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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계절 03

토픽셀프 2018. 12. 18. 07:44

사 계절 03

[원어스 이성팬픽 / 원어스 빙의글] 사 계절 03

W. 계 절

[ 나의 겨울 ]

9. 12월 26일

“으아, 상쾌해―”

어제 그렇게 돌아와서 씻고 바로 잤더니 7시에 바로 눈이 떠졌다. 기분 좋은 채로 잠이 들어서 그런지 기분 좋은 꿈을 꾸고, 또 일어나니 몸이 상쾌했다. 이불정리를 하고 방의 창문 커튼을 여니 밤사이에 계속 눈이 왔는지 눈이 쌓여있었다. 눈은 참 신기해. 차가운 겨울에 내리는데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듯해져… 그 모순이 눈을 더 좋아지게 만든다.

우리 학교는 다른 학교보다 방학을 빨리 해서 이브날에 방학식을 했다. 그래서 이제 학원도 방학 시간표. 보자…고3 이과가 11시니까 여유 넘치네. 씻고 나와 엄마가 해놓으신 토스트를 물고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오, 어바웃 타임하네.”

내 인생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 ‘어바웃 타임’. TV를 틀자마자 특선영화로 하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는데 게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포즈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너무 로맨틱해… 시간이 조금 지나자 주인공들의 결혼식 장면이 나왔다. 맞아, 빨간 원피스. 몇 번을 봐도 프로포즈 장면은 인상 깊고 저 빨간 원피스는 예쁘다. 결혼식날에 비가 많이 오지만 너무 행복해 보이는 두사람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지…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할까? 결혼을 하게 된다면 누구랑 하게 될까? 김건학…처럼 잘생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 학원 갈 시간이 다 되었다. 양털 후드집업에 귀가 시려우니까 귀도리까지 하고. 얼마전에 배송온 크로스백을 뜯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나가 눈밭을 걷는데,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을 찾으며 밟으면 ‘뽀드득’소리가 나는 게 너무 좋다. 역시 겨울 너무 좋아. 사계절이 내내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아, 아닌가. 계절은 지나가고 다시 오니까 더 소중하지. 아마 내내 겨울이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겨울을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공부방 앞까지 다 왔다.

아, 어제 김건학이 데려다줬으니까 뭐 젤리라도 사줄까. 하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마트에 들려서 러버덕 망고 젤리를 샀다. 하나 밖에 안들어있는데도 비싸지만 귀엽고 맛있으니까…합리화 하면서 공부방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수업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벌써 애들은 와있었다. 김건학만 빼고. 이상하다, 맨날 학원에서 사는 놈이. 뭐 오늘은 늦을 수도 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진. 수업이 시작했는데도 오지 않아서 혹시 무슨일 있나 싶어 쌤한테 여쭤봤는데…

“쌤, 김건학은요? 오늘 안와요?”

“어머, 건학이가 말 안해줬니?”

“뭘요…?”

“이제 수능 준비한다고 겨울방학 동안 기숙 학원 간다고 학원 끊었어.”

“네? 기숙학원이요?”

“응, 그래서 어제 송별회도 같이 한거였어.

여주 너한테 말 안했니?”

“네…”

기숙학원이라니, 진짜 처음 듣는 말이다. 학원 끊으면 끊는다고 말을 해주던가 섭섭하게… 아, 설마 어제 마지막이라고 한게 이런거였어? 와…말도 안해주고 그런식으로…?

“너넨 알고있었어?”

“응. 건학이가 전에 말해줬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애들. 와, 진짜 나한테만 말 안한거야? 김건학 너무하다 진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왜 나한텐 말 안 해줬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근데 진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섭섭한 게 아니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 왜 나한테만?

“여주야, 근데 저 젤리는 뭐야?”

“젤리요? 아…”

선생님이 젤리는 뭐냐고 물으시길래 주변을 살펴보니 필통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러버덕 젤 리가 있었다. 김건학 주려고 아까 사온 젤리… 괜히 쟤가 밉다. 김건학은 공부방 끊는 것도 말 안 해주는데 나 혼자 뭐가 고맙다고 젤리까지 준비해서는. 설레발 대마왕도 내 설레발은 못 이길 거 같아. 아 쪽팔려.

“이거 동생 주려고 산 거예요.”

진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하지만 ‘김건학 주려고 샀어요.’라고 말할 수 없어 대충 얼버무리고는 공부방을 나왔다. 김건학 생각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어….

공부방이어서 김건학 생각이 난 게 아닌 건가 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집에 도착해서도 김건학 생각만 주구장창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까부터 수백 번 되뇌이던 질문, “왜 나만?”

나 싫어하지 않는 다면서, 시험 잘 볼 거니까 한숨 쉬지 말라면서, 호떡 꿀 떨어진 것도 닦으라고 휴지 건네줬으면서, 문제도 알려줬으면서, 미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같이 눈 맞아줬으면서, 집까지 데려다줬으면서…남은 크리스마스 너도 잘 보내라고 말해줬으면서…그랬으면서…‘이 멤버 리멤버’까지 같이 외쳤으면서. 아, 포에버가 아니라 리멤버라서? ‘기억’만 하겠다 이건가? 와, 치밀한 새끼.

“끝까지 나쁜 놈이네”

애꿎은 젤리만 꿀밤 먹였지.

