속에 잘 드러난다.

로빈 마이어스는 동시대의 제국종교인 미국의 교회가 왜곡시켜 놓은 주요 신앙 항목 열 개를 열 개의 장의 제목으로 잡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현란한 비판적 논리를 전개한다. 그리고 주로 예수세미나를 통해 얻은 새로운 연구들을 활용하면서 교회가 곡해시켜 놓은 예배 속의 예수가 아닌 삶의 현장 속의 예수에 관한 새로운 해석들을 그 자신의 언어로 재현하고 있다.

한데 그 내용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그의 수사법이다. 그 비판과 재현이 전혀 체계적이지 않고 다분히 모자이크적인 수사법 말이다. 그것은 독서하는 이에게 책의 치밀한 논리에 빠지게 하기보다는 생각의 틈을 열어 놓는 기법처럼 보인다. 즉 이 책의 수사법은 독자의 상상력에 열려 있다. 어찌 보면 이 열 개의 장은 열 개의 주제들을 놓고 사람들이 함께 토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대화 자료집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 열 개의 장 앞과 뒤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감싸고 있는데, 그 장 제목이 각각 「설교자의 악몽」과 「설교자의 꿈」이다. 설교자인 저자 역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각각 세 번씩 반복하고 있는 다음 문구는 그 두 개의 꿈의 결론이다. “만일 이것이 기독교이고 이런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면 나는 그중 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기독교이고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다.”

저자가 존경해 마지않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 1963년 8월 워싱턴 행진(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의 클라이막스인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했던 저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을 연상시키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다.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 그가 꿈꾸는 세상에 대해 사람들이 함께 상상하게 하고 나아가 사람들 각자가 그것에 자기를 끼워 넣어 상상을 이어가게 했던 것처럼, 마이어스도 자신이 꾼 두 개의 꿈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며, 되고 싶지 않은 그런 기독교인의 모습과 되고 싶은 기독교인의 모습에 독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바람을 끼워 넣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에서 인용한 각각 세 번식 반복된, 두 개의 꿈에 관한 결론적 문구는 저자의 결론인 동시에 독자의 상상의 도입부인 셈이다.

앞에서 길게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안병무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안병무에 나의 해석을 오버랩시켰다. 하여 마이어스가 생각하지 못했던 민중에 대한 안병무적 상상으로 우리 시대의 예수 따르미의 모습으로 내가 함께 하는 교회의 이상을 다시 그려보았다. 그리고 문뜩 궁금해졌다. 내가 매주 만나는 교회의 친구들은 이 항목들을 따라 어떻게 상상을 펴는지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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