10. 1월 12일

크리스마스 이후로 내내 김건학을 생각하다가 결국은 인정해버렸다. 미워하는 마음이 쌓이다, 또 쌓이다가 정이 되어버렸는지, 절대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장담했던 그 마음이 사실은 좋아하고 있던 마음이었다고… 나는 김건학을 좋아하고 있는 거라고…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에 내심 좋아서 설렜던 이유도, 나만 김건학을 신경 쓰고 있는 거 같아 짜증 나던 이유도, 걔도 날 신경 쓰고 있어서 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던 이유도, 노래방에서의 작은 고동이 계속 울리던 이유도, 어색하지만 집으로 같이 가는 길이 따뜻했던 이유도, 싫다 싫다 했지만 눈으로 계속 김건학을 쫓고 있던 이유도, 나의 그 모든 행동의 이유가 김건학을 좋아해서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럼 뭐 해. 공부방에 있으면 아직도 작은 탁자에서 문제 풀고 있을 것 같은 김건학은 이제 없다. 기숙학원 간 게 거짓말은 아닌지 매일매일 공부방 가느라 동네를 돌아다녀도 코빼기도 안 보인다. 이제 고3인데, 공부해야지. 짝사랑에 감정 낭비할 시간이 어딨어. 당장 올해 수능 보는데…

“진짜 바보 같다 김여주…”

자기 마음도 몰라서 아무것도 못해보고 좋아하고 있는 거 알자마자 접어야 한다니. 그 노래방을 지나칠 때마다, 공부방에 있을 때마다 불쑥불쑥 생각이 나는 거 보면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아 맞아, 그 노래. 크리스마스 이후로 내 플레이리스트엔 스무 살의 전화할게가 빠지지 않고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김건학을 떠올리면서 듣는 노래. 가사가 정말 다정해서 그럴 일 없다는 거 알면서도 김건학이 그렇게 말해주는 거 같아서 너무 따듯한 노래인데 들을 때마다 괜히 울컥한다. 제일 서러운 건…이 노래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가 정작 김건학 목소리로 부르는 그때 이 노래가 생각이 안 난다는 거…

김건학이 부른 그 노래처럼, 김건학이 잊히길 바라면서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11. 2월 9일

공부방에서 매일 수업 듣고 복습하고 다른 과목 인강 듣고 또 복습하고 문제 풀고 바쁘게 살다 보니 겨울방학은 어느새 끝났다. 오랜만에 입는 교복은 너무 어색했지만 학교를 가서 애들 볼 생각에 설레는 마음이 더 컸기에 기분 좋게 겨울 방학과 봄 방학 사이의 그 애매한 날들을 나쁘지 않게 보냈다. 모든 과목이 진도가 다 나갔기 때문에 들어오시는 선생님은 영화를 틀어주시기도 하고, 자습을 주시기도 하고. 나와 영진이를 비롯한 친구들은 신나게 수다 떨고, 특별할 거 없이 무료한 날들의 연속이다가 그날이 왔다. 우리에겐 종업식이고, 3학년 선배들에겐 졸업식인 그날.

강당에서 종업식을 한다는 말에 우리 모두가 짜증을 냈다. 날씨도 춥고 움직이기 귀찮은데 방송으로 하지 뭐 하러 강당까지?라는 마음이었다. 강당으로 가기 싫은 이유는 한가지 더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악, 밀지 좀 마.”

내려오면 바로 강당이 있는 남측 계단으로 오는 앞 반 아이들과 중앙 계단을 통해서 교무실 쪽에서 오는 뒤 반 애들이 만나서 서로 밀치고 복작복작 대는 거. 애들이 너무 많아서 남측 계단에 멈췄는데 교무실 쪽에서 오는 김건학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

놀라서 입모양으로 인사를 하는 김건학을 보고도 멈춰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하려고 했을 땐 이미 지나쳐 강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별로 많이 생각 안 나길래 맘 접었나 했더니, 아닌가 보다. 스치듯 잠깐 봤는데도 미칠 듯이 두근대는 거 보면. 짜증 나게 오늘도 잘생겼네.

12. 2월 15일

설날 연휴의 시작이다. 아직도 나는 언제 고등학생 되고, 언제 어른 되나 했던 초등학교 6학년에 멈춰있는 거 같은데… 정말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러서 열아홉 살 설날을 보내게 되다니… 새벽 일찍 차에 올라서 12시가 다 돼가지만 아직도 차에 있다. 차가운 공기로 김이 서린 창문에 의미 없는 낙서만 그리며 잠도 오지 않는 심심함을 달래고 있었다.

“여주야, 아빠 좀 졸리려고 하는데 음악이라도 틀어줄래?”

“아, 네―.”

멜론에 들어가서 셔플 되어있는 아무 곡이나 틀었다.

‘함께 있단 이유로 행복했었던

우리들의 겨울날의 소중한 기억들’

아빠는 한참 듣다가 ‘이제 캐럴은 좀 때가 지나지 않았나?’라고 한마디 툭 던지셨다. 그런가… 이제 때가 지나버린 걸까? 하긴 우리 동네만 생각해도 며칠 전까지 있었던 크리스마스트리들은 다시 창고 속으로 들어갔고,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이라고 적혀있던 슬로건들은 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로 바뀌긴 했지…

이제 길거리에서 더는 들리지 않는 캐럴처럼, 크리스마스는 이미 진작에 끝난 걸 수도 있다. 이제는 꿈만 같다고 느끼는 김건학과의 크리스마스 추억도 건학이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는데, 이미 다 끝났는데 나 혼자 끌어안고서는 놔주지 않은 게 아닐까.

아직도 많이 좋아하지만 건학이를 생각할수록 서글퍼지는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진전이 없을 감정을 빨리 접으라고 나한테 알려주고 있는 거였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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